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로 고가니의 《해변의 스토브》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으나, 정말로 오랜만에 의미 있는 작품 하나를 만난 것 같다. 그래서 이 짧은 지면에 이 작품이 이 시대에 왜 값진 작품인지 증명하고자 한다. 물론, 이런 판단이 오판일 수 있고, 잘못된 해석일 수 있으며, 헛다리를 짚는 것일 수도 있지만, 용기 내어 근거를 달아 증명하는 것은 평론가의 의무이자 즐거운 놀이라고 판단되기에 밀고 나가기로 한다. 그 작품은 바로 최근에 출간된 오시로 고가니의 《해변의 스토브》이다. 이 텍스트가 의미 있는 텍스트라고 판단한 이유는 동시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잘 반영하고 있어서다. 동시대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시대적 흐름을 부족함 없이 응축해 표현해내고 있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동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동시대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매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숏츠(short)의 시대’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시대는 긴 서사를 원하지 않는 시대, 서론이 아닌 본론이 적극적으로 요구되는 시대, 탄탄한 기승전결을 선호하기 보다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2025)처럼 자극적이고 원초적인 ‘감각’이 우선시 되는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일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이곳의 사람들은 짧은 영상을 집게 손가락으로 빠르게 넘기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양한 숏츠를 소비한다. 광고도 리뷰도 기사도 맛집도 어려운 과학이론도, 무거운 철학적 질문도 응축되어 숏츠‘화’ 된다. 최근에 출간된 어느 책의 저자는 ‘이야기’와 ‘스토리’를 구분해 “이야기와 달리 스토리는 친밀감도, 공감도 불러내지 못한다. 이들은 결국 시각적으로 장식된 정보, 짧게 인식된 뒤에 다시 사라져 버리는 정보다. 이들은 이야기하지 않고 광고한다.”며 ‘이야기’가 아닌 자본화되고 있는 ‘스토리’의 확산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담았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부의 평자들은 철학자의 이 발언에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고 비판한다. 한마디로 말해, “지루함을 극도로 혐오하는 이 시대의 트렌드에 발맞춰 시작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어야 하고, 이야기 내내 재미를 줄 수” 있는 작품이 의미 있다고 발언한다. 이는 ‘이야기’보다 ‘스토리’에 무게를 둔 것으로 우리는 스토리 담론과 이야기 담론이 충돌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스토리 담론은 독자들에게 감각적인 면을 어필하며 독자들을 설득했고, 이야기 담론은 오랜 시간 이어오던 전통에 힘입어 ‘스토리’ 담론을 견제한다. 어느 입장이 옳고 그르건 간에 동시대는 ‘이야기’를 옹호하는 감정과 ‘스토리’를 옹호하는 감정이 거세게 충돌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과거의 유산을 전적으로 수긍하기보다는 다른 길에 해당되는 ‘스토리’의 길을 모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만화가들에게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이 자연스럽게 작품을 운용하는 영역까지 확장된다는 것이다. 만화가들은 암묵적으로 두 시선의 ‘차이’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새롭게 경작한다.
어쩌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인듯 하지만 환상이 아닌 현실에서 재배치된 세계는 한 명의 개인을 구속한다. 예를 들어 숏츠 세대의 한 만화가가 자신의 만화를 그린다고 했을 때, 그는 어떤 방식이든지 ‘시대적 습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니 탄탄한 서사가 정답이라고 요구하는 이야기의 시대에 태어난 기성 만화가와 숏츠 시대에 태어난 젊은 만화가는 만화를 재현하는 방식에서도 차이를 품게 된다. 이것은 개인의 역량이기도 하겠지만, 시대의 무의식과 밀접하게 관련있다. 물론, 모든 만화가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기술로 인한 시대의 무의식은 예술가의 몸을 새롭게 재구성한다. 시대의 무의식으로 이뤄진 세계관은 숨을 쉬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영향은 지극히 필연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미 많은 작품들이 숏츠 시대의 특징을 자신의 작품에 반영했다고 확신한다. 분명히 누군가는 일정부분 성공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감각을 익히지 못해 처참히 실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실험으로 그치는 경향이 적지 않다. 또한 시대적인 특징을 잘 반영해 어느 정도 가치를 획득할 수 있겠지만, 이 결과물을 무작정 좋은 작품이라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한마디로 말해, 형식은 숏츠이나 내용을 잘 담아내지 못해 작품이 안 되는 것들이 이에 속한다. 아무리 숏츠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작품이 안되면, 시대적인 특징과 장점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중세시대이건, 근대시대이건, 현대시대이건, 작품이 받쳐 주어야 시대적인 특징도 보관 잘 된 미라처럼 부패하지 않고 오래간다.
