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녹색 신고!’

슬기로운 어른생활 -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by 조선희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감정이 곧바로 태도가 되어버리는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할 때였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침부터 사무실 분위기를 냉동 창고로 만들어버리는 상사, 하루에도 수십 번 감정 노동을 시키는, 감정 기복 심한 동료. 아무리 고난도의 업무라도 차라리 혼자 처리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죽하면 내가 이런 이들을 ‘감태병(감정이 태도가 되는 병)’ 환자라고 불렀을까. 다행히 미로허니들 가운데는 그런 ‘감태병’ 환자가 없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도 있지만,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하지만 함께 사는 시간이 쌓이면서 예민해진 ‘촉’과 ‘눈치’는 속일 수 없다. 어차피 다 알게 되어 있다. 그럴 때 우린 ‘녹색 신고’를 한다. “오늘 나는 살짝 불안정하니 양해 바람”이라는 일종의 감정 예고제다.


함께 산다고 해서 우리가 매일 만나 복작이며 사는 건 아니기에, 월례회의는 밀린 수다를 풀고 안건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는 ‘날것의 시간’이다. 회의가 다가오면 ‘또 회의야?’ 하는 부담감도 살짝 있지만, 동시에 설렘과 몇 가지 토크거리를 안고 살롱에 모여든다. 그런데 어느 월례회의 날, 몸살 기운이 있어 기분이 영 아니었다. 나는 회의 시작 전에 미리 녹색 신고를 했다. “오늘 컨디션이 다운돼서 혹시 화난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해해 줘.”


기분 나쁜 날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아프거나, 피곤하거나, 뜻밖의 일이 터지면 누구든 예민해질 수 있다. 문제는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다. 감정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태도는 사회적인 것이다. 화난 감정을 웃음으로 덮는 것, “조금 있다 이야기하자”라며 일단 여유를 확보하는 것, 이 모두는 감정을 관리하는 이성의 선택이다.


우리처럼 공간을 공유하며 사는 경우, 관리되지 않은 감정은 바람처럼, 물처럼, 혹은 냄새처럼 번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표정, 말투, 몸짓에 스며들어 있다. 감정은 감정으로 끝나야 한다. 감정이 태도가 되면, 그건 금세 ‘신호’가 되고, 반복되면 관계의 패턴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살다 보면 감정 관리에 더 능숙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기분에 솔직해지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익숙한 방식에 대한 고집이 강해지고, 타인의 감정은 뒷전이 된다. 돌려 말하지 않는다. 숨기지도 않는다. ‘돌직구’가 나이 든 사람의 특권이라도 되는 양, 상대 기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예전에는 흘려듣던 말에도 버릇처럼 ‘버럭’한다.


실제로 내 또래 한 지인은 나이 들어서 좋은 점 중 하나로 “남 눈치 안 보고 자기감정에 충실하게 살 수 있게 된 것”을 꼽았다. 은퇴 전에는 눈치 보느라 늘 감정을 억제했지만, 이제는 내키는 대로 살기로 했단다. “이 나이면 그 정도는 이해받을 수 있지 않냐”면서. 그 얘기를 듣고 ‘그렇게 하면 영락없이 당신은 꼰대야!'라고, 왈칵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꾹 참았다. 순간의 실망감이 태도로 드러나는 게 싫어서.


미로허니들은 서로 다른 언어, 리듬, 감정의 높낮이를 가진, 남이다. 감정은 각자의 것이지만, 태도는 모두의 몫이다. 한 사람의 사사로운 ‘감태병’이 누군가에겐 트라우마가 되고, “더는 함께 못 살겠다”는 나비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감정을 숨기자는 게 아니라, 그것이 태도로 번역되지 않도록 훈련해야 한다. 그렇기에 미로헌에서 ‘감정 예절’은 필수다. 함께 살기로 ‘선택된 가족’ 간의 적당한 거리감이 이럴 때 빛난다. 괜한 오해로 번지지 않게, “지금은 건드리지 말자”는 조용한 배려가 먼저다.


남이기에 가능한 침묵의 존중, 그것이 미로헌의 감정 예절이다. 감정 예절을 지키려면, 스스로 감정을 다스리는 기술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음악을 듣고, 누군가는 잔다. 누군가는 청소를 하며 마음을 다독인다. 나는 손빨래를 한다. 박박 문질러 헹구고, 햇볕에 널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젊은 시절은 육체의 에너지로 버티지만, 노년은 감정의 지혜로 살아내야 한다는 걸 그때 깨닫는다.



한때 유행했던 말처럼, “개그는 개그일 뿐”이다. 감정도 감정일 뿐이다.
감정에서 딱 멈추고, 정리하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줄 아는 것.
그래야 우리는 쓸 만한 어른으로 발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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