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종필 Mar 13. 2021

굶주린 약속의 말

신동옥 시인의신작시에대한 단상





신동옥  2001년《시와 반시》로 등단. 시집 『밤이 계속될 거야』 시론집 『기억해 봐, 마지막으로 시인이었던 것이 언제였는지』 외 다수. 노작문학상, 김현문학패 등 수상.






열 오른 아이 이마에 얹히는 뿔시금치 이파리     

 

뭉치지 않는 흙을 줄게

독을 풀어놓은 비를 내릴게    

 

가장 여린 싹도 꿰뚫지 못하는 

맑은 빛살을 나누자 아이야     


새처럼 허공에 뿌리내리고 새파랗게

겨울을 건너는 실파 대파 섬초 줄기     


얼음을 베고 왕겨를 이불 삼아 잠들었다가

봄이 오면     


흥건한 면수건 위에 받아놓고 보는

자주감자 속씨     


자주감자 꽃피면

자주감자 꽃피면  

    

꽁지깃 하얀 제비 울음에 

겨울 가고 여름이려나 여름이려나 아이야


                                                                                               「작은 농부」전문 







  미역을 뜯어 먹고 고기를 발라 먹고 이마에 재를 바르고 더러운 얼굴을 하고 누더기를 걸치고 맨발로 걸어 맨발로 걸어 갈라진 발바닥을 뻘밭에 묻고 보는 달     


  검은 수레가 달리는 물길을 따라 끝없이 갈라지는 방죽길을 탱자나무 울타리 그 너머 배밭 가시에 꽂힌 배꽃을 홅아 먹는 사슴이 한 마리 날름거리는 달빛 부서지는 얕은 파도     


  그 끄트머리 하얗게 떠는 냉이꽃 이파리가 다시 한 잎 살아 있어 굶주린 약속의 말들을 눌러 재운 혓바닥 아래 달아오르는 돌멩이가 한 알 갈라진 혓바닥을 깨물고 보는   

  

  朔, 바다는 멀어 사슴이 울고 사슴이 울도록 바다는 멀어 하얗게 세어가는 눈썹을 세다 선 채로 잠드는 밤 탱자나무 가시에 찔려 파르르 떠는 네 눈썹을 세다 선 채로 잠든 달


                                                                        

                                                                                                    「그믐」 전문 






  화가 난 양은 소년을 떠났다 풀밭을 난장판으로 헤집어놓고 울타리를 넘어갔다 바위틈에 숨은 늑대를 찾아내 배를 가르고 돌을 채웠다     


  늑대는 양을 피해 숲을 떠났다 억새가 누렇게 익은 언덕 여기저기 늑대가 기어다닌다 귀 기울이면 어딘가 맑은 강이 흐르고 조약돌이 구르는 소리     


  이제 소년은 늑대를 지킨다 느티나무에 기대 잠든 소년은 꿈에 울타리를 뛰어넘는 성난 양을 센다 언덕 아래서 보면 늑대는 꿈이었고 양은 진실이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선택은 늘 아무것도 아닌 사실과 보잘것없는 꿈 사이에 있었다 양 세 마리 양 네 마리 사실에 속는 것보다 꿈에 속는 게 나은 법, 양 떼가 돌아온다.



                                                                                  

                                                                                                    「늑대치기 소년」 전문 




나는 작은 눈송이를 꿈꾸었다 구름 속에서 파도가 치던 밤 나는 내리는 눈송이로 다시 태어났다 서귀포 섶섬 너울 아래 엎드린 바다거북이 등짝에 올라타고     


  다도해 섬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서 고흥반도에 상륙했다 거기서부터 팔영산 자락을 돌아 걸어서 집으로 갔다 내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나보다 먼저 고향 집 지붕에 닿아 녹아내리도록     


  대한 경칩 다 지난 즈음 동백도 지고 문드러진 봄눈이 되어 되도록 천천히 나도 모를 꿈결에 영영 버려진 고아처럼 지친 발걸음으로 고향 집 대문을 두드려보다가     


  하늘이 운명을 결정한다면 이제는 우리 스스로 이 땅 위에 하늘을 내려야 한다시던 토정 이지함 선생 수염이 젖어가는 만세력 겉장 위에서 까무룩 반짝이다가     


  우글거리며 몰려오고 몰려가는 봄빛에 몸을 숨겼다 나는 살아 있었고 아주 작은 눈송이였다 아지랑이 춤추는 봄날 마당귀 잠든 강아지 눈썹에 내려앉았다가 


