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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화 Jul 03. 2024

모범 시트콤, 애봇 초등학교

#배경의 매력

인물이 매력적인 시트콤은 많지만, 배경까지 매력적인 시트콤은 흔치 않다. 그 힘든 걸 해내는 시트콤이 바로 <애봇 초등학교>다. 애봇 초등학교는 필리델피아의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교사들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은 시트콤이다. 인물들의 과장된 행동만 빼면 모큐멘터리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로 보일 정도로, 인력난과 재정난에 쪼들리는 학교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작품의 등장인물인 선생님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학생들을 관리하기 위해 대체교사를 필요로 하지만 애봇 초등학교에는 '대체교사를 고용할 돈이 없다.' 많은 학생들의 손을 거치며 닳거나 사라지기 때문에 학용품과 책을 추가로 구매해야 하지만 애봇 초등학교에는 '물품을 구매할 돈이 없다.' 선생님들은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이나 현장실습 체험을 학생들에게 제공하고 싶지만, 아무리 공들여 제안서를 써봤자 교육청은 '애봇 초등학교에 보조금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처럼 애봇 초등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열악한 교육 환경 때문에 실패하거나 좌절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궁핍한 학교와 열악한 교육현장에 대한 정확한 재현은 시청자로 하여금 미국 교육 시스템의 문제를 실감하게 만들고, 동시에 한정된 예산과 조건 내에서도 학생들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선생님들의 노력이 얼마나 숭고한지를 깨닫게 만든다. 시트콤 속 맘대로 되지 않는 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일을 다하려는 태도는, 평범해도 박수 받아야 마땅한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애봇 초등학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훈훈한 성장기

애봇 초등학교에는 여타 시트콤처럼 개성 강한 선생님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자닌은 패기 넘치고 열정적이지만 눈치가 없으며, 동료 그레고리는 진지하고 융통성이 없다. 멜리사는 괴팍하지만 노련하며, 제이콥은 너드미를 장착했으며 친절하다. 에이바는 학교보다는 틱톡에 관심이 많은 교장이고, 바바라는 현명하면서도 최신 유행에는 뒤떨어진 최고참 교사이다. 

이토록 성격이 뚜렷한 등장인물이 많이 나타나면 갈등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길 마련이다. 물론 갈등이 있지만, 여타 시트콤과 달리 <애봇 초등학교>에는 갈등이 소모적이지 않다. 문제 상황이나 달성해야 할 과제를 대하는 선생님들 간 입장 차이와 대립을 통해, 인물이 어떻게 더 좋은 선생님으로 성장하는지에 시트콤은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애봇 초등학교>에는 특유의 감동과 교훈성, 그리고 훈훈함이 있다. 

를테면 한 에피소드에서 '원칙대로'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을 훈계하기 위해 교장실로 보냈던 그레고리는 교장실에 끌려온 학생들과 재밌게 놀아주는 교장 에이바와 대립한다. 하지만 에이바를 통해 교장실로 보내지는 학생들이 겁에 질려 위축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훈계가 학생들을 위한 적절한 방식이 아니었음을 반성하게 된다. 다른 에피소드에서 자닌은 바바라가 아이패드 교육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자 항상 바바라로부터 도움을 받아왔던 자신이 드디어 처음으로 바바라를 먼저 도와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끈질기게 바바라에게 도움이 필요하지 않냐고 추궁한다. 애써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거부하는 바바라와 대립한 다음 자닌은 답답하고 혼란스러웠을 바바라의 마음을 충분히 배려하지 않은 채 부담을 안긴 것을 반성하고, 바바라는 원래의 교육 방식이 더 좋다고 무작정 고집을 부렸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한다. 

인물의 결점은 희화화의 수단이 아닌 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것, 서로 진심어린 조언을 주고받고 힘을 합침으로써 인물들이 함께 성장해나간다는 것이 <애봇 초등학교>가 지닌 특별한 매력이며, 시청자는 미성숙한 인물들의 짠하면서도 따스한 성장기를 보며 자신에게도 필요한 결정적인 교훈을 얻는다.


#학교의 가치

<애봇 초등학교>는 선생님들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않는다. 학교 미화, 급식, 행정을 담당하는 인물들도 에피소드에 맞게 비중있게 등장시키면서 그들의 업무와 생활이 어떠한지도 다룬다. 학교의 왁자지껄한 사건들을 그려내지만, 그 밑바탕에는 학교 구성원 모두를 향한 존중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애봇 초등학교>는 결코 선을 넘기는 불쾌한 농담을 제공하지 않는다. 특히 주목할 인물은 선생님들과 함께 비중있게 등장하는 애봇 초등학교의 청소부 존슨씨이다. 괴짜이면서도 투철한 직업의식을 지니고, 그 어떤 교사들보다도 풍부한 경험과 연륜을 갖춘 존슨씨는 선생님들의 서사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 때로는 선생님들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학생들의 부모님 역시 <애봇 초등학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애봇 초등학교>는 학생들을 한없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존재들로 정형화되지 않는다. 철이 없고, 가끔 말썽도 부리고, 큰 실수를 저지를 때도 있지만, 학교에 오는 것을 좋아하고, 선생님의 관심을 받고 싶어하고, 친구들과 재밌게 놀고 싶어하는, 그야말로 '현실 그대로'의 학생들을 담아낸다. 이를 토대로 때로는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기도 하고, 때로는 학생이 선생님을 가르치기도 하는 학생-선생님 간 역동적인 관계가 작품에서 묘사된다. 이를 통해 시청자들은 왜 작품의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한 마음 한 뜻으로 똘똘 뭉치는지를 깊이 이해하게 되고, 비록 '가볍게 웃자는' 목적으로 튼 시트콤에서도 선생님에게 학생은, 학생에게 선생님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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