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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화 Aug 02. 2024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이 드라마에서 훌륭한 수미상관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드라마의 제목,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의 해석이다. 

드라마 초반에 '도망침'의 대상은 주인공 미쿠리와 츠자키를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사회의 불합리한 관습과 통념이다. 가짜 결혼을 하기 이전, 미쿠리는 쓸모없는 심리학 석사 학위를 지녔다는 이유로 번번히 구직에 실패한다. 그녀를 짓누르는 것은 대학을 졸업했다면 하루빨리 취업해야 한다는 강박과, 사회초년생에게 가혹한 취업 시장이다. 츠자키의 경우, 결혼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는 강박과, 모태솔로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적 시선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가짜 결혼으로 인해 미쿠리는 취업 시장에서의 좌절에서 벗어나 자신이 잘하는 일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츠자키는 혼자인 이유로 사회에서 은근히 겪는 소외감에서 벗어나 타인과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따라서 미쿠리와 츠자키의 도망침은 비록 원래 의도는 'Runaway'였을지도 실질적으로는 'Thinking outside the box'라는 성취로 귀결된다. 통상적인 결혼의 관념을 부수는 가짜 결혼을 감행함으로써, 미쿠리와 츠자키는 '그래야 한다'라는 사회의 잡음에서 벗어나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라는 진실을 깨닫고, 기존 규칙에 반대되는 새로운 시스템과 마음가짐으로도 좋은 삶을 일궈나갈 수 있음을 입증해나간다.

드라마 후반에는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의 맥락이 변한다. 츠자키는 사랑을 고백한 미쿠리를 놔두고 집 밖으로 도망쳐 나온 다음, 뒤늦게 후회하며 다음과 같은 독백을 한다. "도망치는 건 괜찮다. 도망치는 게 부끄럽더라도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니까. 하지만, 이건 잘못됐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그 사람을 잃기 싫으면, 아무리 창피하더라도, 도망쳐서는 안 된다." 츠자키의 깨달음은 '도망침'에는 단 하나의 강력한 예외 조항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의 문제적인 관습과 제도에서는 도망치는 것이 '장려되지만', 그 갑갑한 현실 속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소중한 사람으로부터는 결코 도망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해당 드라마는 츠자키와 미쿠리를 상처입히는 외적 요인을 통해 사회 문제를 다룰 뿐 아니라, 그들 간 관계의 진전을 가로막는 내적 요인을 통해 "타인과 어떻게 건강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의 고민을 탐색한다. 츠자키는 극 중반까지 애써 자신의 낮은 자존감과 상처를 감추려고 하고, 관계가 삐걱거리면 일단 아무 일 없던 척 회피하려고 한다. 그런 츠자키가 자신의 콤플렉스와 어설픈 면모를 미쿠리에게 솔직하게 꺼내보이고, 갈등을 풀기 위해 먼저 용기내어 다가가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끝내 "도망쳐서는 안된다"며 결의를 다지는 츠카키의 서사는 사랑하는 사람을 신뢰하고 배려하는 마음과, 상대의 옆자리를 지키는 헌신과, 서로 힘을 합쳐 맞춰나가려고 하는 태도가 진정한 관계의 기반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드라마는 가사 노동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드라마 초반에 미쿠리는 츠자키에게 '집에서 살면서 일하겠다. 근로 계약처럼 같이 살자. 내가 풀타임 가사 도우미로 일하겠다'라고 제안을 건네고, 츠자키는 '가정주부는 1년에 무보수로 2,199시간을 일하고 그걸 연봉으로 환산하면 204만 1000엔이다. 시급을 따져보면 이게 당신의 월급이 된다. 사실혼처럼 동거하며 당신에게 가정주부로 일하는 대가를 봉급으로 주면, 나한테도 유리할 계약이 될 것 같다'하며 미쿠리의 제안을 수락한다. 통상적인 부부 관계에서 청소하기, 요리하기, 빨래하기 등 남성 혹은 여성이 분담하는 가사노동은 '무급'이다. 하지만 드라마 속 사실혼을 한 츠자키와 미쿠리는 '고용주와 고용인' 관계를 맺고, 미쿠리는 하루 7시간 가사 노동을 하며 츠자키로부터 월급을 받는다. 가족을 만나러 가야 하거나 친구와의 약속이 있어서 가사 노동을 할 시간이 없는 날에는 미쿠리가 '휴가'를 쓸 수 있다. 근로 조건에 대한 수정과 보완이 필요할 때마다 미쿠리와 츠자키는 '계약서'를 꺼내놓은 다음 진지한 회의로 도출해낸 합의점을 계약서에 반영한다. 이처럼 드라마에서 미쿠리와 츠자키의 위장 결혼은 둘의 사랑 이야기를 위한 서사적 도구로 소모되지 않는다. 그 대신 계약으로 성립된 둘의 동거 관계는 가사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인식을 비판하고, 대가 없이 개인이 가사 노동을 부담하는 전통적인 관습을 돌이켜 보게 만드는 강력한 화두로 기능한다. 가사 노동에 정당한 대가가 지급되고, 가사 노동을 향한 존중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시청자에게 던진다는 측면에서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재미에 더해 가치를 확보한다. 나아가 극 후반에 '계약 관계'가 아닌 '부부 관계'에서, 더 이상 '고용인'의 신분이 아닌 아내 미쿠리가 가사 노동과 회사일을 병행하려고 하다가 감당하지 못해 무너지는 대목을 제시함으로써 드라마는 가사 노동의 가치가 폄하되는 문제를 넘어 가사 노동이 불공평하게 분담되는 문제까지 확장해서 다뤄낸다. 상식과 정반대인 고용 관계를 시작으로, 모두에게 익숙한 결혼 관계를 마지막으로 제시하는 구조와, 효율적이고 깔끔했던 미쿠리와 츠자키의 시스템이 '부부'라는 문법의 도입 이후 점차 어그러지는 흐름을 통해 드라마는 가족 관계에서  서로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고 분담해야 할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것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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