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냥씨는 지금을 돌본다>에 대한 서평
"본 만화는 지금도 자신의 일터에서 수고하시는 요양보호사님들과 나의 어머니 박 여사에게 바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전 같지 않은 몸을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주변으로부터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퇴장해야 하는 것일까. 나이 든다는 것이 사람마다 상대적일 수 있어서 정확히 규정 내리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젊었던 시절처럼 주변을 애정 있게 바라보거나 만지지 못하는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대상을 온전히 쳐다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에너지의 측면에서 예전 같지 않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오늘 독자들에게 소개할 작품 <그 냥씨는 지금을 돌본다>(2023, 투영체)도 이런 '나이 듦'에 대해 다룬다. 범위를 좁히자면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 보이려는 64세의 밝고 건강한 '냥씨(박여사)'라는 돌봄 노동자 이야기다. 노인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이 시기에 '냥씨'의 고군분투기라... 무엇인가 소중하게 다가오는데 어떤 사연을 품고 있을까?
작품에 대해서 소개하기 전에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는 64세라는 나이 자체에 대한 것이다. 주인공 냥씨는 현재 갱년기를 겪고 있는 인물이다. 갱년기는 무엇일까. 텍스트 속 냥씨의 경우에는 "사소한 일에도 몹시 짜증"(24)이 나는 일상이 펼쳐지고, 짜증을 넘어 "생전 바깥으로 뱉지 않는 욕이 나올 만큼 마음"(25)까지 여러 가지로 달라지는 일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자신을 마주하며 놀란다.
하지만 어디 마음의 영역에만 갱년기가 작동하겠는가. 생리 멈춤에 대해 "몇십 년 동안 징글징글하던 거 끝나니까 너무 시원"(33)하다고 말하거나 "이 무거운 가슴도"(37)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농담을 섞기도 한다. 냥씨의 몸은 급속도로 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일 뿐, 좋은 것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좋아 보일지 몰라도 "생리 끝나면, 호르몬 약을 먹어야 하고 다리에 힘도"(25) 빠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체가 노년기로 접어든 나이 든 사람의 경우, 신체와 마음 두 영역 모두 급속도로 퇴화하는 것이 갱년기이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인물이 노년의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의 입장이 서술되었지만, 남성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방식이든지 나이가 들면 퇴화하는 것은 여성이나 남성 모두 마찬가지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이다. 이 직업이 그녀에게 매력적이었던 것은 "하루 3시간씩 너무 무리하지 않고 일"(89)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냥씨는 떨리고 설레는 마음을 가득 품고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노력한다.
이 과정을 지켜본 만화가는 "이상하지만, 어쩐지 엄마는 학생이 된 것처럼 신나 있었다"(94)고 고백한다. 이처럼 자신의 쓸모를 인정받는 행위는 갱년기로 인해 흔들리는 존재를 일어서게 한다. 오래지 않아 냥씨는 시험에 합격하게 되고 당당히 요양보호사로 출근하게 된다. 그런데 이 일이 생각했던 것처럼 순탄하지 않다.
누구나 돌봄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 혼자가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시기는 아직 젊고 건강한 것이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을 때, 혼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들의 곁에 요양보호사가 필요한 이유다.(104)
요양보호사는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한 직업이지만, 주변의 시선은 그렇지 않다. <그 냥씨는 지금을 돌본다>에서 무게 중심을 두는 또 하나의 시선을 확인하면 명백히 알 수 있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갱년기 여성 냥씨가 겪게 되는 현장의 모습은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쓸모 있는 직업의 당위성과는 무관하게 이 텍스트에서 그려지는 무례함은 상상 이상이라는 점에서 독자들이 이 텍스트를 꼭 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이런 사연이 있다. 치매에 걸린 지금자 어르신은 냥씨의 "일이 익숙해지자, 자잘한 부탁을 하기 시작"(123)한다. 딸 생일날 잡채 만드는 일을 부탁하기도 하고, 과자봉지가 굴러다니는 아들의 방 청소를 부탁한 일, 쉽지 않은 김장 50포기를 부탁한 일, 지금자 어르신이 세놓은 원룸을 청소하는 일 등이 그렇다.
하지만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놀라운 것은 안타깝게 원룸에서 죽은 어느 한 청년의 방 청소를 부탁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성실하고 굳센 냥씨는 이런 일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며 굳건히 일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요양보양사에 대한 '당연한' 시선이었다.
냥씨가 만난 "몸 한쪽이 마비 증상이 있는"(151) 허맹순 어르신의 경우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종일 화를 내고 욕을 한다.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속옷을 벗고 돌아다니기도 한다. 허맹순 어르신의 이런 행동에 냥씨는 힘들어한다. "이해할 수 없는 정신적 노동"(155)으로 마음 편히 지낼 수 없다.
"부인을 하늘로 보낸 지 4개월"(157)이 된 달석 어르신은 마치 자신의 부인 대하듯이 냥씨에게 '여보', '당신'이라고 말하며 정신적인 조롱을 가한다. 게다가 90이 넘은 어르신과 함께 식사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점에서 냥씨의 요양보호사 일은 출발부터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할 필요가 있다. 요양보호사의 일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기보다는 지속적인 관심 속에 행정적인 일을 개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적자. 가시눈의 <그 냥씨는 지금을 돌본다>에서 가장 독특한 형식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텍스트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모두 동물로 그려진다. 중요한 것은 같은 동물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다르다'라는 성질 자체다. 만화가는 각자 다른 인물을 동물로 형상화 하는 과정에서 차이와 다름을 이야기 하고 싶었을 것이다. "가족이라도 속모양은 각자 다른 종의 동물"(65)임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런 만화적 연출을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다름'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요양보호사의 삶에 주목하게 만든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존중'과 '이해'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가시눈 만화가는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소홀하게 다뤘던 요양보호사의 삶을 고백의 형식(만화)으로 재현했다. 이 목소리가 여러 사람에게 전달된다면 소외된 노동의 결을 만질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장점으로 인해 독자들에게 자신 있게 이 텍스트를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