이런 맥락에서 젊은 여성 만화가 오시로 고가니의 《해변의 스토브》는 시대적인 특징은 물론, 이야기의 영역까지 완벽하게 새로운 그릇에 담아낸 작품이라고 판단된다. 누군가에게는 아쉬운 점도 있겠지만, 내겐 어느 것 하나 감동적이지 않은 작품이 없었다. 텍스트에 수록된 〈해변의 스토브〉, 〈설녀의 여름〉, 〈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 〈눈을 껴안다〉, 〈바다 밑바닥에서〉, 〈눈 내린 마을〉, 〈소중한 일〉은 탄탄한 이야기와 내용으로 하고 싶은 말을 가벼운 형식 체제 안에서 진중하게 풀어낸다. 무엇보다도 일본 문학의 한 장르인 ‘하이쿠’ 형식을 적절히 반영한 것도 숏츠 시대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단편이 끝날 때 10~15글자로 요약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만화를 넘어 문학의 영역에서 잡아낼 수 있는 언어의 맛까지도 느끼게 해준다. 이는 다른 장르가 융합되는 시대의 특징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세계관을 운용하는 방식도 숏츠의 시대적 흐름과 유사하지만 밍밍하지 않게 내용을 채운다.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의 형식을 가져와 만화가가 하고 싶은 말을 훌륭하게 해낸다. 가령, 공포의 대상이 되어 오래도록 자신(설녀)을 잊지 못하게 만드는 설정부터, 교통사고로 투명인간이 된 남편의 이야기, 말하는 스토브가 인간 연애에 개입한다는 설정까지 만화가는 조금은 엉뚱한 상상을 끌어오지만, 이 엉뚱함이 엉뚱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만화가가 끌고 가는 이야기의 소재와 형식이 조화롭게 이뤄지고 있어서다. 무엇보다도 이런 설정을 통해 만화가는 인간의 진실에 조금은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당신의 사랑이 왜 미숙했는지, 당신이 정말로 사랑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좋아하는 일을 즐기며 노동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무게감 있게 질문한다. 어떻게 보면 오시로 고가니의 만화는 낭만적 정신이 진득하게 뭍어 나오는 만화라고도 부를 수 있다. ‘이곳’의 불가능으로 인해 주저앉기보다는 조금은 더 나은 ‘저곳’의 가능성을 셈하고 있어서다.
지금까지 숏츠의 시대적인 특징인, 짧은 서사, 응축, 요약, 간편, 편리, 등의 개념을 오시로 고가니는 단편 만화에 가볍지 않은 방식으로 진중하게 끌어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시대의 ‘형식’을 성공적으로 ‘내용’과 융합한 텍스트라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오시로 고가니의 작품을 통해 이를 증명해보고자 한다. 순서는 ‘회전된 내재적 정치성’, ‘회전된 창작의 문법’, ‘회전하는 타이밍과 앞으로의 전망’이다.
