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차원을 넘나들 정도로 깊이가 깊었던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그 목적이 너무나도 허무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서 철학자들 중에 자살 충동을 느꼈던 사람이 많이 있다.
실존주의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알베르 카뮈'
그는 '시지프 신화'를 썼다. 죽을 때까지 돌덩이를 산꼭대기로 반복해서 끌어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는 내용의 책이다.
'시지프 신화'에서 해석되는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부조리에 대한 인간의 대응으로 자살 또는 종교적 회피를 거부하고, 되려 부조리를 직시하며 반항하는 태도를 강조한다. 이는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창조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나타낸다.
그는 철학에 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 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내가 '알베르 카뮈'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이 고등학생 때였을 것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처음 보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방인'을 보았던 것 같다.
처음 그를 알게 되고, 찾아보았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무슨 말을 하다가 죽은 건지.
나는 이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나랑 자세가 비슷해서 그랬다. 외면하거나 도피하는 것이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어떠한 문제가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더더욱 직시하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 정도가 자살에 이를 정도로 고통스럽다면, 그만큼 똑같이 반항해 보라는 사람이었다.
이건 순전히 나 혼자만의 생각인데.
부조리에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고 있는 밍밍하고 싱거운 사람을 무덤 속의 '알베르 카뮈'가 보게 된다면, 관뚜껑을 열고 나와 그 사람 궁둥짝을 걷어 찬다음 얼굴에 담배빵을 놓아줄 것 같다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살만한 가치를 판단하는 게 가장 처음 해봄직한 일일 것이다.
두 가지 결과가 있을 것이다. 경우의 수는 2개이다. 살만한 가치가 느껴져서 계속 살거나, 그렇지 못해서 자살하거나.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후자의 경우를 말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계속 살아볼 가치를 못 느낀다면 의미를 스스로 창조해 볼 수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순전히 개인의 의지 문제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의지를 가진 이는 없던 가치도 창조해내어 삶을 이어나간다. 의지를 가지지 못한 이는 자살한다. 또는 산 송장이 되는 수도 있겠다.
20대 초반 정도에는 사람의 '의지'라는 것을 당사자가 아닌, 남이 도와 향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막연한 생각이었다. 지금은 30대 초반이 되었다. 10년 정도의 속세 데이터가 더 쌓인 것이다.
데이터 관찰값을 보면, 사람의 의지라는 것이 본인이 아니면 아무도 향상해 줄 수도 또는 꺾을 수도 없다.
남이 해줄 일이 없는 영역이다. 그래서 괜히 기운 빼지 않는 게 현명하다.
'Let it be' 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틀스 노래처럼.
내 글을 오래 보아 왔던 사람들 중에, 내가 중간에 글을 포기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나 스스로가 아니면 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못 말리는 것이며, 앞으로도 못 말릴 것이다.
반대로, 솔직하게 말하자면, '자기 선택으로 자살을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왜 반드시 그것을 막아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다. 오래전에 계속 살아갈 가치를 정확하게 창조했으니까.
'퍼펙트 데이즈'라는 일본 영화가 있다.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수상을 받은 작품이다.(허접한 영화 안 본다.)
중년의 남성이 주인공이다. 도쿄 시청에서 주는 공공 화장실 청소부 일을 하는 독신의 남자이다.
영화를 보면, 나름대로 작은 재미들을 마련해가며 자기 삶을 이어가는 사람이다. 청소일이라 할지라도, 맡은 바 열심히 일한다. 정리정돈된 삶을 산다. 긍정적인 초반부가 이어진다.
중반 그리고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남자의 고통이 드러난다.
자신이 사회적으로 볼품이 없다고 여겨지는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열등감 그리고 좋아하는 이성에게 적극적으로 도전해보지 않았다는 자괴감이 드러난다.
마지막 장면이 예술이다. 청소 용품을 실은 봉고차 운전대를 잡고, 웃으며 우는 일그러지는 표정 연기를 한다.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가 아름답다고 느꼈을 것이지만.
나는 큰 위기감이 보였다. 저 주인공을 보고, 그런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주인공 남자는 가치 정립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의지를 가지고 고통을 진정 직시하지 않은 삶을 살아버렸기 때문이다.
왜 그 속에서도 나름대로 재미거리를 찾아버린 삶을 살아버렸냐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재미거리'는 부조리를 외면하고 그로부터 도피해버렸다는 증거물이다.
하여간 왜 울면서 웃냐는 것이다.
웃을 거면 확실하게 웃고, 울 거면 확실하게 울어야 뭔가 아귀가 제대로 맞는 것이다.
나이가 어리고 젊을수록 노선을 확실히 해야 한다. '퍼펙트 데이즈'라는 작품은, 젊은이들에게 긴급의식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아주 뛰어난 영화이다. (손 윗사람들 그리고 어른들은 절대로 젊은이들에게 젊으니까 괜찮다는 말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너무나 무책임한 행동이다.)
인과관계가 없는 바람에 흩날리는 깃털 같은 삶을 살아버리면, 대가는 반드시 돌아온다. 그 충격파가 몇 십 년의 시간차를 두고 사람 영혼을 치어버리기 때문에 당장에 그 위험성을 직시하는 이가 적을 뿐이다.
대다수가 영화를 저런 식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글을 통해서 코멘트를 남기는 것이다.
무조건 멋지고 찬란한 성공하고 윤택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아웃사이더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무조건 철학자의 삶을 살라는 것도 아니며, 속세를 끌어마시는 포식자의 삶을 살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노선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삶을 이어갈 가치가 뭔지, 어릴 때부터 확실히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가치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던지. 당연히, 추천하는 길은 아니다. 그래도 외면하거나 도피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본다.)
외면하고 도피한다고 외면되고 도피된 것이라 생각한다면, 생각보다 금방 후회하게 된다.
삶은 정말 짧기 때문이다.
'Perfect days' Last scene
https://www.youtube.com/watch?v=Bn4lxodunW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