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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Mar 12. 2021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을 두려워하는 구름

『오늘은 오른손을 잃었다』(천년의 시작, 2018)에 대한 단상




2015년 <시작>으로 등단.  시집 <오늘은 오른손을 잃었다>, 연구서 <멜랑콜리와 애도의 시학>이 있음. 






 

시골 장에서 까맣고 피부병이 걸린 못생긴 개를 샀다 귤 장수 할머니는 손목에 묶인 개 줄을 내게 건네고 노잣돈 2500원을 받았다 황천길이 멀지 않았다나 이 불쌍한 것을 잘 부탁한다면서 앙상한 손으로 귤을 어루만진다 자세히 보니 귤에는 하얗고 푸른 곰팡이가 덮여있다 내가 지적하자 귤 장수 할머니는 아니야 아니야 소리를 지르며 허겁지겁 귤을 바구니째 까 잡숫고 황천길로 떠난다 이제는 내가 널 돌보마 내가 너의 주인이다 개를 앞장 세워 걷는 마음은 이상하게 뿌듯하고 자랑스러워 나의 사랑스런 까만 개여 나도 개가 생겼다 혹시 썩은 귤 냄새나는 할머니가 그리운 거는 아니지 썩은 귤을 먹으면 썩은 귤밖에 더 되겠니 우리 집에 가서 목욕도 하고 밥도 먹고 같이 잠도 자고 산책을 하며 지는 해도 같이 보자 나는 혼자고 끝까지 혼자고 혼자여서 내가 외로울 때 너는 작고 붉은 혀로 내 발등을 핥고 나는 네 검은 털을 손가락 사이로 쓸어 주리라 개는 글썽이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우쭐거리다 순간 줄을 놓쳤을 때 빈 벌판으로 쏜살같이 도망치는 나의 개여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무 한 그루 없이 지평선만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 낮에는 작열하는 태양과 밤의 지독한 어둠 속에 늑대 울음소리가 들리는 저 빈 들판에 너의 무덤만이 있다 금세 허기진 얼굴로 굶주린 배로 풀이 죽어 다시 내게로 돌아올 나의 개여 허옇게 튼 입술을 달싹이며 배고파서 그랬어요 말을 하면 나는 아이고 배가 고파서 그랬구나 호주머니에서 기쁘게 귤을 꺼내 주리라 까맣고 못생긴 작고 슬픈 나의 개여      


                                                                                                          「나의 개」 전문 

 

 

오래전에 집을 나간 내가 벨을 누르고 문 앞에 서있었다 한 번도 깍지 않은 머리털과 수염과 손톱으로 더럽게 늙고 수북하고 뾰족한 내가 벨을 누른다 방안에 나는 숨을 죽이고 이불 속에 들어가 벌벌 떤다 나는 그가 나라는 것을 안다 그는 내가 그라는 것을 안다 벨을 누른다 내가 참지 못하고 문을 열면 그는 나를 한입에 꿀꺽 삼키고 집에 들어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깻잎에 밥을 싸먹고 30년 동안 깊은 잠을 리라 꿈속에서 나는 집을 나와 정처 없이 밖을 헤매다가 이 대문 앞에 이르러 다시 벨을 누르고 비로소 나는 긴 잠에서 깨어났다  

       

                                                                                                            「털복숭이」전문 



잡초들이 모여서 뭐라고 쑥덕이길래 가서 욕하고 때려주고 쑥떡이 되도록 짓밟아줬더니 잡초는 콧방귀도 뀌지 않고 지들끼리 잘 자란다 혼자서도 자라고 둘이서도 자라고 여럿이도 자란다 비가 와도 자라고 눈이 와도 자라고 한참을 있다 뒤돌아봐도 자란다 자란다는 건 뭘까 물어봐도 잡초는 아가리 닥치라며 맹렬히 자란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상관없이 자란다 이유도 없이 목적도 없이 의욕도 없이 잡초는 자란다 잡초를 뽑은 자리에 잡초가 자란다 지랄같이 자란다 잡초 속에는 잡초가 없다 잡초는 자란다 결국에는 진짜 잡초만 남을 때까지 잡초는 자란다 시치미 떼고 가만히 잡초 옆에 가 앉는다 여기 잡초가 있다 잡초는 자란다 잡초는 자란다      


