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하위키 40] 이제 멈춰야겠다

by 유채하

나의 무절제한 행동이 심해지는 동안 내 멘탈의 코어에는 계속 타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하이스쿨에 온다고 IEC 시절 만났던 안 좋은 아이들이 없을리가 만무했다. 특히 내가 계속 망가진 상태로 어이없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이러한 아이들의 타겟이 되기 딱 좋았다. 사실 하이스쿨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IEC 시절의 경험도 있었고, 어딜 가나 야생 같은 습성은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엄마도 하이스쿨에 가기 전 날, 날 앉혀놓고 마음을 단디 먹으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정신이 망가진 상태에서 그러한 일을 당해내는 건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웠다.


IEC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나는 하이스쿨에서도 백인 남자아이 W에게 또 다시 성추행을 당했다. 이 아이는 인도네시아 소년 J보다 더 강한 수위의 성추행을 저질렀다. 사실 인도네시아 소년 J보다 이 아이에게 당한 일이 더욱 서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내가 이 아이의 친구가 되주려 다가갔다가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난 예전이나 지금이나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내 자신은 경계심에 가득 차 있는 인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 그 아이를 만났을 때, 나처럼 외톨이인가 싶어 조심스레 손을 내밀게 됐다. 그게 내 자신을 지옥으로 이끄는 비극의 함정이라는 사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체로 말이다.


백인 소년 W 역시 인도네시아 소년 J와 마찬가지로 교실에서 대놓고 나의 몸을 만졌다. 그 아이가 게이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나를 이성으로 사랑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그 아이 옆에 앉은 나의 성기를 강하게 치고 나에게 키스를 하려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손가락이 떨릴 정도로 무섭고 당황스러웠다. 나보다 더 덩치가 컸기 때문에 반항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내 덩치도 누군가에 밀린다고 할 순 없지만, 백인 남자아이들 앞에서는 한없이 작은 사이즈였다. 가장 끔찍했던 순간은, 교실에 사람이 없을 때 그 아이가 나에게 입맞춤을 시도하며 나를 꽉 잡았을 때 일이다. 겨우겨우 뿌리치긴 했지만 그 아이가 강간까지 시도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끔찍해서 몸이 움직여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자 그 아이는 내 몸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얼굴부터 시작해 내 바지 안까지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자기 친구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내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 사진들은 지금 어디 있는지 난 알 수가 없다. 그걸 걔가 어디다 퍼트렸는지 누가 알 수 있을까? 이러한 지옥은 인도네시아 소년 J와 달리 조금 일찍 끝이 났는데, 백인 소년 W가 다른 여자 아이들을 때려서 결국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게 되며 그 아이와 헤어질 수 있었다. 다른 반에서 중국 아이 1명에게 시비를 걸고 비슷한 짓을 하다가 그 아이에게 나무토막으로 찔리기까지 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 아이가 떠나게 된 건 기쁜 일이었지만, 동양인인 내가 피해를 당할 땐 쉽게 풀리지 않던 과정이 같은 백인 아이가 피해를 입자 너무나 쉽게 처리되는 모습을 보며 씁쓸했다. 단순히 눈을 찢고 니 나라로 돌아가라고 소리치는 것만이 인종차별이 아니라는 진리도 배웠다. 오히려 이러한 뿌리깊은 차별이 마음 속에 더욱 큰 상처를 남겼다.


한 일본인 소년의 이지매도 견디기 어려웠다. 이 친구는 자신도 같은 동양인이지만, 일본계 호주인이였기에 현지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이 친구는 처음 와서 언어에 적응을 못하는 동양인들만을 상대로 시비를 건 뒤 걔가 화를 내며 곧바로 교사에게 꼰지르는 못된 습관을 가진 아이였다. 그 아이는 나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했다. 내가 얼마나 쉽게 보였을까? 매일 스스로를 컨트롤하지 못하고 수업 시간에 늘 소리지르고 이상한 행동을 하던 내가. 그 아이가 나를 괴롭게 할 때마다 교사에게 가서 말했지만 백인 교사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이 이성을 차리는 건지, 아니면 무시하는 건지 그 때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중에 지나서야 난 교사들의 행동도 전부 속물적인 짓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나에게 뭐 얼마나 관심이 있을까.


