미로헌 탐구생활 - 공간이 바꾸는 관계의 풍경
내가 미로헌에서 가장 애정하는 공간은 바로 공동 창고다.
공동 주거의 수많은 장점 중에서도 공동 창고의 효능은 압도적이다.
가장 탁월한 효능이자 미덕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쓰게 해 준다는 점이다.
미로헌의 전체 연면적은 100평이 약간 안 된다. 이 중 주방과 살롱 등 공용 공간을 제외하면, 네 가구의 개인 공간은 생각보다 넉넉하지 않다. 부부 구성원인 비누와 마루가 제일 넓게 써도 20평이 채 안 되고, 나는 아이들 방 포함해 16평, 수와 루나는 열 평 전후다. 그런데 좁다는 느낌 없이 잘 살고 있는 건, 바로 이 공동 창고 덕분이다.
2층에 만든 공동 창고는 천고가 5미터에 달하고, 폭은 2미터쯤 된다. 라왕 합판으로 20여 개 수납 박스를 짜 넣었다. 계절 침구, 의류, 가전, 여행가방 등 부피 큰 물건들을 여기에 한데 보관한다. 천장 일부는 다락 형태로 개방해서 대형 캐리어나 병풍처럼 드물게 쓰는 것들을 올려둔다. 워낙 높아 사다리는 필수 장비다.
특이한 점은, 소유자 기준이 아니라 ‘물건의 성격’과 ‘사용 빈도’에 따라 구획을 나눠 수납한다는 것. 긴 코트는 긴 코트끼리, 자주 쓰는 물품은 꺼내기 쉬운 칸에 수납하는 식이다. 사람별 구획이 아니라 ‘함께 쓰는 공간’ 기준이다.
그리고 이곳은 단순히 물건만 공동 보관하는 곳이 아니다. ‘공동 사용’과 ‘공동 관리’라는 약속이 전제된 공간이다. 계절이 바뀔 때면 하루 날 잡아 다 함께 정리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적절히 위치를 바꾼다. 말은 ‘공동 창고’지만, 실상은 각자의 공간을 확장해 주는 또 하나의 방인 셈이다.
특히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오래 살림을 해온 터라, 공동으로 쓸 만한 물건들이 많다. 대표적인 게 침구다. 1인 가구 수나 루나에게 손님이 오면, 내 손님용 침구를 같이 쓴다. 물론 빌려 쓴 사람이 세탁해서 제자리에 정리해 놓는 것이 원칙이다.
여행 가방도 마찬가지. 제주는 섬인 까닭에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여행 가방의 필요성이 더하다고 할 수 있다. 각자 가지고 있던 캐리어 중에 낡았거나 쓰임이 덜 한 것들은 다 정리했다. 다섯 명이 동시에 사용할 확률이 낮으니 식구들과 공유하면 된다.
공동 창고를 대청소하는 날은 ‘나눔의 날’이 되기도 한다. 나는 쓰지 않지만 누군가는 요긴하게 쓸 물건들, 사놓고 방치된 물건들을 꺼내놓는다. 일종의 ‘미로헌 플리마켓’. 이때도 주인을 찾지 못하면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한다. 그 담당자가 바로 나. 주기적으로 며칠 동안 현관에 가방을 두고 기증 물품을 받는다. 귀찮기는커녕 꽤 즐거운 일이다.
공동 창고 외에 또 하나 중요한 공동 보관소가 있다. 신발장이다. 신발장은 두 군데로 나뉜다. 하나는 현관실 옆 창틀 아래의 ‘데일리 슈즈존’이고, 다른 하나는 세탁실 벽면에 붙박이로 만든 대형 신발장이다. 여기에 다섯 명의 운동화, 부츠, 장화, 등산화, 구두들이 수납되어 있다.
설계 단계부터 각자 지닌 신발의 개수와 종류, 높이를 서로 공유해 반영했고, 입주하면서 다들 잘 신지 않는 신발은 과감히 정리했다. 덕분에 지금 충분히 여유로운 상태다. 신발장 수납 원칙 역시 소유자 기준이 아니라 수납장 칸 높이다. 부츠처럼 높이가 있는 신발, 구두나 운동화처럼 높이가 낮은 신발, 보관용 박스 등에 맞춰 칸 높이를 조절해서 수납한다.
신발이 많은 편인 나는 ‘먼저 줄이고, 나중에 산다’는 원칙이 점차 몸에 배고 있다. ‘공간의 물리적 한계’가 내 욕망을 다스려주는 셈이다. 나는 미니멀리스트는 아니다. 아마 이번 생엔 어렵지 않나 싶다. 그래도 대책 없는 맥시멀리스트에서는 슬슬 멀어지는 중이다. 그 정도면 꽤 괜찮은 진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