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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Mar 21. 2021

Star Trek Beyond

유용주 시인, 김영미 시인, 권민경 시인의 시집에 대한 단상



몽상      


부은 얼굴은 게으름의 상징인 것처럼 느껴져서 갸름한 얼굴을 유지해야 한다. 스트레스는 먹는 것과 운동으로 푼다. 음식을 적게 먹으면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다. 먹고 운동하고 다시 먹는다. 윤석 평론가는 은유 공동체에 와서 운동할 시간에 공부하는 것이 어떠냐고 조언한다. 운동을 해서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소식(小食)을 하면서 내공을 쌓는 것이 더 생산적이지 않으냐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때 그의 말이 옳다. 내 글은 2년도 되지 않아 밑천을 드러낸 것 같고 무엇보다도 독자들에게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윤석 형의 말처럼 독하게 내공을 쌓아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당분간 먹고 운동하는 일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밖에 없다. 이 습관은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지 않는 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내가 만든 습관이라는 기계적인 흐름 속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지독한 훈련으로 인해 새로운 습관1)을 싹 틔우지 않은 한 말이다.     

내 의지로 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한다.       


쌀을 먹으면 몸이 뜨거워진다. 며칠을 굶고 배를 채우면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아마도 신체의 작은 기관들이 음식물을 잘게 빻기 위한 움직임으로 보인다. 이것들도 움직이면 땀을 흘리는가 보다. 내 얼굴이 흠뻑 젖는다. 이처럼 178Cm의 작은 몸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수동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마음껏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내 의지로 할 수 없는 것들을 다시 생각한다.     

 

더 넓게 생각해 보면 나는 지구의 작은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내 몸속의 작은 기관들처럼 나는 지구를 살아있게 만드는 하나의 세포에 불과하다. 며칠 전 본 영화 《미드소바》2) 와 《라이온킹》3) 에서도 부속품에 대한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들은 것 같다. 넓은 광야를 뛰어다니는 자유로운 영양(羚羊)을 육식동물이 사냥해도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이들이 죽고 난 후,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순환의 순환이다. 이러한 논리 위에서라면 나는 작고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내 의지로 할 수 없는 것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한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오랜 시간 축적되었다. 사람들은 문명 속에서 생을 이어나간다. 특이한 것은 이 문명이 죽음을 막을 순 없을지라도, 삶의 패턴은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문명에 주체가 놓이느냐에 따라서 얼굴이 달라진다. 이러한 삶은 주체의 의지와 관련이 있으면서도 관련이 없다. ‘나’를 어디에 위치시킬 수 있느냐 까지는 주체의 의지이지만, 그곳의 정서와 분위기를 받아내는 것은 지극히 수동적이다. 물론, 개별적으로 차이가 생길 수 있지만 시・공간은 주체의 발걸음을 제한시킨다. 예외가 없다고 할 수 없으나, 큰 틀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것도 하나의 기계다.     


내 의지로 할 수 없는 것들을 몽상한다.      


도시적인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생각한다. 작은 땅덩어리에서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 없다. 하지만 에너지의 크기를 생각하면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장소가 바뀌면 생각하는 것도, 꿈꾸는 것도, 희망도 자연스럽게 바뀐다. 이 변화는 능동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수동적인 것이다. 그래서 이번 가을에는 시공간이 도시의 삶에서 벗어난 시집들을 찾았다. 이 시집들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우리에게 다가올까. 


누군가는 이들의 언어를 지루하고 낡은 것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이러한 편견은 도시적인 삶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의 시선으로‘만’ 대상을 쳐다보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집중과 쏠림이 아니라 다양성이다. 


그러나 내가 말한 다양성은 정말로 다양성일까. 시・공간을 우주4)로 확장해보자. 시・공간을 우주로 확장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확장해 보자.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은 star trek beyond 이다. 특정한 주제에 국한하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일 것이다.5) 이것은 몽상이다. 몽상의 몽상의 몽상이다. 쓸모없는 몽상이다.      