그러다 내 심신을 결정적으로 망가뜨린 사건이 생겼다. 체육 시간에 댄스 과제를 해야 된다며 교사가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3주간 안무를 짜서 연습한 뒤, 당일날 체육관을 빌려 아이들 앞에서 공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난 춤이라는 단어는 생각도 안 해보고 산 아이였다. 내가 조를 구하지 못하자 교사가 임의로 날 한 그룹에 집어넣었는데, 그 그룹의 아이들은 이면부터 화려했다. 노는 아이들부터 멕시칸 라틴 갱에서 활동하는 아이도 있었다. 내가 덩치가 커보인다고 여기 집어넣었을까? 걱정을 하고 있는데 미처 걱정이 끝나기도 전에 이 아이들의 행동은 현실로 다가왔다. 그 아이들은 나와 한 백인 아이를 체육관 벽 쪽에 붙혀놓고 저속한 춤을 추라고 시켰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보여줬고, 그 아이들은 그걸 카메라로 찍으며 낄낄거렸다. 반면 소심한 백인 친구가 제대로 하지 못하자 그 아이들은 욕을 퍼부으며 분노를 쏟아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난 뒤 난 그 백인 아이에게 작은 위로를 건냈다.


백인 아이가 도저히 이 아이들과 같이 할 수 없다며 교사에게 찾아가 따졌다. 그러자 교사는 그 백인 아이를 그룹에서 빼준 뒤 그 아이들에게 훈계를 했다. 그 모습을 본 난 뒤이어 쫓아가 교사에게 나도 저 아이들 때문에 힘들다고 말했으나, 어이없게도 체육 교사는 나를 빼주지 않았다. 사실 그 때는 이미 백인과 내가 100% 동등한 취급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이미 하고 있었기에 크게 당황하진 않았지만, 저 아이들에게 무슨 일을 당할 것인지도 알고 있었기에 돌아가는 길이 무섭기만 했다.


그 후 그 아이들과 연습을 하며 보낸 시간은 참 고통스러웠다. 그 아이들은 수시로 나를 놀려먹었고, 내가 무시하자 나를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연습을 했다. 솔직히 이런 것까지 그냥 대충 넘어갈 수 있다. 여기서 당한 일을 생각하면 단순한 은따는 나에겐 별 타격을 주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내 생각 이상의 행동을 했다. 춤검사를 시킨다고 나를 비행청소년, 갱단 멤버들이 어울려서 노는 학교 복도 구석으로 날 데리고 간 것이다. 그 아이들 앞에서 서 있는데 얼마나 심장이 떨렸는지 모른다. 교사라는 사람들은 그런 아이들을 보고도 그냥 웃고 넘기기 일수였다. 그런 거 보면 호주나 영미권 국가가 학교폭력이나 비행청소년 문제를 한국보다 잘 다룬다는 건 과장이다. 그저 운동 잘하고, 터프하게 보이면 자기들끼리 쇼부 칠 수 있는 곳이 호주 사회이고 남자-남자간 싸움에서 밀리는 사람은 약하게 보고 개무시하는 마초이즘의 눈을 간직한 이들이 호주인들이다. 예외는 있겠으나 예외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난 이런 케이스의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그러던 발표 당일. 나는 그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학교 근처의 한 공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우리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며칠 전 그 아이들은 나에게 갱단이나 입는 후드티를 사오라고 말해두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 이 아이들과 같이 있으니 불안함이 밀려왔다. 얘들이 나한테 나쁜 짓을 하면 어떡하나 하는 긴장감 때문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멕시칸 갱단 친구가 내 배에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칼을 들이밀었다. 멕시칸 갱단 친구는 절대 교복을 입고 다니지 않았는데, 호주 학교 교복에는 무기를 숨길만한 공간이 없다. 그래서 항상 입고 다니는 청바지 뒷편에 작은 칼을 숨겨두고 다니는 것이었다. 아마 시중에 판다기보단 본인이 미리 구입해서 잘 바지에 들어갈 수 있게 끔 포터블로 만진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가 웃으면서 내 배에 칼을 들이미는데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그 상황에서 소리라도 질렀다간 찔릴 것 같았다. 멕시칸 갱단 소년은 "장난이야~ 장난" 이라며 바로 칼을 땠지만 다시 내 배에 찌르는 시늉을 하며 가져다댔다. 긴장감 때문에 내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잘 살겠다고 온 호주에서 이런 꼴까지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다 허무하게 보였다.