1. 회전된 내재적 정치성
정치적인 것은 무엇일까. 정치적인 만화는 무엇일까. 우리 만화계에서 정치적인 만화는 많이 있어왔다. 한국현대사의 가슴 아픈 부조리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만화의 형식으로 기록한 작품이 적지 않다. 물론, 이 작업은 소수의 만화가들에 의해서 작업된 면이 없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이 소수의 만화가들에 의해서 잊지 않고 기억된다는 점에서 만화의 ‘정치성’을 감각할 수 있어서 다행인 면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지극히 ‘리얼리즘’적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대에 ‘리얼리즘’이라는 용어가 상당히 난해하고, 왜곡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이 용어를 정의내리는 것이 쉽지 않지만, 적어도 한국만화에서의 정치성은 ‘투명’한 방식으로 재생되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니까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을 많은 만화가들이 선택한 것이다. 물론, 만화가의 개별적인 감각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치열하게 반영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고, 이들이 한국현대사의 상흔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느껴야 했던 고통의 과정을 가볍게 치부할 수 없음을 백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에 대한 표현 앞에서 선택한 방법이 ‘투명’한 방식이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가령, 홈통만화연구실에서 기획된 4호 ‘국가폭력’에 다뤄진 20편 이상의 작품만 하더라도 이런 경향을 피해갈 수 없다. 동일한 표현방법을 지닌 작품은 단 한편도 없지만, 재현해 내는 스타일이라든지 경향성은 한 곳에 머물러 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시대의 상흔이나 사회의 부조리를 다루는데 있어서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을뿐더러, 창작의 대상이 되는 존재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왜곡되지 않게 재현하는 방법이 효과적일 수 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이와 같은 작품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의 사명을 다하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사회구조가 바뀌기 시작했다. 거칠게 말할 수밖에 없겠지만, 2000년대에 진입하게 되는 과정에서 커다란 담론에 해당되는 ‘우리’나 ‘민족’, ‘국가’와 같은 담론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국경이 흐려졌을 뿐만 아니라 세계화되는 과정에서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야기와 자본주의‘화’로 짓눌린 인간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에 발맞추어 정치적인 것에 대한 대상 역시도 내재적 자율성이 응축된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개별성과 보편성을 품고 있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슬로건이 이 시대를 감염시키게 된다. 이런 자장(磁場)에서 다양한 영역의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통해 숨겨진 사회의 통증을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스마트폰의 개발과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어떤 스토리나 이야기 역시 ‘기술’이라는 ‘시대적 무의식’에 젖어 창작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정치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시대의 첨단 ‘기술’의 세례를 받은 젊은 만화가들은 과거의 방식처럼 ‘정치적인 것’을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방식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국내에는 박인주의 〈날개암〉(2025)과 조성환의 〈스몰 프레임〉(2025) 등이 있지만, 이 글에서 다뤄지고 있는 오시로 고가니의 단편 〈눈을 껴안다〉와 〈소중한 일〉은 이들 작품보다 더 시대적이다.
〈눈을 껴안다〉는 정치적인 메시지가 표면에 단 한글자도 드러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분명히 많이 드러나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를 극한으로 끌어 올리는 과정에서 정치색이 드러날 뿐 표면적으로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 텍스트의 주인공 히노 와카바는 병원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며 삶을 살아간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임신 소식에 눈물을 흘려주는 착하고 성실한 남편이 있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 그녀에게는 아무런 고민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임신을 한다는 것은 여성에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이기도 하지만 아이를 갖게 됨으로써 포기해야 할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히노 와카바는 “내 몸이 나 혼자만의 것이었던 때가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라고 고백하며 임신 사실에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단 한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온 적이 없었음을 확인한다. 