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병원에 다녀오고 난 뒤, 나의 학교생활은 더욱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소문이 어느새 펴졌는지 아이들은 전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와 친구가 되겠다고 다가오는 아이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행동은 점점 더 심해져갔다. 갑자기 수업시간에 일어나 아이들에게 악수를 하거나, 대화를 하던 중 갑자기 "넌 날 싫어하잖아! 저리 가! 저리가!" 라고 소리치거나, 수업시간에 책상 밑으로 들어가 "으아아악!" 소리를 지르고 땅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나와 직접적인 갈등이 없었던 교사들조차 나의 이런 행동에 크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난 학교에서 자살소동을 일으켰다. 한 백인 친구와 DM를 하던 중 내가 자살을 암시하는 말을 하자, 백인 아이가 나를 곧바로 신고한 것이다. 호주 등 영미권 국가들은 이러한 말들을 한국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데, 여기 문화를 잘 몰랐던 나는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다음 날, 나는 담당 카운슬러의 호출을 받고 그의 사무실에서 상담을 받게 되었다. 나보다 큰 백인 남자였는데, 그의 모습은 카운슬러로서 크게 미달인 모습이었다. 뭐랄까, 내 아픔을 마치 웃음으로 이용하려는 행동까지 보게 되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난 교실로 돌아가자마자 막 소리를 질렀다. "날 신고한 000, 그 상담사! 그들은 자격도 없어! 그 사람들 때리고 나도 죽어버릴거야." 마침 교실에는 협력 교사라고 불리는(Support Teacher)가 들어와있는 상태였는데, 내 말을 듣고 놀라 나를 교무실에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나는 그 선생님에게 소리쳤다. "왜요? 데려가서 나 또 망신주시게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복도까지 따라나온 나는 선생님의 팔을 붙잡고 무릎까지 꿇으며 울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나를 지쳤다는 듯 희안하게 쳐다보는 그 경멸의 눈빛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 협력교사는 얘가 곧 자살할 것 같다며 000을 부르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더욱 화가 났다. 나의 이런 절박한 마음을 그런 방법으로 밖에 풀 수가 없었나? 이게 이들의 한계라는 실망과 함께 나는 교사의 팔을 뿌리치고 외쳤다. "알겠어요.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 제가 그냥 죽을게요. 자살해서 죽으면 되죠? 안녕히 계세요." 나는 곧바로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 체육관 뒤에 숨었다. 그 때는 정말 내 스스로를 해치고 싶어서 이리저리 둘러보며 날카로운 걸 찾았는데, 나무가지나 돌 말고는 딱히 찾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왜 여기 유리조각 같은 거라도 하나 없었는지 그 때는 너무나 절망했다. 하는 수 없이 나무가지를 부러뜨려 내 다리를 찌르려는 찰나, 교사들이 헐레벌떡 뛰어와 나를 찾아냈다. 그러자 나는 다시 도망쳤고, 온 학교를 다 도망다닌 끝에 겨우겨우 교실에 앉을 수 있었다. 이미 교무실에서도 내 소식을 듣고 혼비백산이 났으며, 교장 선생까지 쫓아와 나를 진정시켰다.
다음 날 나는 학교에서 정학 처분을 받고 말았다. 사유는 교사와 다른 학생들을 협박하고 위협을 끼쳤다는 것이었다. 교장의 사무실에서 정학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교장은 "니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무슨 사유로 이렇게 됐는지 그건 상관 없다. 너의 행동은 잘못된 거야." 라는 냉정한 말을 덧붙혔다. 그 때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교장에 대한 적대적인 마음만 가득했으나 현재는 그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 항상 이성적 판단을 해야 하는 건 인간의 의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다시 사무실에 앉아있는 나에게 이런 애는 정말 처음 본다고 말했다. 정학을 마치고 학교에 갔을 때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학생끼리의 싸움이나 왕따, 담배, 마약 같은 걸로 오는 아이들은 많지만 나처럼 수업시간에 난동을 피우고 혼자 저런 비이성적인 짓을 하는 아이는 처음 봤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내가 특수학교로 전학가길 원하고 있었다. 내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그런 행동을 지속할 수록 교사들과 다른 아이들은 지쳐갔고 수업에 큰 방해를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감정을 폭발시키는데만 의존해서 다른 사람들의 안정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너무나 후회되고 죄스럽다.
호주에 온지 2년도 안 된 상황에서 난 최악의 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정학을 받고 집에 있는 동안 난 침대에 멍하니 누워 천장만 바라볼 뿐이었다. 도대체 어떤 요소로 인해 내가 이렇게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까? 누가 내가 잘 꿰메놓은 단추를 그렇게 풀어해쳐놨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 호주 생활은 강 위에 떠다니는 부초처럼 확실한 변화의 목적지 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아니, 부초보다 더 처량한 신세였다. 부초는 최소한 강 위에 떠있지만, 나라는 부초는 내면부터 고장나 아예 바닥에 가라앉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내 증상도 점점 더 심해졌다. 이제 난 길거리에서도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쓰레기통을 걷어차고, 엘리베이터에서 꽥꽥 소리를 지르는 걱정스러운 단계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누구를 만나든 내 힘든 얘기만 했고, 심지어 엄마의 비자 문제 때문에 이민부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도 한번도 본 적 없는 직원에게 학교 욕을 하며 바닥을 꽝꽝 쳤다. 그 친절한 이민부 직원은 당황했으나 나름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려고 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 스스로가 내 자신의 통제권을 잃어버린 최악의 상태로 떨어지는 걸 매일매일 절실하게 느끼며 고통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