그 뒤 내 정신적인 괴로움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칼에 찔리는 환상, 엄마가 칼에 찔리는 환상, 엄마가 나를 찌르는 환상, 내가 엄마를 찌르는 환상 등이 보이기 시작했고 길거리만 지나가면 누가 나에게 칼을 찌르고 불을 지를 것 같아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 일이 반복됐다. 잠도 2~3일 이상 자지 못했다. 며칠간 이런 지옥을 겪고 나니 내 마음 속에서 이제 그만 멈추라는 유혹이 올라왔다. 이렇게 계속 살바엔 왜 삶에 미련을 계속 두고 있냐는 강하고도 설득력 있는 유혹이었다. 오랜 싸움을 겪으며 난 결심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여기서 끝내자. 도저히 이런 생활은 계속할 수가 없어. 여기서 마무리해야 더 이상 피해가 없을 것 같다... 내 스스로에게 더 이상 자신이 없어."


어느날 밤, 나는 동네 도서관에 있는 장애인 화장실에 들어갔다. 장애인 화장실에는 변기 뿐 아니라 긴급상황 때 쓰라고 설치해둔 샤워기가 있었다. 나는 인터넷을 통해 치밀하게 방법을 연구했고, 내 점퍼를 벗어 샤워대에 묶었다. 막 날씨가 쌀쌀해지려던 터라 갖춰입게 된 얆은 점퍼였다. "이제 끝이구나... 더 이상 못 버티겠다. 이제 자유로워지고 싶어." 늘 죽겠다는 말은 입에 달고 살았지만, 막상 정말 죽고 싶은 순간이 오자 누군가에게 말해야겠다는 여유 따윈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을 향해 내 목을 집어넣었다. 3... 2... 1....


난 죽지 않았다. 뒤늦게 돌아보니 매듭이 풀려버린 것이다. 내가 매듭도 잘 못 묶을 정도로 손재주가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내가 이 날 내린 결정은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나름 검색도 해보고 매듭 묶는 방법까지 연습해서 시도했던 것이었다. 절대 실패할 수 없을만큼 치밀하게 준비한 상황에서 난 실패했고 죽지 않았다. 다시 시도해보려 점퍼를 들었으나, 정신이 돌아왔는지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자살을 포기하고 화장실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난 다시 현실의 어둠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던 것이다. 난 지금까지도 왜 이 날 실패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의문은 내 삶의 가치관을 만드는데도 영향을 끼쳤고, 뒷 에피소드에서 언급할 내가 신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게 된 사건이 되기도 하였다.


호주생활이 엉망으로 치달아가면서 난 내 한계를 수차례 방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인간적인 여유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매일매일 긴장과 불안 속에서 내 자신과 이 먼 나라까지 날 데리고 와서 매일 허탕만 치는 엄마를 생각하면 현실이 더욱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간 학교에서 정말 큰 사고를 치고 폐쇄병동에 입원당하거나 특수학교로 보내질게 뻔해 보였다. 해답을 찾을 수 없어 이리저리 박치기를 해보던 찰나, 나는 그나마 이용해볼만한 도피처를 만나게 되었다. 그건 바로 나무위키였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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