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관찰기.

by 언더독

Dvořák - Symphony No. 9 in E Minor, Op. 95 "From the New World": IV. Allegro con fuoco

https://youtu.be/89jOPAGJq-M?si=-jKOmUH8SYeiFOem


당장에 가진 것이 많지 않더라도, 주변에 너무나 볼품없고 비루한 사람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도와볼까하는 마음을 가지는게 사람이다.(다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말이다.)


당장에 웬만큼 가지고 있더라도, 직장일이나 사업을 하며 자신에게 발생하는 손실에 대한 책임을 다른 주체에게 넘기거나 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사람이다.(다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말이다. 나또한 그런 적이 있다.)


나는 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전자는 성선설과 합을 맞춰볼만한 것이고, 후자는 성악설과 합을 맞춰볼만한 것이다. 이 두가지가 생겨나는 원리에는 명확한 차이점이 있다. 글로 표현해보자면 '조직이 부여하는 극한값의 유뮤'이다.


심리적인 것을 표현한 것이다. '조직이 부여하는 극한값'이 주어져 있지 않으면, 인간들은 성선설의 성미를 갖게 된다. '조직이 부여하는 극한값'이 주어져 있다면, 인간은 성악설의 성미를 갖게 된다. 이것은 나의 주장이 아니라, 온전히 관찰값에서 나온 것이다. 그저 사실이라는 뜻이다.


처음 보는 어린 아이가 차에 치일 위기에 처하면, 자기 목숨도 던져가며 도로에 뛰어드는 것이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일터에서 발생하는 금전 그리고 지위에 대한 위상을 지키기위해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되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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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리학 전공자도, 교수도 아니기 때문에 학구적인 원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실제적인 현상을 관찰하고 가장 현실적으로 풀어내보는 것이 내가 잘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직이 부여하는 극한값'은 무엇에서 발생하며 어떻게 주어지는가.


조직이나 시스템의 구성원들에게는 종류와 크기가 다른 책임이 분산되어 주어진다. 각자의 책임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부품이 된 인간들이 퍼포먼스 한계치까지 떠밀리게 된다. 모든 조직과 시스템은 극강의 효율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어디 하나 나사가 풀리는 곳이 반드시 생긴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직이나 시스템의 틀을 짠 것 또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구성이 완벽하지 못하므로 책임의 소재가 겹치거나 불분명해지는 섹터들이 생긴다. 그래서 니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하는 싸움이 더더욱 심화된다. 큰 책임이 얹혀진 영역에서는 진흙탕 개싸움이 오래간 벌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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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히틀러 주축의 나치당 집권 시절의 독일에서는 국민들 서로서로를 감시하도록 하는 문화가 있었다. 당의 뜻이 국가에 반영된 것인데, 스파이나 변절자를 파악하기 위해 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요즘에도 독일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창문밖으로 남들을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북한도 별 차이가 있겠는가.)


조선시대의 노비 살이도 그렇고, 남북전쟁 전 미대륙의 흑인 노예제도 그렇다. 노예를 이끄는, 스스로도 노예인 노예장이 있었다. 그들 서로서로를 감시하게 만들고 헐뜯게 만들었다. 그래야 구성원 본인들이 살기 때문이다.


이것이 조직의 자연적인 속성이다. 있는 그대로를 관찰해보면,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렇다. 성선설보다는 성악설을 발하게 하는 환경이 조직이며 시스템인 것이다.


나는 선을 추구하고자 한다. 일단은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부터 충실히 이뤄졌으면 좋겠다. 나아가서는 그 이상까지도 바란다. 그래서 매일같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직이나 시스템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인플레이션을 이기는 개인적인 경제력을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도구는 사업이 될 수도, 투자가 될 수도 있다. 근로노동은 될 수가 없다. 숫자가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이 매거진 이름은 투자와 사업하는 29세이다.


이 글을 읽는 그대는 직장에서 일하는 것 외에는, 골머리 썩히는 일이 따로 없는 건 아닌지 물어본다. 그러하다고 한다면 당신은 성악설의 인생 항로를 유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유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은 직장에서 소비되니까.)


선을 추구해보길 바란다. 고통스럽더라도 말이다. 선을 추구한 영웅과 신들은 누구하나 빠지지 않고 고통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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