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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Mar 24. 2021

싸움의 벽

―있는 사람의 처지를 공감하는 일


실패     


오랜만에 형에게 편지를 씁니다. 2017년 끝자락에선 2018년이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저 멀리 2018년이 달아나고 있습니다. 이 글은 5월과 6월 사이에 작성되고 있습니다.  형에게 이 편지가 언제 즈음 도착할지 모르겠지만, 내 편지를 꼭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너무나도 보고 싶어요. 형이. 발바닥이 닳도록 보고 싶고 손바닥이 닳도록 보고 싶습니다.     

  

잘 지내지요. 덥지는 않나요. 전에 아프다는 팔목은 조금은 괜찮아졌어요. 저는 아홉수의 저주가 따라다녀서인지 2018년 시작부터 지금까지 잘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7년간 준비한 논문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고 심사위원들에게 처참히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가진 패를 꺼내 보지도 못한 어리석은 짓을 반복한 것입니다. 그렇게도 애를 썼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이곳과 저곳에 놓인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치곤 일어나지 못합니다. 웅크리고 앉아 밥을 먹고 배가 부른 상태에서 다시 밥을 먹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살을 찌우고 운동을 하고, 다시 살을 찌우는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거듭되는 실패를 경험한 이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눈치 보는 행위는 자기보존 능력을 탁월이 발휘하는 오디세우스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이러한 삶은 자신이 품은 고유한 영혼을 헐값에 팔아야만 살 수 있는 위태로운 인생과 비슷합니다. 형, 저는 이런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 같은 불안을 느끼고 있어요. 제가 잘 버틸 수 있을까요. 문학은 충동의 영역에서 움직이는 용기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거듭되는 실패의 반복 속에서 충동의 영역에서 문학을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눈치 보며 살아가고 있다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까요. 형, 저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요.       


광대     


요즘은 개별적인 존재가 지닌 세계관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사람이 지닌 세계관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나에게도 작동되는 상식적인 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진 욕망에 대해 생각합니다. 내 안에 있는 욕망과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욕망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내 욕망과 욕심이 순수하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은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 누군가가 나에게 글을 쓸 때 ‘모른다’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자칫하면 내가 무식한 사람으로 내비쳐 질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발언이 순수를 향한 가식처럼 느껴져서 앞으로도 ‘모른다’라는 말을 계속해서 사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모른다’라는 말은 ‘아는 것’을 두 번, 세 번, 혹은 무한대로 반복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라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모른다’라는 단어를 더욱더 자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이 정말로 아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이해한다는 것도 어디까지 이해해야만 이해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에게 ‘안다’는 것은 ‘나’와 ‘당신’이 동시에 부딪치는 것인데 말이지요. 내가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당신을 안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내 직업은 ‘광대’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배우이자 연기자인 것이지요. 내가 그 사람이 될 수 없지만, 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연기를 잘한다는 것은 그래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미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왕 말이 이렇게 나왔으니, 연기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연기를 잘하는 것은 내가 아닌 당신의 삶을 살아보는 것과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도 없거니와 ‘나’와 ‘당신’이 지닌 감각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간격을 좁히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얼추 나와 비슷한 영역에 놓인 배역들의 경우는 흉내라도 내 볼 수 있겠지만, 나와는 차원이 다른 영역에 놓인 인물은 연기하기 참 힘듭니다. 이런 고민을 하다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논문의 한 구절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연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공감-가난       


저는 시인 김수영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김수영 문학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김수영 문학을 공부하는 동안 잃어버린 것도 많았지만, 얻은 것도 많았기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느 평자는 김수영 문학을 가리켜 한국문학의 자존심이라고 발언했는데,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왜 그가 한국문학의 자존심이라고 말했는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시인들 중에 진짜 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문학을 공부하면서 그에게 배워야 할 것이 혁명도 자유도 죽음도 사랑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혁명도 자유도 죽음도 사랑도 너무나 식상한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다이소에 진열된 저렴한 상품처럼 값싸게 팔리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자유가, 사랑이 그렇습니다.  

     

김수영 문학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이 마당에 그의 문학을 멀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어떤 유행이든지 유행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한 사람은 바로 그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라 혁명과 자유와 죽음과 사랑(생명) 등의 개념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는 오히려 평자들 사이에서 거론된 적은 없지만, 김수영 문학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다음의 구절을 형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없는 사람의 처지는 있는 사람은 모른다고 하면서 있는 사람을 나무라는 없는 사람들의 가치관에 대한 공감도 소중하지만, 사실은 있는 사람의 처지를 알아주는 있는 사람들의 가치관에 대한 없는 사람으로서의 공감이 따지고 보면 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도 그렇지만 오늘날도 역시 가난하게 살기는 쉽지만 돈을 벌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태와, 또한 나이와, 게다가 여태까지 쌓아온 선비로서의 지나친 수양의 탓 때문인지, 좌우간 요즘의 나로서는 미인과 돈에 대한 방심이 그것들에 대한 지난날의 조심보다도 몇 곱절 더 어렵다.     





지금도 마찬가지만 ‘찐따’로 생활하던 시절 동료들의 좋은 소식이 들려올 때면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었지만, 생글생글 웃던 웃음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가식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추악한 내 모습을 확인하게 된 셈입니다. 속물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속물이 바로 나였던 셈입니다. 상대방의 좋은 소식을 내 일처럼 기뻐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나는 그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놀부의 심정으로 평생을 살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 감정을 극복하고 싶습니다. 

