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은 내어서 무엇하리?
우린 남인데

슬기로운 어른생활 -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by 조선희

요즘 들어 내 ‘짜증력’ 지수가 순간적으로 솟구칠 때가 있다. 예전엔 앞에 놓인 문제나 상황에 짜증이 났다면 요즘은 주로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기억력이 흐려지는 노화 현상이 가장 큰 원인이다.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이 몹쓸 뇌의 배신이라니.


누군가 말했다. “자기 자신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하면, 노화라는 신호등이 켜진 거다.” 정말 맞는 말이다. 자꾸만 잊어버리는 자신에게 적응하지 못하는 마음. 어쩌면 그게 짜증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짜증이 점점 바깥을 향하게 된다는 거다.


이를테면 이런 경우가 있다. 나는 분명히 누군가에게 뭔가를 부탁했다. 그런데 피드백이 없다.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도 감감무소식. ‘어, 내가 분명 말했는데?’ ‘설마 무시하는 건가?’ 혼자서 이미 대본 쓰고 연출까지 끝낸 막장 드라마 한 편이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그러다 애써 이성을 부여잡고 조심스레 묻는다.

“그때 내가 말한 거, 어떻게 됐어?”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충격이다.

“그런 말 들은 적 없는데?”

금시초문이라고? 아, 내가 말을 아예 안 했구나. 헛된 확신으로 분노했다니, 순간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흔들리는 내 기억력이 불러일으킨 오해였구나.


사실 나만 늙는 건 아니다. 어느 날은 막내 루나조차도 함께 갔던 식당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며 단체대화방에 묻는다.

“우리 얼마 전 간 곳, 상호가 뭐죠? 입구에 배롱나무 심어졌던 집, 파스타 면이 좋았던 집이요...”

누구랄 것도 없이 시시때때로 사람 이름이 가물가물, 지명도 떠오르지 않고, 대화 도중 문득 멈칫하는 일이 잦아진다. 그럴 땐 다 같이 웃는다.

“우리, 이제 먹을 만큼 먹었나 봐.”

“그래도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인데, 어쩌지?”

서로의 노화를 확인하면서 웃음이 터지고, 때로는 동병상련의 연대감마저 느껴진다.


생각해 보면, 이런 짜증은 단발성 감정이 아니다. 평생 지속될 장기 프로젝트다. 살아 있는 한, 점점 더 자주, 점점 더 많이 짜증 날 것이다. 그러니 받아들여야 한다. 이건 결국 ‘적응’과 ‘요령’의 싸움이다. 나만의 생존 스킬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요즘은 외국 소설을 읽을 때 인물 이름을 아예 외우려 들지 않는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한 번만 읽어도 이름과 성격이 딱 매칭되어 떠오르던 시절은 지났다. 이제는 헷갈리면 그냥 패스한다. 중요한 건 ‘맥락’과 ‘흐름’ 이지, 이름 따위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기억에 자신 없어도 책을 덮지 않는 것. 그게 중요하다.


나 혼자만의 규칙도 있다. 절대 ‘우기지 않기’. 상대방 말을 먼저 인정한다. 나중에 내가 맞다는 게 밝혀질 수도 있지만, 당장은 우기지 않는다. 괜히 흐리멍덩한 내 기억력만 믿고 우겼다간 ‘꼰대’ 소리 듣기 십상이다. 그건 정말 싫다.


주방을 같이 쓰다 보면 어긋나는 일도 많다. 설거지를 했지만 뒷정리가 미흡했을 수도 있고, 내가 사용한 뒤에 무언가 고장 났을 수도 있다. 누가 말한다.

“여기 스크래치 났는데?”

그러면 나는 바로 자진 신고한다.

“내가 어제 썼어. 나도 모르게 실수했을 수도 있어.”

정말 내가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 태도다. ‘난 아니야.’ 하고 딱 잡아떼면, 분위기는 곧바로 싸늘해진다.


가장 난감한 경우는 이런 경우다. 누가 했는지 거의 확실한데 물증이 없을 때. 게다가 당사자가 끝까지 아니라고 하면, 모두 짜증이 치솟는 건 순식간이다. 가족끼리는 다소 거친 감정 표현이나 문제 회피가 용인된다. 하지만 우리는 남남이다. 짜증이 파도처럼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오해나 마음의 상처가 남기 쉽다.


나이 들수록 감정의 민감도는 높아진다. 체력은 떨어지고, 습관은 고착되고, 변화에는 점점 둔감해진다. 모든 조건이 짜증을 유발할 만한 완벽한 조건이다. 그럴수록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인격이고, 품격이다. 짜증은 감정이 아니라 태도다. 나이 든다는 건, 짜증을 참는 법이 아니라 품위 있게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다.

그래서 미로헌에는 늘 ‘짜증 주의보’가 발효 중이다. 우리는 남이니까.
남인데, 짜증을 내어서 무엇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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