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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Mar 15. 2021

Say it To me Now

황미현 시인의 시에 대한 단상

 


 

지구에 얽힌 실선들, 가만히 보면

모두 휘어진 모양입니다.

자연스레 휘어진 모양의 국경선은

인습적이거나 아름답습니다.     


가령,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지구의 실선들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고정으로 머물러 있었다는

그래서 누군가 지구본을 돌리듯

지구를 힘껏 돌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휘어지거나 삐뚤삐뚤한 국경들

다시 그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라는.

그중 별을 국기의 상징으로 쓰는 나라들은

어디서 그 별을 주웠을까요.

단출하게 하나만 주워왔거나

아니면 여러 개의 별들을 일렬로

늘어놓거나 반원으로 둘러놓은

하얀 별, 또는 노란 별, 빨강 별

사실 하늘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주워왔을 수도 있습니다.    

 

떨어진 별들이 모인 국기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습니다.

별들은 저토록 유연한 것입니다.                          


                                             「떨어진 별」 전문   





                                       

 알지? 파란 맛이란

 도달점에 못 미치는 맛이라는 거

 그때 얼굴을 찡그리며

 신맛을 떨쳐 내려 흔든다는 것도 알고 있지     


 온 얼굴을 짜내며 버리려는 맛     


 햇살이 만찬중인 파란색에 곁들여 먹었던 그늘은 싫증났고 모르는 사이 야금야금 뜯어먹었던 파란 맛은 여전히 그립다     


 과일들과 채소들이 입안에 고이는, 파란 이름들처럼 멀어진 시간 같은 파란 맛, 파란색으로 물들고 싶을 때 원피스 단추들마다 비밀번호를 풀고 기다릴 때 파란은 어느 호수의 수면을 떨치고 덮쳐 올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기억해보니 혀들이 온통 파란색일 때가 있다     


 즉석의 말들로도 깔깔거리던 파란 혀, 그러면 그렇지, 라는 말도 파란의 시절엔 몰랐던 말, 어쨌거나 파란은 너무 멀어진 맛     


 숫자들이 나도 모르게 풀려나간 맛, 그러니까. 여전히 그리운 파란을 손가락 빨개지도록 만지고 싶지만 채소밭들은 끝이 났고 문턱 높아진 파란은 과거형의 말들만 모아놓고 있다     


 여전히 맛있게 건재하다는 말에 혀를 대본다

 껍질 맛이 난다        


                                            「파란 맛」 전문     

                                               





     

 어젯밤엔 둥근 지구 밖에서

 구르지 않는 꿈을 꾸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이 한 마리 새처럼 내려앉고

 깃털과 뼈를 모두 버리고 사라지는 꿈

 둥근 것들에게도 양쪽이 있다는 것을 뒤척이다 알았다.

 모든 숨결은 짝수와 홀수로 견디다 그 중 하나를 

 택해 사라진다는 것도 잠결에서 들었다.     


 최초의 셈법은 홀수에서 시작 되었을 것, 홀수로 자전하고 공전한다. 전

자와 후자들은 짝수에게 버림받은 것들. 하나의 몸짓으로 나비의 양 날개와 뱀의 두 갈래 혀 날개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새들은 홀수의 열매들로 배를 채운다.   

  

 죽은 새를 뒤적이다 본 뼈는

 홀수까지 세다 말았다.

 그렇다면 은륜의 중심에 뜨는 달의 뼈는 어떨까

 몸이 둥근 것들도 자주 넘어지는 걸 보면

 어느 방향엔 기우뚱 기우는 홀수가 있다는 뜻일까     


 한 밤의 고양이 울음소리는

 홀수인 것이 분명하다.     


                                            「 어쩔 수 없는 짝수」 전문




황미현 시인은 대상에게 다가가 대상의 심장을 조심스럽게 증폭 시켜 터트렸다. 대상을 대상 아닌 것으로 만들어 펼쳐 보였다. 의심하지 않고 편하게 받아들였던 익숙한 개념을 낯선 것으로 회전 시켜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었다. 일부 독자들은 그녀의 이러한 회전을 탐탁지 않게 여기며 외면하겠지만 일부 독자들은 시인이 풀어낸 증폭의 의미를 새롭다며 기뻐할 것이다. 긍정의 신호를 보냈던 이들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시인의 탄탄한 흔적을 소중하게 감싸 안으며 비좁았던 자신의 시각을 확장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문법이 장점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그녀의 문법이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장인의 굵고 거친 손을 의심할 수 없지만, 대상과 내가 하나로 뭉쳐져 펼쳐지지 못했다며 흥미를 잃을 수 있다. 응시의 시선은 정밀하나 응시‘만’이 부각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 방식은 현재로서는 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따라갈 필요도 없고 흉내 낼 필요도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해왔던 방식을 내려놓고 새로운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동일한 방법을 계속해서 사용할 순 없다. 그녀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녀가 최근에 발표한 산문 「앵무새에게 말걸기」 와 「깍두기 팔뚝」, 「꽃 피는 수수께끼」에서 느낄 수 있었던 날것의 힘이 조탁한 시보다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대상을 새롭게 열어 빈틈에 의미를 덧씌우는 방법이 참신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존재 자체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더’와 ‘덜’의 문제이다.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과 날것은 섞일 수밖에 없다. 나는 다만 취향의 영역에서 황미현 시인의 날것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이 지점을 부각시키고 싶은 것이다.      