                                                                                                            「봄눈」전문 





이마를 만져봐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말해줘

눈을 감았다 뜨며 그는 말했다 그는 눈알이 네 개인데

눈동자가 유난히 커서 사람들은 그의 눈이 두 개인 줄 알았다

그는 시계방향으로 눈을 감았다 뜨며 잠을 잤고

눈꺼풀 하나를 닫을 때마다 새로운 꿈을 꿨다     


오른쪽 아래 눈꺼풀 안쪽에서 하늘이라는 글자가 태어났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진 땅에 씨앗을 뿌리고 물을 길어다 붓던 여인이

타버린 보리 이삭을 움켜쥐고 울며 올려다보는 하늘이었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꿈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는

새로 열린 하늘 아래 나란히 서서 아내로 맞이했다     


다음 날 그의 꿈은 콧등을 넘어 왼쪽 아래 눈동자로 옮겨갔다

새들이 부리를 닦는 파도에 불이 붙는 꿈이었다 사나운 기세로

불꽃을 날름거리는 파도가 온 땅을 집어삼켰다 그렇게 

갈라진 대지가 아물고 촉촉이 젖은 밭두둑에 새들이 발자국을 남겼다

그는 새들이 남긴 발자국을 이어서 땅이라는 글자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하늘과 땅 사이에 아내와 나란히 앉은 그는

눈꺼풀을 차례로 감았다 뜨면서 눈썹 끝에 반짝이다 사라지는

별빛을 헤아렸다 날이 밝기 전까지 세상은 아직 아름다운 것들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늘과 땅을 가득 메운 빛 무더기 속에서

사람이라는 두 글자를 보았다     


그렇게 스무여드레가 지났다 기록에 따르면 

그날은 천지가 감동해서 오색 곡식이 쏟아졌고 그가 꿈꾸는 밤이면

밤새도록 귀신이 울었다 사람들은 그가 만든 글자로 노래를 지어 불렀다

노래의 문제는 대개 사랑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꿈속에는 이제 아무도 살지 않지만 누구나 

상대의 눈썹 끝에 맺혔다 바스러지는 글자 하나쯤은 읽을 수 있었다


                                                                                              「어리고 어엿븐」 전문  





온순한 새와 달팽이를 노래하는 꽃망울에 대해 쓰렸는데

줄곧 비밀과 허방에 대해 썼다.

역시 가장 좋은 시는 아직 쓰지 않은 시      


여태껏 내가 지은 빈집에 들어앉아 곱은 손을 녹여 가며

밤새워 뒤척이는 여린 것들 손을 잡고 조용히 미쳐 가는 

이제는 저 행간보다 내 마당이 따뜻해 보인다.     


그러니 꿈꾸지 마라, 다른 세상은 없다. 

이파리에 아가리를 숨기고 날개에 꼬리를 물고

나비는 빛 속에서 태어나고 뱀은 그 빛을 되삼킨다.