                                                                                                               「잡초들」전문 



따듯한 나라에서 만든 스웨터를 샀다 주문하자마자 벨이 울려 나가보니 삐쩍 골은 양 한 마리가 추위에 떨고 있었다 털이 다 깎여 군데군데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나오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전화로 항의했지만 연신 사과만 할 뿐 해외직배송이라 시간이 좀 걸립니다 문밖의 양은 억울한 표정으로 문짝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우선 집에 들여 마시멜로가 들어간 핫초코를 마시게 한다 내 눈치를 보더니 식탁에 앉은 채로 존다 내 스웨터는 남쪽 섬에서 양털을 짜는 중이다 양털에 파묻힌 직공들이 땀을 흘리는 한여름 속에 있다 나는 애인도 없고 따듯한 겨울을 보내려던 것뿐인데 알프스에서 온 난민과 방을 같이 써야 한다 냄새나고 코를 고는 양 한 마리와     


                                                                                                           「캐시미어100」전문 



밀짚모자에 슬리퍼를 신고 햇빛이 쨍한 공원에 가면 나뭇잎 매달린 큰 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앉아 지나가던 개미들이 쳐다보든지 말든지 갓 구운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 와인도 한잔 곁들이고 깔깔 호호 신나게 떠들다가 한여름의 뜨거운 대낮 속 아지랑이처럼 몽롱한 잠에 빠져들면 순식간에 몰려온 개미떼들이 가볍게 들쳐 업고 햇빛 속을 지나간다           


                                                                                                                「피크닉」 전문 









차성환의 시를 읽고 있으면 엉덩이를 좌우로 뒤뚱거리며 경쾌하게 움직이는 오리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오리의 모습 중 어디를 응시하는가. 평범하게 동동 떠다니는 오리의 모습이 아닌 물아래에서 역동적으로 발길질하는 하얀 존재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익살스럽지만 그 모습이 차성환의 시를 닮았다. 물아래에서 오리의 떠 있음을 물속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어떤 행위보다도 절박하게 오리의 발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 위의 모습과는 다르게 검은 폭풍을 만들고 있으니까. 그러니 이 노력이 그의 시를 닮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유머(humor)라기보다는 조금은 더 고독하고 우울한 시 쓰기의 전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많은 시인들이 이 순간을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오리가 물 위에 떠 있는 행위는 자연스럽다. 겉으로 보기에 평온해 보이는 이 존재의 뒷모습은 나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The Land of Light, The Land of Beyond》에 수록된 FIAT LUX의 위안을 주는 곡 「To the Beyond」처럼 오리는 평온함 그 자체를 담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홀로 폭풍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하얀 존재는 가라앉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목적은 하얀 존재를 추궁하자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목적은 문학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니 오리가 만든 폭풍과 그의 떠 있음을 문학을 경유(經由)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몽상해보자. 오리의 평온함을 창작자의 무의식과 함께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하얀 대상의 발길질이 시인에게 있어서 ‘의식’의 연습이라고 받아 적고 오리가 떠 있는 풍경 자체를 연습의 끝인 무의식의 형태로 받아 적으면 어떨까. 헤겔에게 있어 습관은 사전적 의미의 습관과는 거리가 멀다. 빛이고 희망이고 존재의 일어남이다. 일반적으로 습관은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관습이고 버릇이고 습성이고 타성이고 풍습이고 관례다. 하지만 이 개념을 허물어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낡고 병든 신체에 기입(記入)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다. 의식을 의식의 노력으로 지워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습관은 무의식의 최종 목표다. 이것은 이제 너무나 상식적이어서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은 매우 적다. 그래서 헤겔은 사건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차성환의 시는 이런 무의식과는 조금 다르다. 헤겔에게 있어 습관이 존재론적 깨어남이라면 차성환에게 있어 무의식은 라캉적 의미를 보다 더 짙게 품고 있다. 얼룩의 형태로 뻗어나가는 「고야」가 그것을 증명해 준다. 즉, 그는 기표와 기표 사이에서 멈추지 않는다. 기표가 유목하도록 놔두고 의미가 적중하는 것을 피한다. 떠돎의 형태로 문장을 이어 붙이고 그것을 즐긴다. 이러한 장치들로 인해 의미가 계속해서 유동적으로 흐르는 것이다. 그는 ‘의식’ 자체를 훈련해 습관의 형태로 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자유로움 그 자체에 무게 중심을 둔다. 의식의 흐름 속에서 회전의 회전을 거칠게 거듭한다. 이러한 방식이 차성환의 시론이자 무기이다. 이 방법론을 시집 전체에 적용한 시인은 별로 없다. 최근에 정사민 시인의 「아직」이 있었지만, 그것은 시 한 편 일 뿐, 시집 전체는 아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이색적이다. ‘무의식’이라는 투박하고 보편적인 개념은 다양하게 해석되고 이해될 수 있지만, 그는 라캉적 방법론을 무기로 자신의 시를 써 내려간다. 이것이 시인이 말하는 “반의식 상태”이자 “방향과 목적이 없는 시 쓰기”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라캉을 경유한 방법론이 이론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의 몸에 체화된 살갗에 보다 많은 애정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릇은 이론적이지만 그릇에 담긴 내용물은 교환불가능한 차성환 시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의 그릇이 유니크(unique)하다고 해서 삶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자연스럽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그곳을 향해 뻗어나가는 뿌리처럼 그의 시를 두고 밍밍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언어는 끊임없이 힘차게 미끄러져 우리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데려다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방식이든지 문학은 끝을 향해 뻗어나가는 여정이니까. 문학에서는 승자도 패배자도 영원하지 않으니까. 좁은 권투의 링(ring)처럼 문학사는 전복하고 쓰러졌으니까. 우리는 죽음으로 걸어가고 있으니까. 