우리 집 앵무새는 식구들에 따라 용도가 달랐다. 언니는 자신만의 거울로 사용했고 아버지는 무료한 말들을 골라내는 용도로 사용했고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연습하는 연습 대상으로 쓰고 있었다. 또 우리 가족을 매일 같은 시간에 깨우는 것은 앵무새였다. 아버지는 새장을 열고 모이부터 주었고 언니는 시끄럽다고 소리부터 질렀다. 나는 지극히 짧은 멘트로 안녕, 했었다.    
  
후두암을 앓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새와 말과 또 그 말의 의미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새에게 물주는 일과 모이 주는 일 외에 목욕시켜 주는 일까지 아버지와 앵무새는 몇 마디 말투로 잘 놀았다. 언니와 앵무새는 언제나 깃털 터는 말투로 귀찮은 말들과 숨기고 싶지 않은 말들을 번갈아 주고받았다. 나는 언제나 똑 같은 소리로 안녕, 하고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말하기가 불편해지면서부터 몇 마디 말 외에는 잘 쓰려하지 않았다. 사람은 늙어가면서부터는 자주 쓰던 말들이나 용기를 내었던 말들이 퇴화되듯 사라진다. 그러다보면 아주 가까운 말 몇 마디만으로도 일상적인 이야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 중 가장 쉽게 퇴화되는 말들이 사람을 향한 말들이고 또 그 중에서도 사랑에 관한 말투나 단어들이다.(강조는 인용자)   





시인은 나이가 들면 “자주 쓰던 말”과 “용기를 내었던 말”이 퇴화된다고 말한다. 퇴화를 거듭하다 보면 말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일상적인 몇 마디만으로도 대화가 가능하다고 적는다. 참 슬픈 말이다. 타성으로 인해 말할 수 있는 기회조차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씁쓸하다. 시인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 “사람을 향한 말”들과 “사랑에 관한 말투나 단어”들이 가장 쉽게 퇴화된다고 말이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나’와 ‘시인’과 ‘우리’에게 퇴화된 언어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고, 이 언어들을 복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한 압박을 받았다. 


「깍뚜기 팔뚝」 은 깍두기를 애인으로 둔 친구의 빈소 풍경을 다룬다. 어느 빈소나 마찬가지겠지만 죽은 자에 대한 흔적은 당사자가 아닌 타인에 의해 채워진다. 죽음은 “세상 모든 것 떼어먹고” 가는 것 아니냐고 친구는 뻔뻔하게 말했었던 것 같고, 화자는 이에 야멸찬 어조로 따끔한 “말 몇 마디” 쏘아 댔다. 빈소에 모인 친구들 또한 마찬가지다. “복도 많은 년, 남자 여럿 잡아먹고 / 떼어먹어서 원도 한도 없을 거야”라며 수군거린다. 빈소 안은 고만고만한 소문들이 쌓여간다.     



고만고만한 소문들이

서로 다른 쪽의 방향을 두고 극성스러워지는 시간

깍두기 애인의 소매 걷어 올린 팔뚝엔

전생과 이생을 이어줄 유치한 꽃 한 송이

삼월 끝에서 필 듯 말듯하다.      


삼월은 죽은 애인의 애인들 같고 

그 무엇을 받아내지 못했거나 

아니면 결국 갚지 못한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냐고 

처연한 저 깍두기 애인에게 묻고 싶다.     


