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의 힘

생각을 쓰다

by 은지

새해가 되고 2025년을 되돌아보면서 나에게 다정함을 나눠준 모든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서 나에게 당근 대신 채찍을 주는 이가 많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부모님은 나에게 이런 채찍질을 단 한번도 하지 않으셨다. 딱히 당근을 주시는 타입도 아니였지만, 스스로 잘 자랄 수 있도록 지켜봐주시는 편이었다. 오히려 나를 채찍질한 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었다.

가장 첫 기억은 아주 어린 시절, 학습지로 처음 영어를 배울 때였다. 놀랍게도 나는 학습지를 한번도 밀린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혼이 났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사소한 실수였다. 발음이 틀렸던지, 단어가 틀렸던지. 선생님은 내게 소리쳤다.


"너 이렇게 선생님을 실망시킬거야? 너 잘해왔잖아!!"

정확한 문장을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그 소리치던 목소리만큼은 생생하다. 회사에서 돌아온 엄마가 울고 있던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나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그래? 그럼 때려치자." 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영어 학습지를 그만뒀다. 나는 그 후로 영어가 가장 싫어졌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영어는 꾸준히 하기 싫어했다. 그때 기억 때문인 건지 그냥 적성에 안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30대가 되고 나서야 영어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나는 뭘 하던 애매하게 재능을 보이는 타입이었는데 타인이 볼 때는 이게 조금만 채찍질하면 키울 수 있는 재능이라고 여겨졌던 것 같다. 하나같이


"조금만 더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욕심이 나서 그래."
라고 했다.

어쩌라고.

난 욕심 안 나는데.
심지어 부모님도 나에게 이런 욕심은 안 내는데.

그렇게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배울 때면 돌아오는 채찍질 덕분에 나는 무언가 학습할 때 나를 계속 독촉하는 사람이 되었다. 언젠가는 애매한 재능을 숨기고 잘해내고 싶어서 잠도 안 자고 몰래 공부하기도 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별나다고 생각했다. 집에서는 그렇게 안 가르쳤는데 자꾸 스스로를 괴롭히니까.

공부가 아니더라도 "너를 도와주겠다" 라는 명목하에 채찍질하는 이들은 많았다. 어느 날은 내 취향에 대해서 넌 공대생 감성이라 센스가 없다며 센스를 좀더 키워보자는 말도 들었고 어느 날은 이 악물고 쟤네들을 밟고 올라서란 말이야 라며 나에게 쉴 틈을 안 주는 사람도 만났다. 그럴 때마다 최선을 다해서 무언가를 해내기는 했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자꾸만 남의 시선을 신경 쓰고 불안해했다. 누군가의 채찍질로 성장하는 건 내 타입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런 방법이 잘 먹힐 수도 있겠지만)

20대 중반까지는 무언가를 계속 배우고 만들어나가는 시기이다 보니 그랬는지 어쨌는지 많은 이들에게 채찍질을 당했고 그만큼 나는 예민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모든 것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나를 방어하기 급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났다. 딱히 당근을 주지는 않았지만, 채찍질도 절대 하지 않았다. 내가 뭘 하든 뭘 못하든 그냥 그대로 나를 받아주었다. 그 자체가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나보다 한발 더 먼저 성장한 친구들이 내게 손 내밀었다.

울어도 된다고. 잘하고 있다고.

내가 평생 듣고 싶었던 온갖 당근을 내게 줬다. 생각할 수록 눈물이 났다. 후에 이 눈물은 녹음되어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었는데 그마저도 좋을 정도였다. (사실 몇 년 동안은 이 녹음을 수치스러워했다.)

그렇게 다정한 친구들 사이에 있다 보니 다정한 언어를 배웠다. 다정한 언어를 배우니 더 다정한 이들이 곁으로 왔다. 그들은 나를 응원해주고 나에게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줬다. 채찍질 당하며 앞으로 나아갈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지치지 않는 포션을 마신 것 같았다. 다정함의 힘이란게 이런 건가. 나도 다정함으로 무장한 포션을 마구마구 퍼주고 싶어졌다.

물론 아직 많이 서툴지만.

2025년을 되돌아보며 다정하게 대해주지 못한 친구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나에게 다정한 힘을 나눠준 친구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올해는 나도 좀 더 자주 누군가에게 다정한 힘을 건네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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