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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화 Sep 15. 2024

양귀자 <모순>으로 쓰는 반성문


이십대란 나이는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대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히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것이다.


나 역시 주인공 안진진처럼 무언가에 사로잡혀본 적이 없는 나의 무미건조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연극에 빠져서 공연을 올리는 친구들, 스포츠에 빠져서 경기를 직관하는 친구들, 옷에 빠져서 쇼핑몰을 런칭한 친구들 등 우직하게 한 우물을 파온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다. 나는 그렇게 눈빛을 반짝이면서 얘기할 '무언가'가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발만 담갔다 뺐기를 반복해온 나에게는 그 무언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나에게는 내가 불행할 때는 행복한 장면을 업로드한 사람들을 괘씸해하고, 반면 내가 행복할 때는 나의 행복을 자랑하며 다른 사람들의 일상에는 아랑곳도 안 했던 시절이 있었다. 모든 것이 안 풀리는 시기를 겪고 나서야 내가 이 문장의 '우리'에 해당되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 후 인스타 게시물은 올리지 않고 있다. 남의 행복은 납득할 수 없어하고 나의 행복만 당연시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모부는 몹시 심심한 사람이었다. 심심하다는 것은 사람이 싱겁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일에 예외가 없어서 언제라도 예측이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남들에게는 좋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 문장이다. 원칙을 지키는 태도가 모범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칙주의는 다른 사람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은 채, 내 의사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이기적인 태도가 될 수 있다. 비합리적인 원칙에 집착하며 '재미를 죽이거나' '자율성을 침해하는' 융퉁성 없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모가 나 못지않은, 아니 나를 훨씬 능가하는 문제아로 청소년기를 보내는 동안에도 나는 그 애의 삶에 참견하지 않았다. 진모의 삶은 진모의 것이었고 진진이의 삶은 진진이의 것이었다. 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삶의 공식인가 말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것이었고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것이었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묻지 낳았다. 그것은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예의에 벗어나는 질문이었다.


Non judgemental.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며, 그 사람의 삶에 멋대로 라벨지를 붙이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이 문장의 가르침에 공감한다. 나는 그동안 겉으로는 티를 안내도 속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별로'인게 느껴지면 선을 확 그어왔었다. 지나고 나서야 그 선을 긋는 행위가 현명한 처신보다는 상대에 대한 성급한 판단인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절대로 '너는 왜 그렇게 살아? 너는 도대체 왜 그래?'라는 말을 입에 담지 말 것을 다짐하게 만든 문장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힘만으로 상대하기 버거운 문제와 직면하면 마지막 수단으로 동네서점에 달려가 해결법이 들어있을 것 같은 책을 고르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알아낸 것은 책 속에는 해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어머니는 거의 책을 읽지 않았다.


작년 2학년 2학기 쯤이었나. 책을 읽으면 뭐해, 아무런 쓸모가 없는데. 이런 회의론에 빠져 한동안 책을 멀리했었다. 이 문장을 읽고 내가 책을 내팽겨친 이유는 책의 용도를 진진이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삶의 '해답'을 찾는 것으로 잘못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책은 관점과 이야기를 제공해줄 뿐 해답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전자의 기능을 여전히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에는 훨씬 더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고 있다.


하지만 나는, 추억이란 계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만들어진다는 등,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일에 그렇게 머리를 쓰고 살자면 피곤하겠다는 등의 분위기 깨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부득불 해가면서 살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껴서 좋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돈보다 더 아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었다.


나는 글 한 문장 쓰는 것에는 그렇게 신중하면서 왜 말 한 마디 내뱉는 것에는 그렇게 가벼웠을까. 그렇게 '말을 잘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득한데도, 내가 했던 수많은 말들 중 '잘 한 말'은 사라진 채 오래고,  반대로 '상대를 배려하지 못한 말' '분위기를 고려하지 못한 말'만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을 아껴야 한다는 안진진의 철학이 참 멋지게 느껴진다.


아버지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단칼에 아버지를 해석해버리는 것이 나에겐 늘 의문이었다. 아버지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아버지 스스로도 사람들이 자신을 그런 식으로 쉽게 판단하고 생각을 그쳐버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아무에게나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치욕이었다. 아버지는 타인에 의해 한 번도 정확히 읽혀지지 않은 텍스트였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모독이었고 또한 아버지의 불행이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아무에게나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치욕'이라는 안진진의 분석에 대한 공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기록을 남기며 내가 이런 취미와 관심사를 가진 사람이고, 내가 이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두 번째는 '내가 단 한 번도 정확히 읽지 않고 단칼에 해석해버린 텍스트는 얼마나 많을까'하는 생각에서 오는 섬뜩함이었다. 당장 대학교 와서 들은 숱은 문학 수업만 비추어봐도, 주제와 의미를 잘못 알고 있었던 작품들이 많았다. 텍스트 뿐 아니라, 내가 한 번도 정확히 읽지 않은 '사람' 또한 많았다는 것을 이 문장을 통해 실감하게 되었다.


희미한 존재에게로 가는 사랑. 이렇게 말하면 보다 정확해질지도 모르겠다. 강함보다 약함을 편애하고, 뚜럿한 것보다 희미한 것을 먼저 보며, 진한 향기보다 연한 향기를 선호하는, 세상의 모든 희미한 존재들을 사랑하는 문제는 김장우가 가지고 있는 삶의 화두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향해 직진으로 강한 화살을 쏘지 못한다. 마음으로 사랑이 넘쳐 감당하기 어려우면 한참 후에나 희미한 선 하나를 긋는 남자.


내가 기자라는 직업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음을 깨달은 이유를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깡다구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세상을 향해 직진으로 강한 화살을 쏘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희미한 존재를 향한 관심이 나와 김장우의 공통점이지 않을까 싶다.


철이 든다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지닌 가능성과 타인이 가진 가능성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나 또한 내 어머니처럼 이종사촌들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도저히 대범할 수 없었다. 


내가 지닌 가능성과 타인이 가진 가능성을 비교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한 것인지(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게 되니까) 나에게 해로운 것인지(내 자존감이 낮아지니까) 아직도 나는 답을 모르겠다. 타인이 지닌 더 많은 가능성에 대범함을 보이는 것은 분명 좋은 마음가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쉽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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