                            「깍두기 팔뚝」 부분         

  

깍두기는 신어로 조폭을 의미한다. 조폭이 하는 일은 다양하겠지만 돈을 빌려주고 많은 이자를 받아내는 것도 그들이 하는 일 중에 하나다. 그래서 깍두기를 연상하면 자연스럽게―관습적으로― 무엇인가를 강제적으로 받아내는 의미들이 따라 나온다. 이 ‘의미’를 붙잡아 시인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이별을 다룬다. 친구에게 실제로 깍두기 애인이 있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시는 신어 ‘깍두기’를 통해 한 번쯤은 꼭 통과해야만 하는 이별의 아픔을 담담하게 풀어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꽃 피는 수수께끼」도 마찬가지다. 무엇인가를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의 성질을 이용해 씨앗의 가능성과 알지 못함 그리고 겸손함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시인은 이 과정에서 ‘나’를 끌어올리는데 대략 이런 맥락이다.           



나라는 수수께끼를 내 놓고 엄마와 아버지는 서로 맞히질 못했다. 아들이라 여겼던 나는 열 달 끝에 핀 틀린 대답      


 배꼽 모양을 보고도 좋지 못했던 열 달 

 여전히 사과나무의 가을은 철조망에 갇혀 있고

 배꼽 수수께끼에 꽃이 핀다.      


                                    「꽃 피는 수수께끼」 부분     

 

나는 황미현 시인의 이와 같은 투박한 목소리가 좋다. 하지만 이 방식은 생애 단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목소리다. 꺼내 놓기가 쉽지 않다. 조심스럽게 토해내야 한다.    

  

황미현 시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젊음의 ‘기준’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나는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흔적을 드러내는 데 있어 거짓말을 흩뿌리지 않았다. 자신이 겪은 인생을 자신만의 문법으로 정직하게 건축했다. 그녀에게 기교가 없다고 할 수 없으나 이 기교는 스스로를 통과한 기교였다. 자신을 통과한 기교는 어느 시인이든지 믿을 수 있다. 여전히 편견은 그녀의 곁을 쫓아다니겠지만 시를 대하는 태도는 확실히 젊다. 이러한 몽상을 하다가 그녀의 신작 시 3편 「떨어진 별」과 「파란 맛」, 「어쩔 수 없는 짝수」를 읽게 되었다. 


이 세 편의 시는 앞서 내가 논했던 맥락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내용과 형식도 바뀐 듯하다. 전자의 글들이 ‘생활’이나 ‘삶’에 무게를 두었다면 이 작품들은 특정한 상념을 향해 움직인다.  여기서 그 무엇은 언어 자체에 대한 물음일 수 있고 자연계의 존재 탄생을 다루는 것 같기도 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작품은 「파란 맛」이다. 


 알지? 파란 맛이란

 도달점에 못 미치는 맛이라는 거

 그때 얼굴을 찡그리며

 신맛을 떨쳐 내려 흔든다는 것도 알고 있지     


 온 얼굴을 짜내며 버리려는 맛     


 햇살이 만찬중인 파란색에 곁들여 먹었던 그늘은 싫증났고 모르는 사이 야금야금 뜯어먹었던 파란 맛은 여전히 그립다     


 과일들과 채소들이 입안에 고이는, 파란 이름들처럼 멀어진 시간 같은 파란 맛, 파란색으로 물들고 싶을 때 원피스 단추들마다 비밀번호를 풀고 기다릴 때 파란은 어느 호수의 수면을 떨치고 덮쳐 올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기억해보니 혀들이 온통 파란색일 때가 있다     


 즉석의 말들로도 깔깔거리던 파란 혀, 그러면 그렇지, 라는 말도 파란의 시절엔 몰랐던 말, 어쨌거나 파란은 너무 멀어진 맛     


 숫자들이 나도 모르게 풀려나간 맛, 그러니까. 여전히 그리운 파란을 손가락 빨개지도록 만지고 싶지만 채소밭들은 끝이 났고 문턱 높아진 파란은 과거형의 말들만 모아놓고 있다     


 여전히 맛있게 건재하다는 말에 혀를 대본다

 껍질 맛이 난다     

                                                 「파란 맛」 전문          

 

이 시는 ‘파란 맛’에 대한 화자의 상념이 적혀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파란 맛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란 맛’은 국어사전에 없는 맛이다. 그런데 화자는 파란 맛을 강박적으로 떠올리며 이 맛을 그리워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파란 맛은 도대체 무엇일까. 시인은 왜 파란 맛을 잊지 못하는가. 이 시를 접해 본 독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골몰하게 된다.  


나는 이 시를 「앵무새에게 말걸기」에서 언급된 부분과 접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산문에서 시인은 “사람을 향한 말”들과 “사랑에 관한 말투나 단어”들이 가장 먼저 퇴화된다고 적은 바 있다. 퇴화된 것은 화려하고 당당했던 지난 과거의 흔적일 것이다. 이 흔적을 추억하는 행위가 ‘파란 맛’을 추억하는 행위와 뭉쳐지는 것 같다. 이 시의 화자는 ‘맛’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경유해 퇴화된 ‘그 무엇’을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파란 맛’을 통해 퇴화된 언어를 찾고자 한다. “껍질 맛”이 나더라도 상관없다. 이미 화자에게 파란 맛은 잊을 수 없는 시각ー미각이다.  