만화에서 이 장면은 피사체를 가까이 끌어당기는 형태로 그녀의 불안을 온전히 잡아낸다. “부모님이나 남편, 손님같이 스쳐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들이 당연한 얼굴로 내 몸에 간섭”했었기에 아이를 갖게 되면 또 다시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은 그래서 합리적이다. 이 텍스트의 또 다른 주인공 하라 고코는 예쁜 외모와 당당한 태도로 ‘멋진 여성’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고충이 있다. “고등학생 때 곧잘 치한을” 만나 곤혹을 치렀다. 만화는 이러한 감정선을 눈(雪)을 굴리는 행위나 거울 앞에 선 자신을 타자화함으로써 감정을 세분화하고, 도시가 미사일에 폭격받는 장면을 성추행 행위로 비유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당신의 삶은 어떠한지 묻는다. 하지만 이 텍스트는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단계에서 매듭되지 않는다. 여기서 매듭이 되었다면 부조리를 고발하는 일반 텍스트와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만화는 생리적이거나 사회적인 요인으로 인해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두 여성이 폭설로 인해 ‘목욕탕’을 찾아가는 행위를 통해 정치적인 것을 논한다. 이 공간은 단순한 목욕탕이 아니다. “아가씨도, 아줌마도, 한 명 한 명 모두가 가지각색의 몸을 하고 간섭하지도 간섭당하지도 않고 유유자적” 탕을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은 소외된 존재들이 마음 편히 쉴수 있는 이 세상의 유일한 공간이다. 이런 설정은 성소수자들이 살아가는 틸리 윌든의 〈햇살을 타고〉(2020)의 우주선과도 무관하지 않다. 목욕탕에서 편히 쉬는 두 여성은 이 만화에서 칸을 횡단해 전면적으로 배치되는데, 이는 시공간을 초월해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만화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 이 작품은 이런 방식으로 소외된 존재에게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현재 안전하지 못하니, 당장이라도 숨쉴 수 있는 공간이 이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의도는 여성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이 사회에 가장자리에 놓인 존재를 현재로 소환한다. 최근에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우크라이나 난민인 한 여성이 버스 안에서 흑인에게 피살된 사건이 있다. 이 장면은 CCTV에 녹화되어 숏츠의 형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시청되었다. 여성이 이 사회에 약자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무차별적인 폭력이나 가부장적인 사회적 관성에서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오시로 고가니는 이 사실을 짧은 단편에 시시각각 바뀌는 칸과 칸의 회전으로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칸만을 운영해 담아냈다. 만화가는 이 만화에서 “다, 다, 다, 다, 다…알몸을 껴안고 거리를 질주하는 여자들”이라고 표현하며 만화의 끝을 장식한다. 여기서 알몸으로 껴안는 행위는 ‘연대’를 의미한다.
정치적인 영역과 관련된 그의 또 다른 작품 〈소중한 일〉은 만화책으로 10쪽 밖에 안 되며, 36칸으로 운영되는 아주 짧은 텍스트이다. 이 텍스트에서는 회사에서 노동하며 살아가는 한 청년의 삶이 그려진다. 그녀가 하는 일은 “아침 열시부터 밤 열시까지 종일 엔터 키를” 누르는 일이다. 사무직으로 일하며 결제를 담당하거나,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다. 주인공은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 일을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의 삶은 고달프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를 가던 중 바닥에 반사된 빛을 보면서 그곳으로 발을 옮긴다. 빛의 터널을 통해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다고 꿈꾸어 본 것이다. 지루한 회사 생활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을 이 행위에 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일하는 사무실에서 반사된 햇살을 들이키는 순간, 생각을 고쳐먹는다. “익숙한 사무실. 거지같은 상사. 거지같은 엔터 키. 그런데 예뻐 보여”라고 말하면서 부정의 감정을 희석시켜 버리는 빛에 매료당하기 때문이다. 이 경험 이후 그녀는 직장을 그만두고 “석양이 비쳐지지 않는 사무실에 빛을 닿게 하는 일”을 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무실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회상의 형식으로 제시되고, 지금, 이곳의 시간은 현실로 재현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주인공은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꿈을 찾아 용기내어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빛’은 이 텍스트에서 주인공의 감정을 좌지우지 하는 역할로 작동하는데, 함께 일하는 상사나 동료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하기 보다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보통의 삶을 감싸 안는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경험의 재현은 동시대의 젊은 세대들에게 ‘노동’함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런 부드러운 방식이 이 시대의 새로운 정치색이지 않을까. 한 개인의 삶을 바꾸는 방식도 이렇게 기성과는 다른 것이다. 흔히 우리는 정치적인 것을 ‘낭만적 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낭만적인 것’은 사랑과는 거리가 있다. ‘이곳’에서의 불가능을 ‘저곳’에서 가능하다고 믿는 체계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다. 그러니 이 작품은 가벼운 소품이라고 할지라도 짙은 정치색을 지녔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회전된 창작의 문법