마침표가 한 흐름의 끝을 의미하고 제목이 다른 제목으로 변주되는 과정에서 변주의 끝을 예상할 수 있지만, 차성환의 언어는 마침표가 찍히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을 두려워하는 구름처럼. 그가 「첫이란 단어로 시작하는」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는 의식의 주조보다는 의식의 자유로움에 더 많은 희망을 건다. 그곳에서 시의 운명을 실험한다. 그는 적어도 지금 현재 이러한 방식이 전위적이며 개성적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는 ‘쓴다’가 아니라 ‘쓰여진다’라고 자신의 비밀을 시론에서 밝혔는지 모른다. 그는 쓰여지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무의식의 흐름에 옮겨 놓는다. 그는 이 방식으로 올곧게 서 있고 부끄럽지 않게 자신의 예술을 밀고 나간다. 이러한 바람 때문인지 그의 첫 번째 시집 『오늘은 오른손을 잃었다』에서부터 이번에 독자들에게 선보일 다섯 편의 시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경향성 안에서 재생되고 있다. 일부 독자들은 예전의 관성을 그대로 답습한다고 그를 전위적이지 않은 시인이라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전위는 반쪽짜리 전위가 된다. 그는 변주되는 실험 자체를 예술의 덕목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재미있고 유머러스한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예술을 떠받치는 것이 시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인이 믿는 방향에서 도드라지는 미적 체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시인의 장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니까.


예술의 방향이 하나의 길로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이 방법도 의미 없지 않다. 늘 항상 말하지만 믿는다는 것만큼 한 사람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없다. 믿음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지독한 현실이 된다. 눈을 감으면 넓은 호수가 들어오고 세상의 모든 빛이 암흑 속으로 사라진다. 최근의 출판된 연상호 감독의 『지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어떤 상황과 현실을 믿고 있느냐에 따라 운명은 갈라지고 흩어지고 떨어진다. 그의 첫 번째 시집에서는 이러한 방법론이 믿음의 형태로 배면에 강하게 깔려 있다. 그중에서 「걸음」 연작시는 그의 시론을 대표하는 하나의 징표가 아닐까. 제목부터 이 표정을 안고 있다. 걷는다는 것은 유동적인 것이니까. 한 곳에 머무를 수 없으니까.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 후에도 멈추지 못해 무작정 머리를 숙이고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까. 이제는 움직이지 않고는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시인은 걸음에 대해 말한다. “걸음은 내 시의 거름이 되어 치사하게 머릿속에 얼어붙은 걸음으로 시를 쓰고 나를 여기서 저기로 옮겨”(「걸음1」)준다고. 그는 이 걸음으로 허물을 벗고 무덤을 이야기하고 높은 담장을 쳐다본다. 강물을 쳐다보며 우울을 캐 올린다. 그가 쳐다보는 세상은 이 방식으로 그림 그려진다. 만약 그가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면 그는 어떤 그림을 통해 도화지에 물감을 뿌려 놓을까. 그의 시 쓰는 방법론이 일관적이니 몽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나는 차성환 시인에게 호평만을 늘어놓을 수는 없다. 호평을 적는다는 것은 비평가에게 카피라이터라는 명명을 붙이는 것이니까. 무엇보다도 애정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다음 단락에서는 싫은 말을 조금 적자. 그래도 그는 나를 이해해 주겠지. 


그가 사용하는 의식의 자유로움은 어떤 세상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경험이 많으면 쓸거리도 많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차성환 시인이 만나는 세상은 일정부분 한정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가 오랜 시간 써왔던 흔적이 동일한 것은 없겠지만 습관적으로 그릇에 담는 내용물을 일정하게 고정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이런 고민을 조심스럽게 하게 된다. 이것은 그릇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다. 시인의 스승은 ‘삶(生)’이다. 이 불변의 진리를 잊으면 안 된다. 