     

나는 언제 즈음 “있는 사람의 처지”를 깊게 공감하며 그들의 기쁨을 내 기쁨처럼 느낄 수 있을까요. 이러한 속물근성을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연민’을 벗어나지 못한 슬픈 사람으로 비유했습니다. 형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당신’보다 내가 더 높은 위치에 있어야만 ‘연민’을 느낄 수 있단 말입니다. 저는 이 눈빛으로‘만’ 상대를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평생토록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헤아릴 수 없는지 모릅니다. 김수영은 이 말을 회전해 자기를 죽이고 타자가 되는 사랑의 작업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넘을 수 없는 벽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벽을 허물고 싶습니다. 이제는 있는 사람들의 처지와 입장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습니다.       


나의 과제는 자유도 혁명도 죽음도 생명도 아닙니다. 이러한 개념은 너무나 낡아서 진부할 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합니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백번 천 번 “있는 사람의 처지”를 공감하고 그들의 일을 나의 일처럼 기쁘게 생각할 수 있는 공감 능력입니다. 이론상 이것은 불가능한 영역에 놓인 불안전한 인간의 모습이지만, 불가능한 영역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내가 무슨 이유로 “있는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필요가 없다고, 반박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치열하게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매번 내 싸움은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형 내게도 “있는 사람의 처지”를 사랑으로 느끼는 날이 오겠지요. 내 안에 있는 괴물과 싸워서 이기는 날이 반듯이 오기를 바랍니다.      


김수영과 관련된 박사 논문 심사는 6개월 미뤄졌습니다. 미뤄지는 것이 두렵지는 않지만 좋은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은 더 부끄러운 일입니다. 겸손해져야겠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뜨거운 마음을 품고 글을 써야 겠습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내 안에 있는 괴물과 당당히 맞서고 싶습니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고 자유롭게 날고 싶습니다. 흐린 가을 하늘 위로 작은 공을 쏘아 올리고 싶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김수영의 산문 중 “가난하게 살기는 쉽지만 돈을 벌기는 어렵”다는 문장이 제 가슴을 칩니다. 형, 가난하기는 정말 쉽지 않나요. 가난만큼 쉬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돈을 벌어 본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곡괭이로 아무리 땅을 찍어대도 십 원 한 장 나오지 않는 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가난을 자랑했던 과거의 내 모습이 추잡스럽고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내가 자랑한 가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데, ‘책임’이라는 말 앞에 당당하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돈을 버는 사람들은 내 눈에 모두들 영웅처럼 보입니다. 어벤져스의 헐크처럼 돈을 버는 사람들은 이렇게 다들 힘 있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매번 작아질 뿐이고요.      


대구      


이러한 부끄러움을 품고 일자리를 찾기 위해 대구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대구로 향하는 길은 돈을 벌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라도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싶은 저의 마음이 저를 대구로 내려가게 한 것입니다.      


이 여정이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실린 단편 소설을 읽으며 대구로 향하는데, 저와 비슷한 등장인물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정확히 말해, 내 주변 사람들을 대변하는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는 표현이 보다 적절할 것 같습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필요한 침대와 책상을 만들기 위해 오키나와로 떠나는 광섭이와 출구가 막힌 한국이 싫어 독일로 떠나는 성훈이가 그들입니다. 저와 제 친구들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조우하는 순간, 낭만적일 수 있는 소설의 내용이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인물은 바로 장은진의 단편 소설 「외진곳」에서 “우리한테 사기 친 그 개새끼를 어떻게 잡아 죽일까?”(: 132)를 고민하는 동생입니다. 동생은 이 소설의 화자인 나와 함께 공동화장실이 있는 ‘네모집’에 살고 있습니다. 그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언니와 함께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네모집으로 이사를 가게 된 이후, “왕복 세시간”(: 137) 이나 걸리는 출퇴근길이 너무나 힘듭니다. 틈을 주지 않은 편의점 사장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화가 난 주인공은 “CCTV에 대고 뻑큐”(: 139)를 날리며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기로 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어 공부도 할 겸,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이웃나라로 떠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제가 적은 시선은 동생에게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읽다가 일본은 아니지만 일자리를 찾기 위해 대구로 떠나는 내 모습‘들’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앞으로 만나게 될 미래의 삶에 대해 생각합니다. 대구에 내려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겠다는 몽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애인을 만나고, 새로운 집을 구하고, 가끔은 고향집을 방문할 수 있는 여유로운 삶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내려간 그곳의 모습은 내 환상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곳보다 더 어려웠으면 어려웠지, 더 나을 것이 없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반짝 빛난 몽상은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저는 다시 고향집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글을 쓰고 있으니 이 낡은 재주를 통해 무엇을 해서든지 먹고 살아야겠습니다.   

  

희망     


통장에 잔액을 확인하니 다행히 몇 달 전에 쓴 글에 대한 원고료가 도착해 있었고, 이 돈을 모두 털어 동네 독서실을 끊게 되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독서실을 끊었는데 아늑하고 분위기 좋은 곳이어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많은 돈을 지불한 만큼 실패를 딛고 일어나는 나의 길이 조금은 순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독서실 소변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이 눈물만은 아니겠지요?”라고 말입니다. 남성은 울어서는 안 된다는 가부장적인 이 문구를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망설이다가 더 펑펑 울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울고 난 이후, 다시 시작해보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형 우리 포기하지 맙시다. 힘든 환경 속에서 글쓰기를 멈추지 맙시다. 자존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하잖아요. 형이나 저는 대단한 것을 누리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습니다. 소박한 꿈을 위해 걸어 가봅시다. 문학을 처음 시작하던 그때의 마음을 간직한 채, 다시 일어나 봅시다.    

   


※ 이 글에서 인용된 글은 다음과 같다.      

-: 김수영, 「미인」, 『김수영 전집 2 산문(2)』(3판 1쇄), 민음사, 2018, 211쪽.  

-: 장은진, 「외진 곳」, 『창작과 비평』180, 창작과 비평사, 2018, 131~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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