사모곡(思母曲)6)     


시인은 “40년 만에”(「여수떡」) 먼 길을 돌아서 고향에 발을 내디뎠다. 고향을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랜만에 도착한 고향에서 체험이 아닌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마을은 시인에게 낯선 감각을 제공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이곳은 그에게 익숙한 곳이 아니라, 생소한 장소로 다가왔다. 낯설기 때문에 그가 거닐던 마을 풍경은 별 어려움 없이 시적 소재로 전환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의식적으로 시집 속에 옮겨지는 것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시인이 고향에 돌아온 이유를 시집에서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인간에 대한 회의7)가 하나의 이유로 짐작된다. 시인은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다. 인간을 싫어하기보다는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과 이데올로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간이 뿜어내는 욕망과 욕심이 거북스럽다. 자신 또한 인간이기에 ‘나’를 경계할 수밖에 없지만, 나를 포함한 인간은 위험한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나무도 자살을 한다. 그 원인을 인간이 제공한다. 인간들의 이러한 행위가 부끄러웠을까. 고향에 돌아온 시인은 그동안 진 빚을 갚기 위해 나무를 심는다. 나무를 심는 것이 부족하다면 죽음을 통해 빚을 갚고자 한다.  


삶이 무엇인가를 되짚어주는 번뜩이는 시들을 시집에서 찾을 수도 있다. 가령, 소리를 삼키는 눈의 속성을 그린다거나, 대욕(大欲)에 사로잡힌 우리들의 이야기를 문제 삼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손톱과 발톱이 자라는 속도를 보고 창의적이지 못한 우리 교육의 현실을 비판한 장면, 명천 이문구 선생님이 생선회를 드시지 못하는 이유를 밝히는 작품도 이에 속한다. 


다소 진지해 보이는 이 시집에서도 웃음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학노트 열 권이 넘는 사연이 아내를 늙게 했다”(「일기장에 내린 첫눈」)는 애잔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명퇴하고 세계 일주 하자는 시인의 대답에 콧방귀로 응수하는 아내의 목소리도 담겨 있다. 버스에서 만난 라면 머리 할머니들에게 오래 사시고 좋은 음식 많이 드셔야 한다는 시인의 발언에, 버스 안이 웃음으로 가득 채워지는 훈훈한 장면도 펼쳐진다. 


하지만 이 시집에서 가장 눈에 밟히는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시집 첫 페이지에 적힌 ‘시인의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고향에 돌아온 시인은 가장 먼저 부모님을 떠올렸다.      




아부지,

나뭇짐에 매달려 흔들리는 

붉은 오미자 위에 

내려 쌓인다     


어머이, 

쇠죽솥 끓고 있는 

노란 메주콩 위에 

내려 쌓인다     


똥강아지, 

무 배추 뽑아낸 텃밭가 

파랗게 얼어붙은 쪽파 위에 

내려 쌓인다     


부스럼 까까머리,

외양간 뒤 먹감나무 

하나 남은 까치밥 위에 

내려 쌓인다     

                   「첫눈」 전문  

         



첫눈이 내리는 날인가 보다. 천천히 하늘에서 눈이 떨어진다. 사람이 지나가지 않는 이곳은 고요하다. 떨어지는 눈을 보면서 시인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똥강아지 그리고 부스럼 까까머리를 떠올린다. 첫눈이 쌓이는 높이만큼 그리움도 점점 더 커진다. 


그가 부모님을 기억하는 것은 미안해서다. 반거충8)이였던 아버지가 간경화로 돌아가실 때 시인은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평소 무서워서 말도 못 붙였던”(「술꾼」) 아버지의 피식 웃는 웃음을 잊지 못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없는 산골에서 유일한 친구였던 “권련”(「권력」)을 오래도록 피었다. 남편의 술주정과 짜증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어머니를 “사람 참 좋았”(「여수떡」)다고 기억한다.     


시인은 엄마가 보고 싶다. 하지만 만질 수 없다.  

    

그래서 엄마가 더 보고 싶다.     

