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생 선생님에서 언니로,
언니에서 식구로.

무연고 우연가족의 탄생 - 관계의 재발견

by 조선희

대학 4학년,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슬그머니 교생 실습을 나갔다.

1980년대, 그 시절에는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삶 전체를 압도하던 때였다. 노동운동을 하기엔 용기가 부족했고, 그렇다고 교사가 되겠다는 분명한 목표도 없었다. 교직에 대한 관심이나 소명감은 애초부터 없었다. 다만 어찌어찌 교직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고, 실습을 하지 않으면 졸업이 어려운 상황이어서 마지못해 나간 교생 실습이었다.




출근 첫날, 여중·고 시절 스쳐간 숱한 교생 선생님들을 떠올리며 교문을 들어섰다. 나는 1학년 4반에 배정되었고,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백여 개의 눈동자가 탐색의 시선을 조명처럼 쏟아냈다. 담임교사의 소개에 이어 내가 인사를 하려는 찰나, 반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렷, 경례!”를 외쳤다. 짧은 커트 머리에 호리호리한 체형,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예쁜 아이였다. 비누였다. 비누가 내 인생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비누 덕분에 들키면 안 되는 일을 몰래 하고 있는 것처럼 위축되어 있던 내 교생 생활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비누와는 이상할 만큼 호흡이 찰떡같이 잘 맞았다. 실습 중간에 봄 소풍이 있었다. 비누를 중심으로 반 아이들은 일사불란하게 장기자랑을 준비하고, 당시엔 드물게 단체 셔츠도 맞춰 입었다. 몇 명만 나와 장기자랑을 하던 여느 반과 달리, 우리 반은 전원이 무대에 올랐다. 비누의 기획력과 추진력이 빛난 순간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해방춤을 가르쳐주었다. 해방가에 맞춰 폴짝폴짝 뛰면서, 아이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춤을 추던 그날은 참 즐거웠고,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실습 마지막 날, 아이들은 유리 케이스에 담긴 종이학천 마리를 선물했다. 비누의 제안으로 금은색종이를 함께 접어 만든 거라 했다. 어쩐지 며칠 전부터 교실에 들어 서면아이들이 바삐 뭔가를 감추며 어색해하더라니.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편지를 쓰고 책갈피를 만들어 작별 선물을 했다. 그날 받은 종이학은, 무려 사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곁을 지키고 있다.


나중에 비누는 말했다. “언니도 꽤 ‘특이한’ 교생이었어.” 그때의 경험이 교직에 대한 내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제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기간제교사를 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만큼 충만하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 뒤로 비누는 나의 대학 졸업식, 결혼식 등 인생의 굵직한 장면마다 함께해 주었다. 신혼집에 놀러 오고, Y를 ‘사부님’이라 부르며 그의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에도 나섰다. Y의 지인 몇은 아직도 그 시절의 비누를 기억한다. 그러다 내가 큰아이를 낳고 고향으로 가 신문기자를 하던 시절, 한번 다녀간 것을 끝으로 비누와의 연락은 끊기고 말았다.


시시때때로 그녀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하고 그리웠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건 십여 년 뒤, 제주에서였다. 그 계기가 된 건, 나의 첫 산문집이었다. 1999년 봄 제주로 이주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초보 감귤농사꾼으로 살면서 주경야작(晝耕夜作)한 책이었다.

“선생님, 저 비누예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비누는 귀농에 관심이 많아 관련 커뮤니티에 참여하고 있었고, 우연히 내 책을 발견하고는 출판사를 통해 연락처를 알아냈다고 했다. 첫 통화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표선면사무소 앞에서 영화처럼 극적으로 재회했다. 그녀의 남편 마루도 함께였다. 그날 이후, 나는 비누의 언니이자 마루의 누나가 되고, 비누와 마루는 나와 Y의 동생이 되었다. 이제 더는 ‘선생님’도, ‘사부님’도 없었다. 비누와의 재회는 나와 Y가 평생 품고 있던 ‘막내의 설움’을 단숨에 날려주었다.


그 뒤로 비누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제주에 와서 우리의 농사일을 도왔다. 감귤 수확철엔 시간을 쪼개서라도 내려왔다. 그녀는 농사일을 뚝딱뚝딱 잘 해냈고, 나는 정말로 비누가 강철 체력을 가졌다고 믿었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제주에서 며칠간 일하고 올라가서는 한참을 앓아누웠다는 사실을. 그 힘겨움을 내색조차 하지 않은 그녀의 위장술이야말로 애정의 다른 이름이었다.


뿐만 아니다. 불시에 몰아친 내 인생의 위기 때에도, 비누는 언제나 든든한 천군만마였다. Y의 입원 기간 동안 밍밍한 병원 보호자식을 견디게 해 준 것도, 비누가 가져다준 매실장아찌였다. 투명한 빛이 감도는 고추장에 버무려져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은은하던 그 장아찌 맛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힘든 수술 뒤 쉽게 깨어나지 못하는 Y의 병상 곁에 앉아 몇 시간이고 말을 걸고, 손을 흔들고, 잠을 쫓아준 것도 비누였다. 그녀는 20대부터 이른 사별까지, 내 인생의 증인이자 목격자였다.


첫 책을 낸 지 5년 뒤 출간한 두 번째 책에 실린 비누와의 재회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사람 사는 길은 오래 생각하던 대로 열리게 마련인 법, 어쩌면 몇 년 뒤에는 비누도 내 곁에 와서 농사를 짓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 곁이 아니면 어떤가. 이 땅 어디에라도 비누가 뿌린 씨앗에서는 비누처럼 반듯하고 알찬 곡식이 여물 것을 나는 믿는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견(先見)인가. 사십 년 전 앳된 여고생과 어리바리한 교생으로 만난 우리가 지금은 한 지붕 아래 식구가 되었으니 말이다. 비누 입장에서야 ‘같이 살아도 되겠다.’는 판단이 있었기에 그런 제안을 했을 테고, 나는 비누였기에 주저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동거 프로젝트가 현실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엇보다 마루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마루의 첫인상은, 살집 하나 없이 껑충한 키에 예민해 보이는 하얀 피부, 묻는 말에만 조용조용 대답하는 과묵한 사람이었는데, 며칠 함께 지내고 나니 거리감은 금세 사라졌다. 같이 산 이래로 비누가 “둘이 ‘찐’ 남매 같다”, “언니가 아니라 시누이를 보는 거 같다”며 농담할 정도다.


사실 마루는 처음엔 여럿이 어울려 살거나 공동체 주택을 짓는 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비누가 원하니 흔쾌히 동의했고, 그 뒤처리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 여겼단다. 막상 건축이 시작되자, 우리 공동체의 유일한 청일점 마루는 자연스레 ‘현장 감독’이 되었다. 매일같이 공사 현장에 나가 진행 상황을 꼼꼼히 살피고, 대표 건축주의 역할을 도맡았다. 거친 일과는 인연이 없어 보이던 마루가 현장을 쓸고 닦느라 땀범벅이 되고, 뽀얗던 피부는 붉게 그을릴 지경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각자 살던 집을 팔아 건축자금을 마련하기로 했지만, 단박에 매매가 이루어질 리 없었다. 모두가 시간이 필요했다. 그 공백을 메우며 자금을 책임져준 것도 마루였다. 결국 우리의 동거 프로젝트가 무사히 완성될 수 있었던 건, 마루라는 대체불가의 존재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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