<신동옥, 「시작노트」, 『밤이 계속될 거야』, 민음사, 2019, 37쪽.> 




새로운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것은 회전(回轉)시켜 줄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우리는 이것을 시적인 사건으로 간주한다. 특정한 대상이 뿜어내는 열기로 인해 내 몸이 멈추게 되는 순간 감각은 이성 위에 놓인다. 누군가는 이 경험을 ‘전율’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걷던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의 만남이 매번 우주적인 충돌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산을 오르는 등산객에게는 산을 오를 때마다 다르게 감각되는 날씨의 변화가 시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눈이 내리거나 비가 떨어지거나 안개가 끼는 현상과 마주하게 될 때, 잠시 멈춰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는 것은 풍경이 아름다운 이유도 있겠지만 내 몸속의 일부가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걷던 길을 멈추게 해 주었으니 그에게 새로움은 매번 바뀌는 날씨의 이치(理致)다. 그것이 그에게 시(詩)다. 그렇다면 시선을 돌려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시적인 사건은 무엇일까. 가장 흔한 경험은 독특한 작품을 만나 내가 품고 있던 편견을 회전할 때다. 이 사건은 외부이든 내부이든 우리를 더 멀리 보게 한다. 하지만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정해진 코드로 해석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상식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것’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앞선 논의를 중심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시인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새로운 감각으로 타격을 줄 때와 시인 스스로 내 안에 있는 ‘나’를 딛고 일어날 때가 그것이다. 두 경우 모두 공통점은 회전이다. 이들 모두 타격을 준다는 점에서 동일하나 사건을 일으키는 장소가 외부와 내부로 나뉜다는 점에서 다르다. 능동과 수동이라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 우리 문학사에서 매번 소란스러운 형태로 발견되었다.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작품을 생각한다면 당대의 호평과 혹평의 기준과는 상관없이 사후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에 기록자들은 흥분된 상태에서 ‘사(史)’를 기록했다. 두 번째는 존재론적인 사건과 관련이 있다. 한 작가가 자신의 벽을 스스로 넘어설 때가 그것이다. ‘나’의 모순과 부조리를 스스로 성찰해 새로운 ‘나’로 이끄는 이 움직임은 전자에 비해 화려하진 않지만 ‘나’에게는 특별하다. 타격의 강도도 전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잔잔하지만 타인이 보기에 잔잔한 것일 뿐, 사건을 받아들이는 ‘나’에게는 혁명이니 ‘잔잔함’은 잔잔함이 아니다. 후자의 회전은 사람들에게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하기도 한다. 회전에 성공한 소수의 몇몇 문인들만이 기록으로 남을 뿐, ‘변모 과정 연구’라는 제목으로 쓸쓸하게 퇴장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러한 씁쓸함은 걱정할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의 역사를 답습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사랑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문학의 역할이지 않겠는가. 이 사건이야말로 문학이 우리 곁에 있어야 하는 이유이지 않겠는가. 이 지면에서 다루고 있는 신동옥 시인은 후자에 속한다. 그는 자신을 선회(旋回)했다.      


그가 최근에 출간한 시집 『밤이 계속될 거야』에는 친절한 「시작노트」 한편이 놓여 있다. 이 노트에서 시인은 새롭게 출간된 시집을 방점(傍點)으로, 시 쓰는 주체의 ‘전’과 ‘후’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정서의 관성이 지속적으로 물결치겠지만 적어도 시인은 새롭게 규정하고자 한다. 물론, 시인의 의도가 작품에 온전히 반영되리라는 믿음은 어리석다. 의도는 의도일 뿐이다. 우리가 의도를 헤아리는 것은 “의도와 해석의 지평선 사이에 긴장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는 이 시집 이후, 자신의 해왔던 작업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상을 쳐다볼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이 노트에서 “줄곧 비밀과 허방에 대해 썼다./ 역시 가장 좋은 시는 아직 쓰지 않은 시”라며 미래를 기대한다. “이제는 저 행간보다 내 마당이 더 따뜻해 보인다.”라고 언급하면서 온기에 손을 뻗친다. “그러니 꿈꾸지 마라, 다른 세상은 없다.”라고 말하면서 꿈과 이곳의 가능성을 확신한다. 그는 이제 ‘비밀’과 ‘허방’을 밀어내고 아직 쓰이지 않은 시를 쓸 예정이고 이곳과는 아주 먼 곳인 ‘저 행간’에 희망을 걸기보다는 나의 마당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도’ 주변을 걷고자 한다. 자신 스스로도 ‘저’ 곳이 아닌 이곳에 더 많은 힘을 쏟을 생각이다. “이제는” 달라지려고 한다. 그러니 그의 바람이 원인이 되어 어떤 방식이든지 시에 침투할 것임을 예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시인의 의도가 얼마만큼 독자들에게 효과적인 형태로 드러났는지, 독자들은 이 흔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 지점에 대해서 논해야 할 것이다. 바람만으로 예술을 규정할 수는 없다. 마음으로 무엇을 만들지 못하겠는가. SF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음은 우주를 만들고 시공간을 허문다. <소올(Soul)>의 주인공들처럼 해맑게 죽고 해맑게 부활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 이 온기와 밀접하게 관련 있는 작품은 「봄눈」과 「작은 농부」이다. ‘―줄게’, ‘―내릴게’, ‘―나누자’, ‘―아이야’가 빈번히 등장하는 「작은 농부」의 리듬은 그가 노트에서 말한 온기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따뜻함에 감염되어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화자의 눈길을 따라가게 된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 그의 또 다른 작품 「봄눈」도 마찬가지다. “나는 작은 눈송이를 꿈꾸었다”로 시작하고 있는 이 작품은 화자의 꿈이 더 이상 꿈이 아님을 증명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꿈은 꿈속에서 현실이 된다. 화자는 “봄빛에 몸을” 숨기며 몸을 사리지만 거뜬히 바다거북이 등짝에 올라타고 고흥반도에 상륙했다가 팔영산 자락을 돌고 돌아 고향 집 지붕과 대문에 내려앉는다. 이지함 선생 수염이 젖어가는 만세력(萬歲曆) 겉장에서 반짝거린다.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이라면 자신도 위태로운 봄눈이 되어 닿고 싶은 지난 추억에 손길을 뻗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여정이 가능한 것은 “내 마당이 더 따뜻해 보인다.”라는 문장을 스스로 획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논한 두 작품과는 다른 색을 선보인 작품도 있다. 「늑대치기 소년」과 「어리고 어엿븐」이 그것이다. 이 두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가 꾸고 있는 꿈의 정체다. 앞선 두 작품을 읽고 느끼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여기서 어려움이 없다고 말한 것은 시인의 의도를 기계처럼 흡수했다는 말이 아니다. 언어에 묻은 시인의 경험을 내 것과 충돌시키며 나름대로 내 몸속에 새길 수 있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꾸고 있는 꿈의 형식이 무엇인지 골몰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했고 이 질문을 명확하게 그리지 못해 밤잠을 설쳤다. 신동옥에게 꿈은 무엇인가.      


