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 앞 다섯 인형의 비밀

'요망진'* 동거생활 - 지속가능한 관계의 기술

by 조선희
*요망지다 - '야무지고 당차다'라는 의미의 제주어. 제주섬 밖(육지) 사람들은 '요망지다'를 '요망하다'로 알아듣고 무척 당황해하곤 한다. 하지만 제주섬에서 '요망지다'는 말은 찬사나 다름없다.


미로헌 현관실 창가, 우드트레이 위에 인형 다섯 개가 나란히 앉아 있다. 우리가 각자 하나씩 내놓은 분신들이다. 비누와 마루의 패브릭 동물 인형, 수와 써니의 사람 모양 피규어, 루나의 이빨 모양 귀여운 도자 인형들이다. 눈썰미 좋은 손님이라면 모를까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고, 봤다 해도 ‘장식 소품인가 보다.’ 하고 넘기기 쉽다.


하지만 이 인형들은 우리 공동체에서는 꽤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일종의 직관적인 장치다. 인형이 창밖, 그러니까 중정을 향하고 있으면 ‘외출 중’, 실내를 향하고 있으면 ‘재택 중’이라는 뜻이다. 굳이 소리쳐 부르거나 전화를 걸지 않아도 누가 집에 있는지, 누가 나갔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가끔 깜빡 잊고 안 돌리고 나갈 때도 있지만, 요즘엔 다들 거의 습관이 되었다.


이 인형 이야기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박하다!”며 감탄한다. 그리고는 곧바로 묻는다. “그럼... 사생활은 없는 거예요?” 엥? 사생활이 거기서 왜 나와? 오히려 우리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서로의 일정을 공유한다. 출장, 모임, 외출, 외박, 손님 방문 일정까지 ‘타임트리’라는 어플을 통해 함께 본다. 이건 사생활 침해가 아니라, 오히려 사생활 보호의 수단에 가깝다.


예를 들어 우리 중 누가 손님이 오기로 예정돼 있다면, 방문이든 스테이든 그 일정을 미리 올려둔다. 일차적으로는 갑자기 모르는 사람과 마주치는 황당한 상황을 막기 위해서다. 또 누군가는 손님맞이를 거들 수도 있고, 다른 손님의 일정과 겹치지 않게 내 일정을 조율할 수도 있다. 초대하는 사람도, 초대받는 사람도 불편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제주 밖으로 출장이나 여행을 가는 경우, 공항 출도착 시각을 올려 두면 시간이 되는 사람이 차로 마중이나 배웅을 나갈 수 있다. 일부러 일정을 바꿔가며 챙기기는 어렵지만, 시각을 미리 알면 서로 배려할 여지가 생긴다.


사실 이 인형 돌리기나 일정 공유는 보안 문제와도 직결된다. 우리는 대문과 현관문을 공동으로 쓴다. 외부로 통하는 모든 문에는 보안장치가 달려 있다. 경비 콘솔은 대문에 하나, 실내 주계단실 옆에 하나, 총 두 개. 마지막 외출자가 집 안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대문에서 경비를 걸거나 가장 늦게 귀가한 사람이 실내에서 경비를 거는 방식이다.


초기에는 실내에 누가 있는데도 확인하지 않은 채 대문에서 경비를 걸고 외출하는 경우가 있어 경보음이 울리고, 경비업체 전화가 오고, 직접 출동하고... 해프닝이 몇 번 있었다. 혼선이 반복되자 마루가 제안했다.

“인형으로 각자가 집에 ‘있다 없다’ 표시하자.”

여기서 더 나아가 일정 공유를 제안한 건 비누였다.

“인형 돌리기를 깜빡하더라도 타임트리에서 각자 스케줄을 간단히 확인할 수 있도록 하자.”


내 공간이 경비 콘솔과 가장 가까워서 내가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데, 이때도 일정 공유 어플은 아주 유용하다. 오늘 누가 늦게 들어올지, 누가 아예 안 들어오는지, 며칠간 출타 중인지 체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늦게까지 기다리지 않고, 해가 지면 일단 경비를 건다. 내가 경비를 걸었다는 건, 그 이후 귀가하는 사람은 반드시 경비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모두가 보안카드를 갖고 있어서 개별 설정과 해제가 가능하다.


단독주택에서 여럿이 사는 이상, 출입과 보안에 대한 사전 합의는 단순한 편의를 넘어 공동의 안전망이 된다. 안전망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인형 돌리기의 또 다른 효과를 들자면, 이건 물리적 보안 수단을 뛰어넘는, 정서적 안전망이 된다는 사실이다.


출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인형 얼굴이 여전히 ‘재택 중’이라면, 바로 전화를 건다.

“인형을 안 돌리고 나간 거야? 아니면 아직 출근을 안 한 거야?”

혹시 혼자 끙끙 앓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파서 꼼짝 못 하고 누워 있다면, 비상약을 챙겨주고, 병원에 데려가고, 끼니를 챙겨준다. ‘인형 돌리는 걸 깜빡했겠지.’ 하고 심상하게 넘겨버리지 않고 ‘무슨 일은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하기. 나는 지금, 이 든든하고 따뜻한 안전망 안에서 ‘아만자(암환자)’ 졸업을 향해 4년째 조심조심, 건강 관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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