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해나 작가의 작품에는 미결의 미학이 있다
‘뭐지, 다음 이야기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하는 생각이 든다. 극적인 장면에서 단편이 끝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미결이 오히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고 생각한다. 미결을 통해 작가는 독자에게 뒷이야기를 상상할 여지를 두는 동시에 독자 스스로 클라이맥스를 다시 곱씹는 과정을 통해 이에 함축된 단편의 주제의식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미결의 미학이 나타난 단편을 찾아보자면, 먼저 혼모노이다. 혼모노의 주인공은 ‘쓸모가 없어진’ 무속인이다. 몸주신인 할멈이 신애기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아무리 굿판을 벌이고 신에게 염원을 해도 더 이상 접신할 수가 없다. 자신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당한 주인공의 괴롭고 혼란스러운 감정, 앞길이 창창한 신애기를 향한 묘한 질투심, 자신을 배신한 할멈을 향한 복잡한 애증이 단편에서 숨가쁘게 휘몰아친다. 자신의 오랜 단골 고객인 국회의원마저 자신을 떠나 신애기에게 굿을 부탁하자, 주인공은 신애기가 여는 굿판에 불청객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이 굿판을 망칠지, 신애기를 충동적으로 죽일지 긴장이 팽팽한 상황에서 주인공은 뜻밖의 선택을 한다. 신애기 옆에서 자신도 굿을 하는 것이다. 주인공에게는 신이 접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에 칼이 닿으면 일반인처럼 상처가 난다. 온몸이 피범벅이 되어가는데도, 주변 사람들이 경악해도 주인공은 개의치 않고 신명나게 몸을 움직인다. 몸을 무리하다가 결국 과다출혈로 죽을 것인가, 아니면 기적처럼 할멈이 신애기한테서 주인공으로 돌아가 무속인의 능력을 회복할 것인가. 생사여부가 갈리는 극한의 상황에서 단편은 갑자기 끝나버린다. 허무하다고 느끼는 독자도 있겠지만, 오히려 이 지점에서 단편이 끝나기에 우리는 작품을 더 깊이 사유하게 된다. 주인공이 집착하던 ‘신’의 실체와, 우리가 영험하다고 믿는 영력(무속인의 힘)의 실체가 무엇인지 성찰하게 하며, 나아가 나의 정체성이었던 것이 사라졌을 때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 이후의 나는 어떤 존재가 되는지를 스스로 묻게 되는 것이다.
잉태기에서도 미결의 미학이 드러난다. 주인공은 부유한 집안에서 세상물정 모르고 자란 딸 서진의 엄마다. 이혼한 지 얼마 안 된 서진은 전남편의 아이를 임신 중이다. 사랑을 못 받고 자라 ‘사랑을 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주인공은 서진에게 삐뚤어진 애정을 보인다. 서진의 관심을 독차지하려고 하고, 서진의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설계하려고 한다. 하지만 서진에게 집착하는 사람은 주인공 외에도 한 명이 더 있으니, 주인공의 시부, 다시 말해 서진의 친할아버지다. 서진의 할아버지와 주인공은 상이한 신념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 서진의 양육방식에 있어 항상 대립해왔고, 서진은 늘 할아버지와 엄마 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해왔다. 곧 아들을 출산할 예정인 서진을 두고, 서진을 원정출산 보내야 한다는 주인공과 서진이 한국에서 아들을 낳게 해야 한다는 시부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고, 서진은 갈팡질팡한다. 주인공은 서진을 공항까지 데려가는데 성공하지만, 공항까지 서진의 할아버지가 찾아와서 서진의 마음을 돌리려고 한다. 서진의 양수가 터졌는데도 주인공은 서진을 비행기에 태우려고 한다. 분노한 서진의 할아버지와 주인공은 격한 몸싸움을 벌인다. 난장판이 된 현장에서 서진은 다급히 말을 하지만, 단편은 이 극적인 순간에서 끝난다. 독자는 끝내 서진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서진에 대한 작가의 ‘무음 처리’는 작품의 주제의식을 관통하고 있다. 작품 내내 주인공은 자신의 시부와 극한으로 대립하며 서진에 대한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애썼지만,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서진을 자신의 주관이 있는 독립된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았다. 서진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어보려하지 않은 것이다. 결말의 무음 처리는 서진이 성인에 이르기까지 평생동안 서진을 ‘무음 처리’한 주인공의 문제를 독자가 깨닫도록 만든다. 작가는 지독한 싸움에서 누가 최후에 승리하는지를 독자가 궁금해하도록 만들었지만, 미결을 통해 그 승리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뒤통수 치듯 알려준 것이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본질을 짚지 못한 채 무용한 싸움을 벌이는 행위가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지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마지막은 메탈이다. 조현, 시우, 우림은 고등학교 시절 단짝으로 록에 심취해 있었다. 