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망진'* 동거생활 - 지속가능한 관계의 기술
*요망지다 - '야무지고 당차다'라는 의미의 제주어. 제주섬 밖(육지) 사람들은 '요망지다'를 '요망하다'로 알아듣고 무탁 당황해하곤 한다. 하지만 제주섬에서 '요망지다'는 말은 찬사나 다름없다.
*몸빵 - 어떤 일에 대하여 몸으로 때우는 일. 또는 그런 사람
우리는 협동 노동파
“주택 좋은 거 누가 몰라? 관리가 무서워서 아파트에 사는 거거든!”
개성도 취향도 다 무시된, 천편일률적인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나 빌라 같은 집합주택이 여전히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는 ‘관리를 안 해도 된다.’는 점일 게다. 현관문만 닫으면 그만, 복도 청소할 일도 없고 화단의 잡초를 뽑을 필요도 없다. 내가 사는 공간 외에 내 노동력을 써야 할 곳이 없다. 대신 여러 항목의 관리비를 낸다. 돈으로 시간과 수고를 대신 지불하는 셈이다.
하지만 단독주택은 다르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 일이다. 전등이 나가거나, 샤워기에서 물이 새거나, 외벽이 오염되면 그 모든 게 내 일이다. 시간, 돈, 노동력, 다 들여야 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우리는 다섯 명이 머리를 맞대고 손을 보탠다는 점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미로헌 관리의 기본은 필요할 때마다 함께 힘을 모으는 ‘협동 작업’이다. 대체로 월례회의 전후에 이루어진다. 실내와 실외 작업이 다르니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일정이 조정되기도 하지만, 가능한 한 전원이 참여할 수 있도록 일정을 미리 공유하는 것이 원칙이다.
월례회의 전후에는 대체로 규칙적이고 일상적인 일을 처리한다. 비누가 전정을 하면 수가 뒷정리를 하고, 루나와 나는 풀을 뽑는다. 마루는 차고 슬라이드 도어와 회전계단, 현관문 경첩 등에 방청제를 뿌린다. 차고 바닥 청소, 유리창 물청소도 다섯 명이 함께하면 금세 끝난다.
오일 스테인을 바르는 날은 좀 다르다. 거의 종일 걸리는 일이라 따로 일정을 잡아야 한다. 그런 만큼 몸은 좀 힘들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즐겁다. 마치 『톰 소여의 모험』의 ‘그 가이들’이 된 기분이랄까. 대문 위 목재 부분은 마루와 수가 담당한다. 날렵한 수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키 크고 팔다리 긴 마루가 2층 베란다에서 손을 뻗어 함께 칠한다. 비누와 루나와 나는 툇마루와 비누네 다락 목재 외벽과 전망대 벤치를 칠한다. 오일 스테인 칠이 잘 마무리되어 햇볕 아래 반짝거리는 걸 보면 뿌듯하다. 지금은 괜찮지만, 언젠가 우리가 더 나이 들면 이런 일도 하지 못할 날이 올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괜찮다. 우리의 노동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포인트만 알면 관리, 무섭지 않다
단독주택에서 특히 신경 써야 할 계절은 겨울이다. 미로헌에서의 첫겨울, 이틀간 눈이 퍼붓던 어느 날, 오밤중이 되어서야 갑자기 수도계량기가 떠올랐다. 급히 식구들에게 알리고, 담요와 충전재를 들고나가 계량기를 감싸고, 수도꼭지를 틀어놓았다. 폭설이 내려도 영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드물긴 하지만, 수도꼭지만큼은 방심해선 안 된다. 추운 겨울날, 수도꼭지가 얼어 물이 안 나오는 상황, 상상만으로도 괴롭다.
경비 감지기 구역도 수시로 관리해야 한다. 웃자란 나뭇가지가 센서를 가리게 되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시도 때도 없이 경보기가 울리고, 경비업체 직원이 출동하는 난감한 일이 생긴다. 에어컨 실외기로 풀이 뻗어 자라거나 벌레가 들어가 오작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작년 여름, 벌레 때문에 에어컨이 멈춘 적도 있었다.
우리 집 주변 관리는 우리가 하지만, 공원은 시청에서 관리한다. 공원이 온통 풀로 뒤덮이고 키가 나만큼 자랄 때까지 방치되는 일이 없도록 민원을 넣는 일도 우리의 몫이다. 시청 관리 매뉴얼이 있긴 하겠지만 날씨에 따라 급격히 밀림처럼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때는 비누나 수가 시청에 연락을 한다. 이른 아침 ‘다다다’ 기계음에 눈을 떴을 때 싱그러운 생풀 냄새가 진동하는 날은, 시청 제초팀이 작업하는 날이다.
