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
*미로헌(美老軒): 사람도 집도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집이라는 뜻의 우리 집 이름입니다.
*미로허니: 미로헌 사람이라는, 우리가 스스로를 부르는 애칭이랍니다.
본격적으로 한 지붕 셰어라이프를 들려드리기 전에, 서로에게 '선택'되어
무연고 우연가족을 이룬 생판 남남 다섯 명, 미로허니*들을 소개합니다.
써니, 미로헌*의 맏언니이며, 이 브런치의 화자입니다. 신문기자로 출발해 감귤 농사꾼, 방송 진행자를 거쳐 지역 문화재단에서 정년퇴직했습니다. 정년을 앞두고 여러 가지 고민이 많을 즈음 절친한 비누와 마루가 건넨, “같이 살자”는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습니다. 십수 년 간 혼자 살아왔던 터라 생판 남들과의 동거를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아님, 워낙 태생이 모험과 도전을 좋아하는 것일 수도... 나이 사십도 되기 전 생면부지의 제주에 찾아든 것처럼 말입니다.
현재 스코어, 동거 만족도는 매우 높음. 나이 들수록 더 높아질 예정입니다. 소위 ‘나잇발’로 밀어붙이는 나약한 노인 말고 늘 적당히 긴장하면서 관계를 깊이 탐색하면서, 그 관계에 윤(潤)을 더할 줄 아는, 쓸모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기에 미로헌만큼 훌륭한 현장은 없을 테니까요.
수, 상품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고, 미로헌의 ‘미적 감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미대 언니답게 ‘예쁘면 다 용서한다’가 그녀의 좌우명이지요. 물을 너무 좋아해 밥은 안 먹어도 새벽 수영은 빠지지 않아요. 밥 먹듯 밤을 새우고, 옥수수 하나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에너지가 넘치는 비결은 수영으로 다져진 체력이 분명해요. 때로는 통통 튀고, 때로는 황당한 뇌피셜을 시전하는, 미로헌의 웃음 담당이기도 하답니다.
이러한 수의 개성은 사실 첫 만남에서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지요. 같이 집을 짓기로 하고 처음 만나 대화를 하는데 서슴없이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다가도 남의 이야기에는 길게 집중하지 않는(어쩌면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내 과는 아니구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요즘 보니, 어쩌면 우리는 ‘같은 과’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 시작했어요. 기계치인 나보다는 훨씬 ‘과학 문명’에 능숙할 거라는 믿음이 무너지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써니가 붙인 별명이 또 하나 있답니다. '반전 수'.
루나, 미로헌의 막내이자 ‘이 구역의 젊은 언니’랍니다. 6년째 발레를 배우고 있으나, 아직도 ‘다리 찢기’를 못해서 슬픈 막내랍니다. 근데 써니 생각엔 그녀의 유머감각이 우리에게 잘 통하지 않은 것도 많이 슬플 것 같아요. 얼마 전 일인데요. 루나가 발가락 골절로 깁스를 한 채 지내야 했는데, 방이 2층인지라 계단 오르내리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지요. 목발은 더 불편하고, 발을 쓰면 안 되니 하는 수없이 한동안 주저앉은 채로 계단을 오르내렸어요
그러던 어느 날, 단체대화방에서 어쩌다 2층 청소 이야기가 나왔는데, 루나가 “계단은 아침저녁으로 제가 닦고 있긴 한데... 가장자리는 못 훔친 듯.”이라고 톡을 올린 거예요. 근데 5분이 지나도록 아무도 리액션을 하지 않자 결국 본인이 자신의 글에 댓글을 달았더라고요. 웃자고 한 소리였다고요. 우리는 한참 뒤에야 빵 터졌고요. 이러니 슬프지 않겠느냐고요. 비록 발레나 언니 오빠 웃기기는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번아웃 직전 제주로 이직해 온, 보기 드문 이력과 행운의 소유자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마루, 청일점 미로허니입니다. ‘세계 5% 안에 드는 외모의 소유자’라고 꼭 써달라고 해서, 그대로 전달은 해드립니다. 비누의 남편이며, 고기 굽기 1등, 설거지 1등, 커피 내리기 1등, 살림살이 쇼핑 1등. 말 그대로 미로헌의 인재입니다. 20년 넘게 운영해 온 IT회사 CEO, 고급인력인 그를 미로허니들이 너무 ‘부려먹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이참에 고백합니다.
이를테면 미로허니들이 동반 외출할 때면 운전기사, 커피 마시기 딱 좋은 날엔 바리스타, 미로헌의 세입과 세출을 도맡은 미로헌의 '기획재정부 장관' 등등 마루는 미로허니들에게 ‘홍반장’인 셈이지요. 진짜 매력은 평소엔 사람들에게 별 관심 없어 보이지만, 누군가 어려움에 빠지면 가장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라는 사실. 미로헌의 묵직한 백엔드형 해결사입니다.
비누, 미로헌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우연인 듯 우연 아닌, 우연 같은 우리의 인연도 사실은 비누에서 시작되었죠. 특히 고교시절 교생이었던 써니와의 길고도 각별한 인연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러움과 감탄의 대상이랍니다. 제주에 내려오기 전까지 줄곧 출판사 편집자로 일했고요. 지금도 미로허니들 가운데 단연 책을 가장 많이 사보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비누는 우리 중 가장 과학적인 두뇌의 소유자(전적으로 써니 시점, 본인은 강력 부인), 기계와 도구를 좋아하는 ‘황금손’이랍니다. 비실비실하던 식물들을 살려내는 '그린 핑거'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주방에서부터 마당까지, 비누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공익적 시선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필요한 말은 참지 못하고, 해놓고 마음에 걸려 하는 외강내유형 인간, 미로헌을 굴러가게 하는 든든한 대들보가 바로 비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