화자는 ‘파란 맛’을 정확히 알고 있다. 파란 맛은 “도달점에 못 미치는 맛”이다. 완성되진 못했지만 도달점까지 가고자 했던 행위와 관련이 있다. 화자는 이러한 맛을 ‘―먹었던’, ‘―그립다’, ‘―싶을 때’, ‘상상을 한다’, ‘―때가 있다’, ‘너무 멀어진 말’ ‘문턱 높아진 파란’ 등의 말로 표현했다. 구체적으로 잡히진 않았지만 파란 맛의 형태를 독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상상의 가능성이 이 시의 힘이겠다. 시인에게 ‘파란 맛’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파란 맛’은 어떤 방식으로 다가올까.      

 


 어젯밤엔 둥근 지구 밖에서

 구르지 않는 꿈을 꾸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이 한 마리 새처럼 내려앉고

 깃털과 뼈를 모두 버리고 사라지는 꿈

 둥근 것들에게도 양쪽이 있다는 것을 뒤척이다 알았다.

 모든 숨결은 짝수와 홀수로 견디다 그 중 하나를 

 택해 사라진다는 것도 잠결에서 들었다.     


 최초의 셈법은 홀수에서 시작 되었을 것, 홀수로 자전하고 공전한다. 전

자와 후자들은 짝수에게 버림받은 것들. 하나의 몸짓으로 나비의 양 날개와 뱀의 두 갈래 혀 날개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새들은 홀수의 열매들로 배를 채운다.     


 죽은 새를 뒤적이다 본 뼈는

 홀수까지 세다 말았다.

 그렇다면 은륜의 중심에 뜨는 달의 뼈는 어떨까

 몸이 둥근 것들도 자주 넘어지는 걸 보면

 어느 방향엔 기우뚱 기우는 홀수가 있다는 뜻일까     


 한 밤의 고양이 울음소리는

 홀수인 것이 분명하다.     


                          「어쩔 수 없는 짝수」 전문          


이 시는 나에게 한 그루의 커다란 감나무를 상기시켰다. 내 키보다 작았던 작은 묘목을 상상하게 해 주었다. 지금은 만날 수 없지만 이사 오기 전에 심었던 작은 묘목을 떠올리게 해 준다.  작은 나무는 중심을 잡으며 하나의 가지로 뻗어 나가 두 갈래로 이어졌고 다시 한 가지로 이어지면서 두 갈래로 뻗어 나가는 반복의 반복을 경험했다. 감나무는 그렇게 자신의 몸을 가로로 세로로 늘려나갔다. 만지고 쓰다듬고 우두커니 응시했다. 오랫동안 나무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으니 나무의 살결과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도시에 사는 내가 크게 깨달은 것 중에 하나다. 그 이후로 나무를 함부로 만질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나무의 양손에는 수많은 홀수들이 매달려 있었고 날씨가 좀 더 추워지자 홀수들은 하나둘 땅으로 떨어졌다. 아버지와 나는 이 홀수들을 주워 담기 위해 빗자루로 때리고 흔들었다. 기분 좋게 떨어진 홀수들을 바구니에 담았다. 


나는 “모든 숨결은 짝수와 홀수로 견디다 그 중 하나를 / 택해 사라진다는 것도 잠결에서 들었다.”라는 구절을 읽으며 나무의 성장을 몽상했다. 이것은 화자가 “둥근 지구 밖에서” 꿈을 꾸며 깨달은 것 중에 하나다. 이 깨달음은 감나무뿐만 아니라 나비의 양 날개, 뱀의 혀로 확장된다. 이 작품은 다양한 상념을 쫓아다니며 짝수와 홀수로 변모되는 지금, 이곳의 자연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매력적인 시다. 


「떨어진 별」에서 화자는 지구본을 힘껏 돌려 휘어지거나 삐뚤어진 국경선을 바로 잡으려고 한다. 별 모양을 국기의 상징으로 쓴 나라들은 하늘에서 별을 따온 것이 아니라 땅에서 별을 주었다. 화자는 그렇게 상상한다. 주워 온 ‘행위’는 ‘따온 행위’와 대조된다. 화자는 별 줍는 행위를 통해 ‘유연함’을 부각시켜 “고정”된 국경선을 문제 삼는다. 



* 황미현 시인: 2019년  ⌜천년의 시작⌟  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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