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건방(時虔放)
무수한 별이 떠 있는 밤이다.
달빛이 길을 비추고
조심스레 언덕을 오른다.
풀내음이 스치는 잔디 위에 몸을 눕힌다.
등 뒤로는 아직 낮의 온기가 남아 있고
머리 위로는 깊은 하늘이 펼쳐져 있다.
별들은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바람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풀 사이를 지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처음에는 여러 생각들이
마음속을 어지럽게 스쳐 간다.
낮에 했던 말들,
잠깐 스쳐간 욕심들,
괜히 오래 남아 있는 작은 장면들.
하지만 조금 더 누워 있자
생각들은 하나씩 멀어진다.
파도처럼 밀려오던 마음이
서서히 잦아든다.
고요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온다.
눈을 감는다.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속에 머물던 말을 꺼내본다.
부족함을 자주 잊습니다.
가진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손에 쥔 것들을 은근히 드러내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애써온 시간들이 떠오르면
그것이 다 제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결과인 것처럼
혼자 우쭐해질 때도 있습니다.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설명할 수 없는 도움과 운과 타인의 마음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주 잊어버립니다.
감사해야 할 순간에도
감사보다 아쉬움을 먼저 떠올릴 때가 많습니다.
더 가진 사람을 보며 조용히 초라해지고,
지금 가진 것들은 너무 빨리 당연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아는 것이 조금 늘어날수록
누군가를 가르치고 싶어 집니다.
정작 제대로 살아내지도 못한 말들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꺼내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 부끄러워집니다.
단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처음의 마음을 평생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익숙함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고,
처음 문 앞에 섰던 떨림은
어느 날부터 조금씩 옅어졌습니다.
누군가의 믿음이 얼마나 무거운 일이었는지
처음에는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믿음마저 익숙한 풍경처럼 여기고 지나칠까 두려워집니다.
높아지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겸손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은 낮아지기보다 높아지고 싶은 날이 더 많습니다.
쉽게 확신하고,
쉽게 판단하고,
쉽게 스스로를 납득시키곤 합니다.
그러니 잊지 않게 하소서.
익숙해질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높아질수록 더 낮아져야 한다는 것을,
많이 아는 것보다 오래 배우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소서.
교만 대신 경외를 품게 하시고,
확신 대신 성찰을 남겨 주시고,
자랑 대신 감사를 배우게 하소서.
마지막까지
배우는 사람으로 남게 하소서.
얼마나 시간이 더 흘렀을까.
눈을 뜬다.
저 멀리
햇빛이 언덕 위로 번져온다.
밤은 소리 없이 물러가고
새로운 하루가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時虔放 (시건방)
:[時 : 시간 / 虔 : 경건하다 / 放 : 놓다]
시간 속에 마음을 경건히 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