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어른생활 -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오랜만에 제주에 온 고향 후배가 물었다.
“남들과 살아보니 가장 큰 장점은 뭐예요?”
“뇌를 더 많이 써야 하는 거.”
“진짜요? 난 외롭지 않은 거라 할 줄 알았는데.”
1초도 걸리지 않은 내 대답에 후배는 놀라는 눈치다. 뭘 하든 집중하고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게 진짜 귀찮고 힘든 일이라고 들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나이 들수록 좀 불편한 것도 있고, 애써야 하는 것도 있어야지, 너무 편하기만 하면 '꼰대' 밖에 될 것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외부 활동이 차츰 줄어드는 나이에 이르면 긴장감도 자연히 낮아진다. 편한 것만 찾게 되고, 마음에 드는 것만 좋아하게 된다. 혼자 살다 보면 누구 눈치 볼 일도 없으니, 그런 성향은 더 도드라질 수 있다. 내 경험상, 몸이 너무 편해지면 살이 찌고, 마음이 너무 편해지면 ‘꼰대’가 되기 쉽다.
‘꼰대’는 나이가 들어서 되는 게 아니다. 삶에 임하는 태도,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자세에서 판가름 나는 것이다. 오죽하면 ‘젊꼰(젊은 꼰대)’이라는 말까지 생겼을까. 사실 가장 나이 많은 언니이자 누나로서, 미로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매 순간 건강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아무리 친밀해도, 아무리 한 지붕 아래 살아도 ‘꼰대’ 언니나 '꼰대' 누나는 견디기 힘들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늘 생각한다. 내가 지금 누군가를 가르치려 드는 건 아닐까? 상대가 일리 있는 주장을 하는데도 내 고집만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자기 검열은 필수다. 혼자 살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질문이고, 자녀와만 살아도 부모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 ‘내가 옳아’를 당당히 시전하며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엔 자기 객관화도, 건강한 긴장도 없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대로 현실이 움직여주길 바라는 욕구만 있을 뿐이다. ‘나이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라는 말이 있다. 백 번 맞는 말이다. ‘자식 자랑은 만 원, 손자 자랑은 오만 원’이라는 말도 그렇다. 자기 경험을 권위로 착각해 쉴 새 없이 남을 가르치려 들고, 자기 자랑으로 입에 침이 마르는 ‘노인’이 되지 말라는 경고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몇 가지 기본 원칙을 세웠다. 가장 중요한 건 ‘지시 말고 질문, 지적 말고 의논’이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거지?”라고 물어 방법을 배우는 것이, “이거 좀 해줘.”라고 지시하듯 말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지난번에 네가 잘못해서 색깔이 변한 거야.”라고 지적하는 대신, “이렇게 변한 건 어떻게 해야 하지? 벗겨내 볼까?”라고 의논하는 쪽을 택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건 만고의 진리다.
얼마 전 지인이, 부모님이 제주에 오셔서 며칠 관광을 시켜드렸다고 한다. 나름 맛집도 수소문해서 정성껏 모셨는데, 마지막 날 부모님 말씀이 “김밥이 제일 맛있었다.”였단다. 비싼 메뉴들이 여럿 있었지만, 어쩌다 한 끼 드신 김밥이 최고였다고 하니 허탈했던 모양이다.
한때 유행했던 ‘효도여행 금지 십계명’이 떠올랐다.
- 아직 멀었냐?
- 이 돈이면 집에서 해 먹는 게 낫겠다.
- 이거 한국 돈으로 얼마냐?
- 물맛이 제일 좋네.
부모가 자식과 여행 가서 하면 안 되는 말들이라는, 농담 섞인 경고였다.
그래서 만든 나만의 은밀한 ‘꼰대 방지 룰’은 이렇다.
1. 혈연. 학연. 지연 말고, 사연 - 성씨, 고향, 출신 학교 따위 묻거나 따지지 말자. 가장 중요한 건 그가 걸어온 시간이고, 거기에 담긴 사연이다.
2. ~척 말고, 인정 - 다 아는 척, 강한 척, 괜찮은 척하지 말자. 모르면 모른다, 힘들면 힘들다 말하는 솔직함이 오히려 용기다.
3. ‘뇌피셜’ 말고, 팩트 체크 - ‘그럴걸?’ ‘아닐걸?’은 자기 생각일 뿐이다. 다툼은 주로 ‘뇌피셜’에서 시작된다. 확인하고 말하는 습관은 공동체 생활에서 특히 중요하다.
4. 고집 말고, 포용 - 나도 맞고 너도 맞는 상황이 있다. 어쩌면 맞고 틀림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함께 살기 위해선 포용이 먼저다.
5. 집착 말고, 쿨&시크 - 같이 산다고 해서 굳이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내 방식, 너의 방식이 섞이는 공간에선 지나친 간섭이 피로를 부른다.
6. ‘항상’, ‘다’ 그런 경우는 없다. - “항상 네가 그래.” “다 그런 줄 알았어.”라는 말엔 이미 편견이 들어 있다. 섣부른 일반화의 오류가 습관이 되면 관계는 꼬이기 쉽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하지만 누구나 ‘꼰대’가 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다짐한다.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고, 따지기 전에 한 번 더 물어보기. 그것이 생판 남들과 오래오래 함께 사는 기술이다. 아마 다른 식구들은, 이 언니가 잘 늙어보겠다고 이렇게 부단히 애쓰는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뇌를 자주 그리고 많이 쓰고, 관계를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다듬어가며,
나이 들어가는 지금의 내가, 나는, 참말이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