오랜 시간 창작의 근원은 결핍에서 출발하였다. 무엇인가를 창작한다는 것은 독자들을 위한 것과,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끌어낸다는 것은 결핍에서 피어 오른다. 내가 서 있는 이곳에 대한 ‘불안’이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저곳’에 손이 닿지 못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부지런히 꿈꾸는 것이다. 마블의 한 캐릭터 탁터스트레인져처럼 시간을 돌리는 것이다. 이 마음은 이곳의 폭력적인 사회에 대한 저항일 수 있고, 개인적인 억압에 대한 거부일 수 있고, 사회적이거나 개인적인 폭력이 아닌 무기력이라는 공포를 벗어나기 위한 것도 있다. 예를들어 아폴리트의 〈지중해의 끝, 파랑〉(2025)은 난민의 절규를 담아내기 위해 창작되었고, 현홍아선의 〈그곳에서〉(2025)는 외롭고 높고 쓸쓸히 살아가야 했던 어느 한 제주도 해녀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창작되었다. 이소베와 백종민의 〈살아만줘요〉(2024) 역시 가정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반디의 삶을 응원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마영신의 〈락이〉(2025)는 예술가의 소외에 대해서 다룬다. 이처럼 가장자리에 놓인 존재의 ‘불안’과 ‘결핍’은 창작의 밑거름이 된다.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들에서 우리는 ‘결핍’과 ‘소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오시로 고가니의 단편 〈바다 밑바닥〉에서는 꼭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결핍에 의해서 피어오르는 ‘흔적’에 대해 노래하기보다는 안정적인 ‘결핍(?)’이 창작의 동력이 된다고 말한다. 이 목소리는 과거의 패러다임을 공식적으로 뒤바꾸는 것이기도 해서 주목을 요한다. 이 목소리가 우연일지라도 동시대의 젊은 작가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이 감각은 보편의 성질을 품는다.
〈바다 밑바닥〉의 주인공 모모는 직장인이다. 모모에게는 두 명의 친구가 있다. 시인인 가스밍과 소설가인 이이피가 그들이다. 이들은 예술가 그룹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모모 역시 과거에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세 명의 친구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열심히 삶을 살아내지만, 창작에 있어서는 균형이 맞지 않는다. 가스밍과 이이피는 경제적으로 어려울수 있지만 자신의 작업을 묵묵히 해내는 긍지있는 예술가들로 묘사되고, 모모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타협한 인물로 그려지니 그렇다. 이런 현실 속에서 모모는 괴로워한다. 현실적으로 먹고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고백하는 친구들에게 전적으로 위로를 보내기보다는, “너희에겐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도 남는 재능과 사람들과 다른 길을 갈 용기”가 있다며 친구들을 오히려 선망한다. 모모는 그 누구보다도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스스로 예술적 재능이 없다고 믿기에 이런 시기심이 분출된 것이다. 모모는 회사 생활하며 안정적으로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모모에겐 이 안정이 부끄럽다. 예술가로서 온전히 서 있지 못하는 것이 괴롭다. 모모에겐 글을 쓰지 않아도 행복하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결핍이 된다. 중요한 것은 만화가가 이 괴로움을 형식적으로 훌륭하게 연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단편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현실에서 괴로워하는 모모의 장면이 연출될 때면 영락없이 물밑에서 유영(游泳)하는 모모가 그려진다. 아니다. ‘유영’은 잘못되었다. 물고기처럼 바닷속을 힘차게 유영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외롭고 고독하게 바닷속을 힙겹게 걷는다. 바다속에서 자유롭게 물고기는 유영할 수 있지만, 인간인 모모는 물속에서 몸도 마음도 불편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그에게는 물갈퀴도 지느러미도 힘찬 꼬리도 없다. 이런 답답함이 만화의 형식으로 연출됨으로써 독자들에게 모모가 느껴야 했던 심리적 압박을 대신 전달해 준다. 하지만 모모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남편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선다. 그는 매슬로(Abraham Maslo)의 다섯 단계 욕구이론을 모모에게 이야기해줌으로써 모모가 서 있는 위치가 자연스럽다고 위로한다. 피라미드로 구성된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사회적 욕구, 존경 욕구가 채워지면 마지막으로 ‘자아실현의 욕구’를 원한다는 것이다. 모모의 친구들에게 “집필은 먹고사는 문제라 피라미드의 아래, 토대”에 해당되니, 생리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모는 이제야 회사원의 신분으로 생리적 욕구를 충족했으니 역설적으로 지금이야말로 자아실현에 해당되는 소설 쓰기를 할 때라는 것이다. 논리적인 이 말을 듣고 모모는 순간 멈칫한다. 세상이 갑자기 다르게 감각된다. 불과 몇분전까지만 해도 다른 세계관에 놓여 있었지만, 이제는 새로운 세계관에 놓여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모모의 재능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자체 였던 것이다. 이 예술적 사건 이후 만화가는 물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모의 모습을 연출한다. 똑같은 모모였지만 모모의 위치가 창작자로 변모되는 순간을 수면 위로 올라오는 장면으로 연출해 독자들에게 다른 미래를 만져보게 한다.