그들은 밴드를 만들고 음악을 하며 록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 누구도 낄 수 없는, 자신들만의 작은 세상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 이후 현실을 마주하면서 이들은 각자의 길을 걷는다. 조현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고, 시우는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운다. 우림은 음악을 계속한다. 음악으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음악에서 멀어지는 친구들을 보며 우림은 점차 불안감과 회의감에 휩싸인다.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에서 결국 우림은 조현의 말을 곡해하여 조현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게 되고, 둘 사이 교류가 끊긴다. 조현, 시우, 우림 모두에게, 세상의 전부였던 락은 이제 언급조차 꺼려지는 흑역사가 되었다. 시우에게서 조현이 곧 결혼할 예정이라는 근황을 들은 우림은 조현에게 연락을 해야 할 것인지 고민을 거듭하다 끝내 전화를 걸기로 결심한다. 연결음이 계속되는 순간 소설은 끝이 난다. 조현은 과연 시우의 전화에 응답할 것인지 궁금해지는 게 독자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겠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현재 시우의 환청이자 과거 셋이 자전거를 타며 질리도록 들었던 파도 소리다. 고등학생 시절, 록에 미쳐있던 그들은 아직도 존재하는가, 아니면 사라졌는가. 시우에게 전화를 거는 조현의 선택은 미련한 짓인가, 아니면 용기있는 행동인가. 우리는 지나간 시절과 과거의 기억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파도소리는 이러한 묵직한 질문을 함축하고 있다. 독자는 그 질문에 어떤 답을 내리는지에 따라서, 자신이 어떤 태도로 삶의 궤적을 받아들일지를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성해나 작가의 작품에는 회색 지대가 있다.
함부로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라고 판단하기 난감한 사건이 성해나 작가의 소설에서 펼쳐진다. 무엇이라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현실에서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일지도, 이분법으로 판단하거나 특정 대상에게 책임을 귀속시키는 우리의 효율적이지만 무책임한 행위를 비판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성해나 작가처럼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에 말문이 턱 막혀버리는 경험을 독자에게 선사하는 작가는 흔치 않다.
먼저 스무드를 살펴보자. 주인공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한국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김치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으며, 태극기의 발음이 어색하며, 사우나 시설은 불쾌하게 느껴진다. 주인공은 일을 하러 한국에 잠시 방문한다. 제프를 기다리며 종로를 걸어다니던 도중 그는 영문 모를 ‘축제’ 현장에 휩싸인다. 그는 기적처럼 아주 기초적인 영어만 할 줄 아는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할아버지를 따라가며 그는 한국 음식을 먹어보고, 할아버지와 친한 사람들을 소개받게 되고, 그들과 함께 축제에 참여하여 기념품도 사고 노래도 부른다. 그는 처음으로 한국에 짙은 소속감을 느낀다. ‘주인공’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모르지만, 우리는 소설을 보는 내내 알고 있다. 주인공은 축제가 아닌, 태극기 집회 현장에 참여했다는 것을 말이다. 한국에 없었던 관심과 애착이 생기는 주인공을 지켜보면서 독자는 난감하기만 하다.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하며 자신을 열사로 지칭하는 미스터 김, 그러면서 이방인인 주인공을 챙기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미스터 김. 잘못된 역사관을 지닌 이기에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의중을 모르는 그의 친절함이 찝찝하게 신경 쓰인다. 나아가 독자 입장에서는 주인공을 향한 집회 참가자들의 호의는 진심어린 환대였을지, 아니면 돈을 뜯어내기 위한 수작이었을지를 헤아릴 길이 없다. 독자는 비록 소설 밖에 존재하지만 마치 주인공의 친구라도 된 것처럼 아주 좋은 날이라며 축제를 회상하는 주인공에게 진실을 알려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쌓여 독자는 소설의 끝에 다다르면 체한 듯한 심정을 느끼게 된다. 실체를 모르는 한국계 외국인이 태극기 집회 현장에 가서 한국에 정을 붙이는 사건에 끝내 아무런 논평과 가치판단을 제시하지 못한 채 깊은 혼란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가 있다. 주인공 여재화는 수련원을 설계하는 국가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제자 구보승을 발탁한다. 말이 수련원이지, 실상은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가두는 고문실이다. 