그는 동일한 제목으로 여러 편의 시를 쓴 바 있다. 앞에서도 말한 걸음 연작시와 의자 연작시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작품들은 그가 지나치게 의식의 흐름‘만’을 강조한 탓에 만들어진 언어일 수도 있고, 의식의 자유로움을 미덕으로 여기는 하나의 태도가 강하게 반영된 형태일 수도 있다. 이 부분이 장점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흐름만이 부각되는 무의식의 덩어리로 인식될 수도 있다. 안위로 인해 반복을 즐기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의 시가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만나고 말하고 먹고 자고 웃고 즐기고 슬퍼하는 삶 자체를 보다 넓은 세상과 함께 조우한다면 그의 그릇은 점점 더 커질 것 같은 바람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이 시인의 게으름으로 인해 멈추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물론 그는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에게 적(敵)은 익숙해지는 것이지 않겠는가. 생활에서 모험을 두려워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그 지점을 나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차성환 시인의 신작시 다섯 편을 최근에 접했다. 그의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조건을 품고 있다. 재미있고 늘 그다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대중적이라고 말해도 위험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독자를 얻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출판사에서 매달 쏟아지는 막대한 시집의 분량 때문일까. 시를 읽는 독자들이 사라진 이유 탓일까. 영상매체의 급부상으로 변해버린 감각의 유동 때문일까. 출판사의 마케팅이 큰 이유로 작용했을까. 분명한 것은 그의 시는 어린 시절 즐기던 언어 놀이처럼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이 즐거움 속에는 섬뜩함을 자아내는 커다란 뼈를 숨기고 있다. “겨우 손목을 잡아다 식칼로 꽂는다”(「오늘은 오른손을 잃었다」)라는 표현처럼. 


나는 이 지면에서 그의 신작시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비유적인 방법으로 다 적었다. 독자분들께서는 유니크한 차성환 시인의 작품을 읽기 전에 그가 운용하는 그릇에 대해 상상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의 언어들은 이 자장(磁場) 안에서 힘겹게 혹은 고독하게 눈물을 흘리며 춤추고 있을 테니 말이다. 내가 굳이 언어로 고정화시켜 축제의 즐거움을 희석시키고 싶지는 않다. 직접 온몸으로 즐겨보시길. 마지막으로 그의 시 한 편을 읽으면서 이 글을 끝마치도록 하겠다. 첫 시집에 수록된 「꽃」이 그것이다. 이 시는 차성환의 첫 시집에서 찾아보기 힘든 유일한 사랑 시이다. 대상에 대한 사랑이 아닌 언어 그대로 당신에 대한 사랑 이야기다. 이 시를 인용하는 이유는 그에게 사랑만이 ‘나’를 회전시킬 수 있다고 막연하게 몽상했기 때문이다. 사랑, 이 단어를 빼고 무엇을 노래하랴. 화자를 회전시켜 그릇의 내용을 통째로 바꾸는 방법은 이 ‘사건’밖에 없다고 몽상했다. 물론,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일으킬 수 있겠지만, 이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다. 새로운 사랑을 통해 삶도 그가 운용하는 그릇의 내용도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변화되길 바란다. 적어도 우리는 보통의 삶을 살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삶의 비극이겠지. 슬프지만 이 단락은 바람을 담은 단락이다.      

    


등에 꽃이 피었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꽃이 피어 꽃은 안전하다 나는 불안전하다 꽃의 뿌리가 간지럽고 근질거려 애인에게 뽑을 것을 지시했지만 애인은 거절한다 애인은 채식주의자다 꽃을 사랑한다 꽃봉오리가 만개하면 잡아먹을 심산이다 나야 꽃이야 다그쳐도 살살 등만 긁어줄 뿐 꽃은 뽑지 않는다 나는 윗옷도 입지 못하고 등짝을 열고 다닌다 꽃이 죽으면 애인한테 나도 죽는다 나는 정작 한 번도 보지 못한 꽃잎의 개수와 색깔을 맞춰보라고 애인이 퀴즈를 낸다 있지도 않은 꽃이 피었다고 한 건 아닌지 미심쩍지만 등짝에 핀 꽃 때문에 요즘 애인하고 부쩍 사이가 좋아졌다 내가 쓸모 있어진 것 같아 나쁘지는 않다 가려움에 환장하겠지만 우리 둘은 내 등짝에 핀 꽃 때문에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다 꽃이 잡아먹히면 애인이 등짝에 호미로 밭을 갈아 내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가 자랐으면 좋겠다      


                                                                                                        「꽃」 전문           



시인의 다음과 같은 말. “내가 쓸모 있어진 것 같아 나쁘지는 않다”라는 말이 가슴을 친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니 살아보자. 살자. 살아내자. 다시 한번 더 “무릎이 무릎을 딛고 일어섰을 때 나는 걸어가는 나무가”(「무릎」) 되어보자. 나무가 되어 누군가에게 그늘을 선사하는 쓸모 있는 시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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