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연고 우연가족의 탄생 - 관계의 재발견
계약한 대지는 2000년대 초반 제주시가 개발한 택지지구 안에 있었다. 구획된 택지는 약 100평, 1종 일반주거지역이었다. 건폐율 60%, 용적률 200%. 다시 말해, 1층 최대바닥 면적은 60평, 총 연면적 200평까지 집을 지을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이곳은 택지지구였기에 조건이 까다로웠다. 외벽 색깔, 지붕의 경사도와 재료, 조경 수종까지 다 규제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걱정할 건 그런 세부사항이 아니었다. 우리가 우선 결정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구성원을 확정하는 일이었다. 비누, 마루, 그리고 나. 두 가구, 세 명만 살 것인가? 아니면 구성원을 더 늘릴 것인가?
물론 장단점이 있었다. 우리끼리만 산다면 새삼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을 거라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그런데 택지 분양가의 여섯 배 수준인 이 비싼 땅에 세 사람만의 공간을 짓는 건 합리적이지도, 미래지향적이지도 않아 보였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면적이라야 많아야 60평 남짓. 그 정도만 짓고 끝내기에는 무언가 아쉽고도 아깝게 느껴졌다.
비누와 마루는 서울에서 공동체주택을 함께 추진했던 지인들에게 먼저 의사를 물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괜히 아무런 말없이 둘만 제주로 내려온 걸 알게 되면 서운해 할 수도 있다는 배려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 입장이었어도 비슷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비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니, 괜찮겠어? 아무래도 나나 마루의 지인들이라 언니한테는 훨씬 남처럼 느껴질 수도 있잖아. 혹시 그중 한 사람이라도 같이 살게 된다면 괜찮겠어?”
공동체주택을 함께 꿈꿨던 이들 중 자녀들 학업 문제로 제주 이주가 어려운 한 가구를 빼고 나머지 둘은 결혼하지 않은 1인 가구였다.
그중 한 명은 비누와 같은 직장에서 일하다가 비누에게 “스스로 입양되겠다”며 비누의 ‘수양딸’이 된 루나. 이미 예전에 비누가 소개해 주었고 아주 오래전, 업무 차 제주에 머물 때 만난 적도 있다. 사회적 기업 인큐베이팅 관련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수는 생면부지의 타인이었다. 마루와 직장 동료로 만나 끈끈한 동업자가 되고 비누와도 때때로 함께 일한다는 수는 상품 디자이너이면서 사회적 여성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과 함께 사는 게 딱히 어렵다고 느껴지진 않았지만 혹시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가 나중에 낭패를 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스치긴 했다. 그러나 직장과 거주지를 동시에 제주로 옮기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만큼, 그들의 합류 가능성이 크다고 보긴 어려웠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곧 비누에게 말했다.
“괜찮고말고. 네가 같이 살 수 있다고 판단된 사람들이면, 난 오케이야.”
수십 년 지내며 나와 신뢰를 쌓아온 비누와 마루였다. 그런 두 사람이 같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라면 내가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서로의 인간관계를 공유하며 살아온 사이였다. 그동안 비누의 친구들은 자연스레 내 지인 그룹으로 편입되었고, 비누는 내 절친들과의 여행에도 동행하며 어느새 ‘우리 모두의 동생’이 되어 있었다.
비누는 나의 제주 후배들과도 이미 친구를 먹은 지 오래다. 제주에 놀러 오면 다 같이 만나 수다 떨고, 때로는 짧은 관광도 함께했다. 우리 사이엔 ‘친구의 친구는 곧 내 친구’라는 묵시적 동의가 깔려 있었다. 그러니 수와 루나가 아직 내게 낯선 존재라는 건,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정말로,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수와 루나가 제주살이에 합류 의사를 밝혀온 것이다. 공동체 주택을 함께 추진했던 흐름을 제주에서도 이어가고 싶다는 뜻이었다. 제주라는 물리적 거리도 이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몇 차례의 의사 확인 절차 끝에 구성원이 확정되었다. 확인이 여러 번 필요했던 건, 두 사람이 미혼이었기 때문이다. 집을 짓고 살아가다 갑자기 결혼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 행복하자고 시작한 일이 괜한 갈등으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선 분명한 약속이 필요했다. 결론은 이랬다.
결혼은 자유지만, 향후 10년 간 구성원 탈퇴 불가
도중에 결혼해서 집을 떠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10년은 주거 공동체를 깨지 말자는 약속이었다. 그렇게 부부인 비누와 마루, 1인 가구인 수와 루나, 그리고 나, 써니까지. 네 가구, 다섯 명. 한 지붕 아래 살 가족이 탄생했다. 가장 맏이는 나, 써니. 그 아래 다섯 살 차이 마루, 여섯 살 차이 비누, 열 살 아래 수, 그리고 띠동갑 열두 살 아래 루나까지.
우리는 동갑도 아니고, 또래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심지어 같은 학교 출신도 아니다. 혈연, 지연, 학연, 그 어느 교집합도 없이 나이도, 지역도 초월하여
서로를 '선택'한, ‘무연고 우연 가족’이 탄생한 것이다.
대지 계약 후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서울에서 상견례를 가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목소리로만 알던 수를 처음 만났고, 몇 년 만에 루나를 다시 만났다. 내 큰아이도 동석해, 엄마의 ‘새로운 가족’과 첫인사를 나눴다. 개인 브랜드를 운영하는 디자이너 수보다는 회사원인 루나의 제주 이직이 다소 우려됐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왠지 모를 생기와 기대감이 피어났다.
이제 우리 앞에는 새로운 과제가 펼쳐졌다. 설계를 맡아 줄 건축사무소를 찾아 우리의 삶이 담길 공간을 상상하며 이야기하고, 시공사를 선정하고, 지난한 건축 과정에 뛰어드는 일. 무엇보다 각자가 감당해야 할 비용 분담 계획을 체계적으로 세우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그때만 해도 불과 1년여 뒤, 내게 닥칠 운명을 알지 못했기에 가슴이 뛰고 설레었다. 이미 다섯 명이 함께 그리는,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