여재화는 구보승을 설득하기 위해 건축을 할 때 ‘인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허울 좋은 말을 하며, 자신을 꾀어내기 위한 수작임을 모르는 구보승은 이러한 여재화의 말에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스승과 제자의 권력관계는 소설의 중반부에서부터 급격하게 뒤바뀐다. 구보승이 스승 여재화를 아득히 뛰어넘은 실력으로 수감자를 위한 완벽한 판옵티콘을 설계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수감자들의 일체의 희망을 느껴서도 안된다며 여재화가 설계도에 그린 창문을 지워버리고, 수감자들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공포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며 여재화가 설계도에 그린 직각형 계단을 나선형 계단으로 바꿔버린다. 일말의 죄책감도 느낄 수 없는 구보승의 냉혹한 설계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여재화는 점점 구보승을 두려워하게 되고, 양심의 가책에 사로잡히게 된다. 참다 못한 여재화는 결국 구보승에게 왜 이런 끔찍한 설계를 하냐고 한 마디 쏘아붙인다. 하지만 구보승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억울해한다. 철저히 ‘인간’을 위해 설계했다고, 자신은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라고 말한다. ‘악의 평범성’의 한국 사례인 제자 구보승. 스승의 ‘가르침’을 따른 채 수감자들의 인권과 존엄성을 무시한 그의 설계는 독자를 섬뜩하게 만든다. 더 절망적인 것은 구보승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시공에 들어가자 모든 것이 모호해졌다. 자신이 치밀하게 설계했던 것들이 무엇을 위함이었는지 자신조차도 알 수 없게 됐다’라는 독백이 암시하듯, 그는 회색지대에 영원히 갇혀버리고 만다. 주인공 여재화 역시 독자를 난감하게 만드는 회색지대의 인물이다. 그는 양심을 상실한 구보승의 설계에 비판을 가했고, 독재 정권의 하수인으로 활동한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만, 고문실 건축을 막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으며, 망명을 떠났을 뿐 자신의 잘못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았다. 동창의 말대로 그는 순진하지만 동시에 몹쓸 사람이었다. 악의 핵심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생양이나 정상 참작의 대상도 아닌 두 인물을 통해 작품은 우리도 회색 지대에 있으나 스스로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수 있다는 서늘한 메시지를 안긴다.
마지막으로는 우호적 감정이라는 단편이다. 스타트업에 다니는 주인공은 회사에서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일을 한 경험도 많은 동료 수전 그리고 진과 함께 소서리라는 마을을 브랜딩하는 프로젝트를 맡는다. 스타트업 대표의 눈에 들어 경력직으로 채용된 진은 눈치 없는 성격으로, 원년 멤버인 수전은 매사 불평하는 성격으로 둘 다 회사 뒷담의 대상이었다. 회사 동료에 대하여 함부로 얘기하는 것을 꺼렸던 주인공은 이번 기회에 진과 수전 사이의 긴장을 풀고 셋이 동료로서 팀워크를 다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 주인공의 노력이 하늘에 닿았는지, 수전과 진은 일 밖의 사생활 얘기도 꺼내가며 친해지기 시작한다. 일과 인간관계 모두 수월하게 풀려가던 도중, 소서리 브랜딩은 갑자기 엎어질 위기에 처한다. 수익 분배를 둘러싼 마을 주민들의 갈등 때문이었다. 난감한 상황 가운데, 모두의 예상 밖으로 능력이라곤 없어보였던 진이 구원투수로 등판한다. 그는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지만, 그것은 치사한 수를 써 힘이 더 있는 파에게 수익을 더 몰아주는 방식이었다. 수전은 이런 식으로 마을 사람들의 갈등을 더 부추기면 되냐고 항의하지만 그녀의 의견은 묵살당한다. 진은 스타트업 대표에게 프로젝트를 살려낸 영웅으로 환대받고, 수전은 회사를 홀로 퇴사한다. 연말 회식에서 아무일도 없이 행복해하는 진을 보며 주인공의 기분은 묘해진다. 이 단편에는 아이러니가 가득하다. 화목한 마을인 줄 알았던 소서리는 알고보니 돈을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편을 갈라 싸우는 마을이었고, 진은 물러터지고 눈치 없는 성격인 동시에 약삭빠르고 비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주인공은 일을 같이 하며 생긴 진과 수전에 대한 우호적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몰라 혼란에 빠진다. 퇴사하는 수전을 찾아간 주인공에게 그녀가 마지막으로 준 조언, ‘애쓰지 말라’는 셋 사이 있었던 교류와 우호적 감정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실제로 존재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무용한 짓이라고 말하는 듯해 독자들에게 더욱 씁쓸함을 안긴다. 진이라는 회색 지대의 인물은 유능한 필요악인가 아니면 구제불능의 악인인가. 세 사람 사이에 튀었던 스파크는 진심이었는가 아니면 사회생활을 위한 가식이었는가. 이 스타트업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조직인가 아니면 수직적 체계의 사기업보다 더 보수적이고 속물적인가. 소설은 무엇 하나에도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