이 장면이 중요한 것은 만화적인 형식의 상쾌함도 있지만, 내용적인 면에서도 전복을 꾀하고 있어서다. 예술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지점이 ‘결핍’의 소산이라는 입장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언경이 원안을 제공하고 마영신이 만화를 그린 텍스트 <호도>(2024)에서 비춰지는 예술가의 모습은 지독하게 고통스럽다. 임신중지와 폭력에 허우적 거리는 호도의 삶은 결핍에서 피어오르는 상처로 인해 창작이 유지된다. “지독히 괴롭고 열악한 상황에서 그림이 더 잘 나왔던 거 같다”는 분노와 증오의 창작적 열망이 오히려 빛을 발한다. 물론, 이런 창작의 원동력도 무시할 수 없는 예술의 영역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감각이 예술 전반을 옹호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오시로 고가니의 〈바다 밑바닥〉으로 문제제기하는 것이다. 만화가는 얼마든지 소소한 일상의 재현과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예술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시인인 가스밍과 소설가 이이피가 결핍속에서 이뤄낸 창작물을 부정하기 보다는 이들과는 다른 또 다른 지점의 예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연을 만화가는 잘 표현된 ‘형식’적 연출과 ‘내용’으로 성공적으로 연출했다. 이와 같은 입장을 만화가는 하이쿠의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평범하고 재밌는 인생, 오늘은 돌고래가 물위로 끌어 올려준 것 같은 날”이라고 말이다. 평범한 예술가가 등장하는 동시대의 풍경을 이 만화는 온전히 잡아낸다.
3. 회전하는 타이밍과 미래의 전망
단편 만화는 이야기 속의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하나의 건축물 같다. 장편 웹툰은 긴 호흡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끌어가는 과정에서 당대의 사건 사고를 적절히 잘 담아낸다. 2017년 연재를 시작해 최근에서야 연재를 끝마친 라마 작가의 웹툰 〈내일〉에서는 동시대에 뜨거운 담론이었던 동물, 성소수자, 성폭력, 무차별적인 악플, 학폭, 외모, 임산부, 성노동자, 독고노인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텍스트의 세계에 편입시킨다. 작품에 이러한 개입이 가능한 것은 ‘장편’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틀’에 필요한 소재를 현재에서 채워야 수월할 뿐만 아니라, 가독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10년 정도의 긴 시간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장편 웹툰은 소재나 형식에 있어 자유롭다. 반면에 단편 텍스트는 조금은 다르다. 단편은 짧은 형식에 내용을 담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형식도 형식이거니와 내용 역시도 치밀하게 계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설프게 운영할 시 내용 자체도 내용을 담아내는 형식도 심각하게 흔들린다. 그러니 단편의 가장 큰 장점은 잘 짜인 형식에 걸맞은 내용의 반영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도 조금은 바뀌어 가는 것이 이곳의 흐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탄탄하게 잘 짜인 형식과 내용이 ‘단편’에 적합한 것이라는 ‘잣대’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단편도 이제는 유쾌하게 창작될 수 있고, 오히려 이런 ‘유쾌함’에 머물러 있는 가벼움을 단단한 내용과 연결 시킬 수 있는 것이 재능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오시로 고가니의 단편 〈눈 내리는 마을〉, 〈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 〈설녀이야기〉, 〈해변의 스토브〉에서 보았다.
