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정처 없이 흐르는 생각의 물결대로 손을 놀려본다. 조지 오웰은 나를 풀어 헤친다. 어느새 정신을 던져버린다.
사놓고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하게 두었다. 오래 묵은 뒤에 내게로 오는 책이 이것 하나뿐이랴. 글쓰기와 관련한 책들을 사놓고 앞부분을 조금 읽다가(혹은 중간까지 읽기도 하다가) 끝까지 읽지 않은 책들이 여러 권 있다. 마무리하지 않은 것들이 쌓여가는 것 같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처럼 이 책도 그러했다.
조지오웰의 심오한 세계를 <책 대 담배>로 먼저 접했다면 이 책을 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나는 왜 쓰는가>를 먼저 샀다). 확실히 나는 <1984>, <동물농장> 외, 조지 오웰의 에세이와는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서른 개의 에세이 중 [스파이크], [과학이란 무엇인가?], [나 좋을대로], [물속의 달], [어느 서평자의 고백], [나는 왜 쓰는가].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죽는가]. [정말, 정말 좋았지] 등 몇몇은 좋았다. 글에 대해,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에세이는 재미있게 읽었다.
[능숙한 솜씨로 책을 한 권씩 훑은 다음 하나를 내려놓을 때마다 ‘이걸 책이라고!’ 소리를 덧붙일 것이다.] 그런데 또 막상 내가 책을 내기 위해 글을 쓰다 보면, 내 글에도 같은 말을 하게 된다. [어느 기고자가 나를 부정적이고 언제나 무언가를 공격하는 사람이라며 꾸짖었다.] 작가의 비판적인 시각이 불편하다. 그럼에도 이 사람의 삶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삶의 최전선에서 항상 고민하던 모습이 나로 하여금 불편해도 부정하지 못하게 하는 무엇이 되어 온다.
언제 쓰였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1930~1940년대이다. 언제부터인가 외국의 연도가 나오면 당시의 한국 모습을 연결하게 된다. 일제강점기다. 일본의 통치하에 조선 사람들이 죽어있을 때다. [악인에게서도 배울 점은 있다. 좋은 것을 배우되, 악습은 버릴 수 있는 용기를 키워내는 것. 그것이 살아있는 나로서 할 일이다.] 한계도 있다. 어디까지가 악인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릴리푸트나라 황제의 궁전에 불이 났을 때 걸리버가 오줌을 눠서 불을 끄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걸리버는 자신이 비상시에 침착히 대응함으로써 치하받을 공을 세운 게 아니라, 궁전 경내에서 대놓고 방뇨를 하는 중죄를 범한 것임을 알게 된다. “나는 황후가 내 행동을 더없이 혐오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는 건물들을 어떻게 고치든 자기는 절대 쓰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고서 거처를 궁정에서 가장 먼 쪽으로 옮겼으며, 측근들 앞에서 복수하겠다는 맹세를 차마 억누르지 못했다는 것을 은근하지만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를 죽이려는 자는 무슨 수를 써서든 나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이 장미들은 하나같이 깜짝 봉지 같은 재미를 선사했고, 언제나 뜻밖의 새로운 품종이 나타나 별난 이름을 붙여봄 직한 기회를 누리게 해 주었다.] 아이와 문방구에 간다. 랜덤이 여럿 있다. 랜덤은 기쁨보다 실망을 주지만, 한 번의 기쁨을 위해 계속 도전하게 만든다.
[이젠 그곳도 내 마음을 완전히 떠나버렸다. 그곳의 마법은 더 이상 나에게 미치지 않으며, 내겐 플립과 삼보가 죽었으면 하거나 학교가 불탔다는 이야기가 사실이었으면 하고 바랄 만큼의 원한도 남아 있지 않다.] 이 말을 한다는 것이 오히려 진한 미련의 냄새를 풍긴다. 나는 말하겠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 날은 오지 않을 거다. 미워하는 시간이 나를 좀 먹는 것임을 조원희의 <미움>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고, 나도 아는데, 읽을 때뿐이다. 결국 나에게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라는 것으로 끝난다.
[물속의 달]은 없는, 실현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뜻한다. 열다섯 평 주공아파트 청약에 당첨되기 이전에 살았던 단칸방. 엄마는 그 집의 담벼락에 뿌린 호박씨 이야기를 종종 한다. 살던 내내 열매는커녕 보이지도 않더니, 이사를 가고 나니 호박이 주렁주렁 열렸다는 이야기다. 덕분에 동네 사람들이 잘 먹고 있단다. 엄마는 정말 그것이 아까워서 그런 이야기를 한 걸까? 무엇이 재미있어 그 이야기를 그토록 오랜 시간 여러 번 한 걸까? 정말 내가 그 이야기를 까먹기라도 할까 봐 알려주려고 그런 것일까? 사람은 종종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 자신만 빠져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루어지는 마법 같은 세상에 허탈해하면서도 뭔가 자비를 베푼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를 좋아한다. 실상은 마법도 자비도 없다. [속이는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를 속일 뿐이다.]
그저 지금은 잠시 [숨 쉬러 나갈 뿐 coming up for air]. 하여 만난 자연의 생명과 인사하는 기쁨이면 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