그는 왜 꿈에 대해 천착하는 것일까. 그가 꾸었던 꿈은 무엇이고 이 꿈으로 인해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아니어도 최소한의 방향은 잡아야만 비평가의 체면이 설 것 같은데 그것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다시 한번 노트의 힘을 빌린다. 그는 이 노트에서 이제는 자신의 마당이 따뜻하다는 것을 발언한 후, 확신이라도 한 듯 “그러니 꿈꾸지 마라, 다른 세상은 없다.”라고 마침표를 찍었다. 간곡한 표현인 ‘―마라’와 ‘―없다.’가 인상적이다. 생각해보면 이 문장에서 그의 과거가 자연스럽게 부정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질문할 수 있다. 그가 꾸었던 꿈은 무엇이고 지금 새롭게 꾸는 꿈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두 방식으로 가능할 것 같다.      


우선 「늑대치기 소년」에서 시인은 ‘양치기 소년’의 문법을 허문다. 양치기 소년이 아니라 ‘늑대치기 소년’으로 시작한다. 양과 늑대와 소년의 입장을 섞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사실”과 “보잘것없는 꿈” 사이에서 “선택”을 이야기한다. 다시 한번 회전해 “사실에 속는 것”보다 “꿈에 속는 게” 더 낫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신동옥은 자연계의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고 ‘꿈’에서 시적 놀이를 하겠다는 말이 된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꿈의 명명이 정확하지 않으나 그는 기존의 관성을 비틀어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보잘것없는 꿈”을 경유해서 말이다. 그에게 꿈속에서의 ‘선택’은 무엇일까. 「어리고 어엿븐」의 여정이 구체적으로 답을 알려주지는 않을까.     


「어리고 어엿븐」은 꿈속에서의 기나긴 여정을 담는다. 이 작품에서 시의 소품들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글자를 만든다. 탄생이라는 측면에서 창세기의 1장 처음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인은 이 서사를 통해 궁극에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출현시키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도 그가 대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고자 했던 마음이 투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꿈속에서 온기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 행위가 “선택”일까.      

그는 시론집으로 『기억해 봐, 마지막으로 사인이었던 것이 언제였는지』을 출간했지만, 이 두 작품은 시의 형태로 자신의 시론을 풀어놓은 것 같다. 앞선 두 작품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두 작품은 대중성은 미약하지만 한 시인의 고충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는 시이다. 마지막으로 「그믐」은 앞선 두 경향성을 모두 품은 채 만들어진 것 같다. 초승달을 쳐다보며 펼쳐지는 상상의 조각들이 연민의 형태로 흩어져 화자와 사슴을 배회한다. 사슴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고 시인으로서의 존재론적인 슬픔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한 시인의 언어 게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신동옥이 운영하는 시의 흐름과 방향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의 언어는 탄탄하게 건축되어 있다. 자질구레한 감정의 반복을 피하고 한 단위로 쇠사슬처럼 묶여 있다. 그의 다음 작업은 어떤 방식으로 펼쳐지게 될까. 그는 자신의 몸에서 발견한 온기를 어떤 방식으로 독자들과 나누게 될까. 무엇보다도 꿈의 변주곡은 어떤 방식으로 흘러갈까. “굶주린 약속의 말들”이 허기를 채우기 시작했다.■

작가의 이전글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을 두려워하는 구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