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없는 백과사전

성장

by 유채하

나는 2002년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작은 도시 알바니에서 태어났다. 공개하는 게 좀 조심스러운 가족사를 약간 들어내야 될 것 같은데, 우리 큰고모는 1993년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고 이 시기 아빠도 같이 큰고모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뉴질랜드에서 영주권을 취득하고 한동안 살았지만, 내 아빠는 한국에서 좋은 직업의 기회를 얻게 되어 귀국해 일하던 중 내 엄마를 만나 결혼했다. 내가 태어날 무렵 엄마와 아빠는 다시 해외생활을 해보기 위해 뉴질랜드에서 머물던 중이었다. 여기에는 외국에서 애를 키워보라는 내 할머니, 할아버지의 권유도 한 몫 했다. 그렇게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동시에 나는 시민권을 얻었고, 부모님의 계획대로 거기서 살 줄 알았지만 계획이 바뀌어 결국 얼마 뒤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유치원, 초등학교까지 한국에서 보냈다.


엄마 아빠가 다시 해외생활을 결심한 것은 2013년 쯤 무렵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를 뉴질랜드로 잠시 데리고 가 학교에 다니도록 시켜봤는데, 내가 현지 학교에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본 두 사람은 예전에 생각했던 외국 생활의 계획을 다시 꺼내보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여기 좋아?" 라고 묻는 질문에 너무나 해맑은 얼굴로 "그럼." 이라고 대답한 나의 얼굴을 기억하며 외국 생활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그렇게 해맑았었나? 잘 웃지 않은 요즘의 나를 생각하면 이상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준비를 끝내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2015년 나는 호주로 이민을 갔다. 뉴질랜드를 염두해두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미 뉴질랜드는 이민의 선택지로는 멀어져 있었다. 큰고모 가족도 이미 호주로 이주한 뒤였다. 뉴질랜드보단 땅덩어리도 넓고 교육의 기회가 폭넓게 보장된 호주를 우리의 새 터전으로 삼게 되었다. 호주에 도착한 첫 날, 앞으로의 생활이 너무나 기대되고 두려워서 잠을 설쳤던 기억이 난다. 그 날 내 마음 속에서 요동쳤던 긴장과 불안이 앞으로 쉽지 않을 호주생활을 각오하라는 하느님의 경고였을까? 지금도 종종 그 날 밤을 생각한다. 이렇게 꼬불꼬불한 길일 줄 알았으면 그 때 좀 알아차리고 무서워할 걸.


호주에 도착한 뒤 나는 High School(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호주는 한국처럼 중학교가 별도로 없고 중고등학교 과정이 하나의 하이스쿨로 통합되어 있다. 7학년부터 12학년까지, 중1~고3 과정이 전부 하이스쿨 6년 코스였다. 다만 나처럼 비영어권 국가에 오래 산 친구들은 하이스쿨에 입학하기 전 IEC(Intensive English Centre)에서 3개월 ~ 1년동안 영어교육을 받아야 한다. IEC는 단순히 영어교육만 하는 것이 아닌, 호주 학교의 전반적인 제도와 문화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난 IEC에서 교육을 받고 하이스쿨에 가야 했으나, 나의 입학을 도와준 조력자의 끔찍한 고집으로 인해 IEC를 안 거치고 바로 하이스쿨에 어거지로 입학하게 되었다. 영어도 잘 못하는 내가 여기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 속에 있던 도중,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이 찾아와 나를 정식으로 IEC에 다시 입학시켰다. 영어를 초등학교 1학년보다 못하는 애를 무조건 하이스쿨로 집어넣으려한 조력자의 끔찍한 실수를 본 학교 교직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그 때부터 내 호주생활은 꼬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첫단추를 잘못 끼웠으니.


어린 나는 이러한 상황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가볍고 긴장하는 마음으로 IEC 에서 레벨테스트를 받고 반을 배정받아 교실에 앉았다. 하이스쿨과 달리 외국인들만 있는 곳이니 인종차별 걱정은 할 필요 없었지만, 갑자기 들어온 나에게 무슨 신고식이라도 하지 않을지 은근히 걱정됐다. 다행히도 별 다른 거부반응은 없는 것 같았고, 순해보이는 애들을 보며 안심하면서 나는 본격적인 호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1달은 정말 문제없이 흘러갔다. 한국에서는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지만, 여기 오니 애들도 한국과 달리 친구를 대하는데 적극적이었고 선생님들의 교육 태도도 한국과 달라보여 나는 괜찮은 학교생활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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