 

일산부터 합정까지9)      


당산역과 합정역 사이에 놓여 있는 양화대교를 비 오는 날에 걸어 본 적이 있다. 귀를 바닥에 가까이 가져다 놓으면 자동차 소음과 함께 출렁이는 물결 소리가 힘차게 들렸다. 당신은 바닥을 오래도록 내려다보고 있으면 떨어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했다. 떨어져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고 해맑게 웃었다.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당신이 있어서 두렵지 않았던 그날은 오늘처럼 무더웠다. 


당산역과 합정역 사이에 흐르는 이 강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흐리고 흘러도 마르지 않을 것 같았다. 검은 강물은 자신의 일만을 묵묵히 이행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강철 같은 이 무게는 당장이라도 내 몸을 쓸고 내려갈 것 같았고, 어떠한 자비도 베풀지 않을 것 같았다. 



김영미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맑고 높은 나의 이마』에서는 ‘물’의 속성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밀착시킨다. 그래서일까. 스스로를 “물의 파수꾼”(「파수」)이라고 부른다. 그녀는 흐르는 물 주변을 습관처럼 돌아다니며 스스로를 마찰시킨다. 이러한 행위는 의식적인 것일 수 있으나, 그가 서 있는 장소가 가져다주는 무의식적인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여름엔 해가 길어 퇴근길에도 환했다 일산부터 합정까지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대면 한강을 따라 물의 조각이 빛났다 겨울엔 빛의 조각을 따라 내 얼굴이 떠다녔는데 여름엔 그 얼굴이 보이지 않아 좋았다 유람선을 탄 것처럼 버스의 아래가 찰랑이고 지는 해가 물속을 향해 차선을 바꿨다 붉고 따뜻한 나의 아래      


  버스가 합정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외국인묘지가 마중 나왔다 작은 언덕에 박힌 묘비들은 이마를 높이 들고 석양을 빛냈다 가지런히 손등을 포개고 서 있는 미어캣들과 안녕, 안녕 저렇게 다소곳한 죽음의 인사라니 귀가를 알리는 표지석을 지날 때마다 나의 집은 언제나 멀어졌고 또 언제나 가까워졌다      


                                                           「묘비들은 이마를 높이 들고」 부분




시인은 일산에서 합정까지 출퇴근한다.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댄 채 직장에 도착하고,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댄 채 집에 도착한다. 그녀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빛나는 물의 조각들과 조우한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자신의 몸처럼 이 조각들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강물은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겪으면서 별 어려움 없이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킨다. 시인은 이 변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물이 얼고 녹고 갈라지고 흐르는 것을 자연스럽게 피부에 새긴다. 


양화대교를 지날 때면 유람선 안에 서있는 것처럼 찰랑거리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는 늘 항상 흐르는 물과 친숙하게 지낼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 놓여 있다. 버스가 합정에 들어서면 미어캣과 외양이 비슷한 외국인묘지와도 만난다. 외국인묘지는 이마를 높이 들고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하지만 묘지가 스스로를 자랑하기보다는 화자가 묘지를 의식적으로 바라본 것이다. 이 두 속성이 시인에게 자극을 주었다.  


묘지를 의도적으로 인식하는 태도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 만난다. 그녀의 첫 시집 첫 작품인 「합정」에서 “아름다운 정원이었지만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는 목소리는 좀 더 나은 출구에 대한 시인의 바람이 느껴지고, 「한여름의 아이스링크」에서 들을 수 있는 “잡지 않아도 돼 / 이제 부러지지 않을게”라는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는 지금 현재의 삶을 바로잡으려는 시인의 의지가 느껴진다. “좋은 계절에 무덤으로 소풍을 가는 것”(「빗방울이 쪼개지던」)보다는 따분하고 지루한 어린이대공원에 소풍 가는 것이 더 낫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죽음과 친숙하게 지낸 시인의 일상이 느껴진다. 화자는 때론 “죽음을 예감해도 즐겁지 않은 저녁”(「모래내 9길」)을 생각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삶을 힘차게 끌어당기는 것 같다.   





        

나는 지금 막 독립한 바람     


나의 방엔 모서리가 없다      


투명한 벽지를 따라      


바람이 바람을 실어 나르는 바깥의 시간      


더딜 수 없는 아름다움을 건너     


어느 눈동자에서 나는 가장 아프게 터질 것이다.      