고장, 예고 없는 불청객
문제는 예고 없이 터진다. 어느 겨울날 아침, 보일러 컨트롤러가 깜빡이고 난방과 온수가 모두 끊겼다. 콘센트를 뺐다 꽂아도 무소식이었다. 급히 AS를 요청했다. 출근이 급한 사람은 찬물로 씻고 나가는 수밖에. 며칠 뒤 또 보일러가 멈췄다. 상담 직원은 “가스가 떨어졌을 수도 있다”라고 했다. 우리는 가스 공급회사와 정기 계약 중이었으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확인 결과 맞았다. 계측기 고장으로 가스공급회사도 가스가 바닥난 걸 몰랐던, 어이없는 해프닝이었다.
햇볕과의 전쟁 그리고 DIY 승리!
지금까지 가장 골칫거리는 통창으로 쏟아지는 햇볕이다. 미로헌은 동향이라 초여름부터 아침 햇볕에 창유리와 창호 프레임, 도어록이 모두 달궈진다. 복사열에 도어록이 오작동하고, 심한 날엔 창문이 아예 닫히지 않는다. 창호 프레임이 열에 팽창하면서 나는 ‘탁탁’, ‘끽끽’ 하는 소리에 번번이 놀란다. 유명 브랜드 창호여도 태양열 앞엔 무용지물이었다. 제주도의 햇볕은 어쩔 도리가 없다며, AS 온 창호 본사 기술팀도 고개를 젓는다.
이어지는 회의. 어닝 설치가 가장 간단해 보였지만, 목구조 주택 미로헌 처마엔 앵커를 박을 지지대가 없다. 인터넷으로 대형 파라솔을 두 개쯤 사서 마당에 펼쳐 놓을까 고민했지만, 바람 불면 누가 접을지, 겨울엔 어 디에 보관할지가 문제였다. 결국 우리가 선택한 건 가장 원시적인 방법, 차광막 설치였다. 다행히 일머리 좋은 비누가 정확하게 사이즈를 재서 착한 가격에 미리 사둔 것이 있었다.
어느 날, 비누 부부와 내가 함께 사다리를 이리저리 옮기고, 2층 베란다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차광막을 달았다. 이후 삐그덕, 탁탁 소음도 줄고, 도어록도 제 기능을 되찾았다. 처음엔 연한 브라운 색 차광막이 전면에 걸린 모습이 볼썽사나울까 걱정했지만, 익숙해지니 운치 있어 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우리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성취감이 컸다. 게다가 업체 공사가 아니라 DIY로 가성비까지 챙겼으니, 만족도는 두말할 필요 없다.
우리가 바로 그 어른이야!
아파트에 살았다면 상상도 못 했을 문제들이다. 관리실에 전화 한 통이면 끝날 일들. 하지만 미로헌에선 전부 우리가 직접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단독주택을 좋아하면서도 선뜻 짓지 못하는 거겠지. 백번 이해된다. 그래도 우리는 좋은 재료로, 원칙을 지켜 집을 지은 덕에 지금까지는 이 정도 관리로도 버틸 수 있다. 특히 터 파기부터 사진을 꼼꼼히 남겨둔 덕분에 내부 구조를 참고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점도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신기하다. 우리는 문제를 하나하나 도장 깨듯 해결할 때마다 묘한 성취감과 쾌감을 느낀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더니, 정말 그렇다. 가끔은 이제야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예전엔 무슨 일이 생기면 어른부터 찾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바로 ‘그 어른’이 되어 문제를 마주하고,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진짜 어른이 되었다. 이 기분, 참 괜찮다.
비누의 한마디::: 지난여름이었지? 월례회의 끝나고 바깥 청소하던 날,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잖아.
오다 말겠지 하며 풀을 뽑고 웃자란 나무들 정리하는데, 비가 그치기는커녕 눈을 뜰 수 없게 내렸지.
그런데 아무도 그만 하자는 말이 없네? 몇십 년만인가, 이렇게 온몸으로 비를 맞는 게, 시원하고 신난다, 나만 그런가?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다들 그런 마음인 게 보여 마주 보며 웃었잖아. 그날의 찐한 동질감과 쾌감, 지금도 생생해. 우리는 이렇게 시간과 공간, 마음을 나누는 ‘가족’이 되어 가고 있구나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