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크라고 함은 보장되지 않은 결실에 힘들게 모은 자본을 걸어본다는 뜻이다. 이런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없다. 다만, 실제로 이러한 길을 몸소 걸으며 이 말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글을 쓴다. 나는 내가 직접 해보지 않은 것에는 말을 아끼는 편이다. 체면이 안서서 그렇다.
하나 가정을 해보자.
이 일을 벌린게 지난 6월 말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나서였다. 만약, 100명의 인원이 이 일을 동시에 시작했다고 쳐보자. 투하된 자본의 크기도 같다고 쳐보자.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사람이 몇 명정도가 될까.
나를 지도해주는 컨설턴트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10명이 있으면 끝까지 가는 사람은 3명 정도라고 했다. 미친 척하고 가보는 강한 정신에는 물리적인 우위가 있다. 어찌되었든 남은 3명 중에 돈을 버는 사람이 나올 것 아닌가.
강한 정신은 어디서 일어나는걸까.
쾌락을 냉철하게 바라볼 줄 알고, 고통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게 되면 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생각한다.
쾌락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것, 고통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게 되는 것은 글 읽는다고 되는게 아니라 생각한다. 명상해서 되는 일도 아니라 생각한다. 위로나 공감도 아니라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본다.
쾌락을 냉철하게 바라보려면, 그냥 쾌락을 충분히 경험해보면 된다.
남성에게 있어서 가장 큰 쾌락은 여자이다.(반대할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20대 초반부터 주식 투자를 시작하고, 지금의 시기에는 사업을 벌린 나는 여자를 경험해보며 나의 일부를 알게 되었다.
내 행동의 모든 것은 인간의 주권과 관련이 깊다. 내가 투자를 하고 사업을 하는 것은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남자가 좋은 여자를 진정 사랑하는 것과 칼자루 휘두르는 여자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
여러 인연을 충분히 거치며 쾌락이 그렇게 대단치 않다는 것을 정신과 신체가 알게 되었다. 내 동물적인 역치가 성장했다고 보면 된다. 다시 말하지만, 경험이다. 책이나 글 또는 말이 아니다.
쾌락을 차갑게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을 지니면, 주권을 지키는데에 핵심적인 도움이 된다. 여자의 칼자루가 더이상 칼자루가 아니게 된다.(그러면 정말 좋은 여자가 구별되기 시작한다. 좋은 여성도 많다.)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개인의 경험과 철학을 공부하면서 길러졌다.
개인의 경험이라는 것에는 시련과 고난을 말한다. 신분의 한계를 처참하게 체감하는 것, 배가 고프고 비루하게 되는 것, 부조리의 늪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 것 등을 말한다. 처음에는 하늘을 원망하게 되고 중간쯤되면 무기력해지며 극한까지가면 궁지에 몰린 생쥐가 되어 덤벼들게 된다. 그런 내러티브가 있었다.
내가 품고 사는 생각의 대부분은 철학 내용에 기원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대표적이다. 전자는 실존주의를 말하며 후자는 스토이즘을 일컫는다.
왜 사람이 무조건 늘 행복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가장 큰 깨달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삶이 불행하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버릇 살면, 뭔가를 찾아 나서게 되고 찾아나서는 순간 그것은 더이상 행복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쾌락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시금 말하지만, 쾌락을 찾는 순간 주권을 잃게 된다. 내게는 주권 잃은 삶은 삶이 아니다.
이를 깨닫게 되면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그게 보통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덤덤히 해야할 일을 하고 이따금씩 고통을 짧은 너털웃음이나 담배 한가치로 떼울줄도 알게 된다.
나는 긍정적인 생각을 억지로 하자는 것과는 판이한 해석을 가지고 있다. 그런건 와닿지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