이 네 편의 단편은 ‘죽음’과 ‘사랑’과 ‘기억’에 대해 다룬다. 만화가는 이런 진중한 이야기를 끌어가는 과정에서 곡예를 넘듯 이야기를 ‘회전’시킨다. 단편모음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작품을 예로 들자면 스미오와 엣짱이 우연히 만나게 된 후, 연애하게 된 지금 이 순간을 표현하려 했을 때도, 서사를 살려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급하게 회전해 시공간을 이동시킨다. 이러한 연출은 사랑했던 이들이 헤어질 때도 마찬가지다.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화책 밖으로 확장되는 정적이면서도 농도(난로의 빛) 짙은 과장된 4칸 만화 연출로 급작스럽게 스미오와 엣짱을 이별시킨다. 중요한 것은 이 연출에는 호소력이 있다는 점이다. 이럴 때 일부의 독자들은 실망할 수 있으나, 오시로 고가니의 자연스러운 연출로 인해 어색해하지 않다. 짧고 요긴한 것만을 취하는 숏츠 시대의 형식을 온전히 내용으로 승화시킨 덕분이다. “투룸에서 시작되었다가 끝난, 관객은 스토브뿐이었던 영화”라고 의도적으로 명명할 때, 짧은 하이쿠 형식의 이 문장이 온전히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은 짧은 단편과 애틋한 내용에 불만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급격한 ‘회전’은 다른 단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설녀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눈을 다스리는 요괴’와 한 청년의 만남은 그 어떤 ‘계기’로 인해 만남이 성사되지 않는다. 갑작스럽고 ‘우연적’으로 이뤄진다. 만화는 이런 우연을 변증법적으로 부딪치면서 형식을 끌고 나간다.
배경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설녀는 청년과 만나서 그를 겁주고 위협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자신이 공포스런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위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이다. 내용만 놓고 보면 굉장히 공포스러운 내용인데, 이 요괴의 캐릭터나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설녀와 청년 사이에 경계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이들은 사이좋게 차를 타고 이동하고 대화를 이어나간다. 끝내는 서로 친구가 되고, 설녀가 품은 인간을 향한 두려움을 떨쳐 내주기 위해 청년은 여러 곳을 함께 돌아다니며 설녀를 돌본다. 이런 내용을 끌고 가는 과정에서 형식과 내용은 유기적으로 만나 계속해서 ‘회전’하는 형태가 이 만화가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칸의 리듬과 내용은 짧아지지만 주관적인 서사는 길어진다. 숏츠 시대의 특징을 잘 담아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만화의 시대적 흐름이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숏츠 시대에 가장 적합한 형식인 단편만화 모음집 작가 오시로 고가니 작품에 대해 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무엇보다도 웹툰에서는 이러한 효과가 너무나 흔한 것일수도 있겠지만, 만화책에서 그것도 성공적으로 ‘형식’과 ‘내용’ 모두를 설득시킨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아가 국내의 만화작가가 아닌, 일본 문화에서 재생된 이 만화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정책적인 측면에서 한국만화의 고질적인 문제인 ‘산업화’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은 만화가들도 많겠지만,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목적으로 재생된 만화가 젊은 만화가들에게 꿈이나 잣대가 된다면, 한국 만화에서는 오시로 고가니 같은 젊은 감각을 소유한 만화가는 출현하지 않을 것 같다. 모국 문화의 장점은 물론, 숏츠 시대의 형식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는 탄탄한 만화가는 출현하기 힘들 것 같다.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스템이 가진 문법은 고착화 될 것이고 이 시스템에 익숙한 사고체계도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닐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의 잣대가 아니라, 자본의 ‘잣대’를 잠시 미뤄두고 진지하게 ‘이야기(내용)’와 ‘표현(형식)’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이다. 만화생태계와 젊은 만화가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과감히 교과 커리큘럼을 바꿀 필요도 있다. 그 방향이 어디인지 확실치 않으나, 만화인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이 글은 이웃 나라의 작품 《해변의 스토브》을 통해 한국만화가 아직 가보지 않은 이곳의 가능성을 진단했다. 만화는 그 무엇도 꿈꿀 수 있다. 만화가 꿈꾸는 낭만 정신은 단단한 정형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