                             「비눗방울」 전문           




갑작스럽게 죽음을 응시하는 것과 긴장을 가진 상태에서 오래도록 죽음을 바라보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절박하고 충동적이지만 후자는 응시하는 힘의 깊이만큼 보다 나은 쪽으로 삶을 설계할 수 있다. 시인은 후자 쪽에 기울어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시는 너무나도 자유롭게 느껴진다. 죽음을 오래도록 여유 있게 지켜본 사람만이 부릴 수 있는 여유다. 폭탄처럼 터질 각오를 상상했던 시인10)이 있었지만, 누가 비눗방울처럼 장렬히 터질 생각을 하겠는가. 이것은 진지함 속에 스며든 적당한 유머다.     


물의 속성이 스며든 시11)를 모두 읽어 볼 수는 없지만, 「회현」은 지금 이곳의 풍경을 시의성 있게 잘 그린 것 같다. 그래서 독자 분들과 함께 같이 읽어보고 싶다.      





우리는 얼음 배 위에 서 있었다      


언 강은 아침부터 캄캄한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그 한 조각 위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떠내려가고 있었다      

당신에겐 나의 집이 없고

나에게는 당신의 집이 없고     


상점들이 창가에 화분을 내어놓는 계절이 지나갔다

폭염이 몰려오고 있었는데

우리는 얼음 배 위에서 눈을 마주 잡았다     


점신엔 살고 싶은 동네로 산책을 갔다

골목과 골목을 돌아 간유리로 벽을 만든 단독 주택 앞

황새는 여우의 입속에 부리를 넣어 혀를 빼 먹었다

혀 없는 약속을 나눴다     


오늘 우리가 집이 없다면 귓속에서 만나자 

외이도와 내이도를 거쳐 우리에 도달하자     


상류로 흐르는 강은 없어서

내려갈수록 우리는 가까워지고 합쳐졌다

반씩 접혀가는 신문지 위에서 버티는 아이들처럼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올라탔다     


차츰 투명해지는 바닥      


당신에겐 당신의 집이 있고

나에겐 나의 집이 있으니

오늘 우리의 집은 이렇게 가장자리로부터 잊기로     


하류를 위해 우리는 

빠르게 없어지고 있었다      


                         「회현」 전문     





한겨울 한강에 떠다니는 작은 얼음 조각을 시인은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위태롭게 보이는 작은 얼음 조각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사멸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떠올린다. 


시인은 이러한 흔들림을 붙잡아서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나‘들’의 집합일 수 없지만,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임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작은 얼음 조각 위에서 손을 잡고 서로를 응시하며 좀 더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재촉해 본다. 하지만 얼음 조각 위에 손을 붙잡고 서 있는 우리들은 “반씩 접혀가는 신문지 위에서 버티는 아이들처럼” 점점 더 아슬아슬해지고 위태로워질 뿐이다. 끝에서 우리‘들’은 어떠한 의미도 생성하지 못한 채, 사라질 것이다. 


시인은 어설픈 희망을 재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들에게 각자의 집이 있으니 “가장자리부터 잊기”를 권유한다.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혀 없는 약속”은 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녀는 물의 언어로 환상을 밀어내고 현실을 보여주었다.      


아주 기쁜 일12)      


  가혹한 삶이다.      


권민경 시인은 팔다리를 잃고 혼자서 화장실에 갈 수 없는 병을 얻었다. 한구석을 차지하며 살아가는 당신은 아픈 그녀의 이마를 자꾸만 쓰다듬었다. 하지만 이러한 목소리는 그녀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래서 시인은 당신에게 내 영혼이 오래 깃들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가 초년 운을 포기하고 말년 운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그녀의 작은 몸에서는 계절마다 새로운 혹이 곰팡이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잉태한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고기를 먹을 때면 젓가락으로 고기 살점을 뒤적거렸고, 삼키는 생각을 곧바로 거두었다. 동물의 아픈 부분을 씹기 싫어서다. 


처음으로 죽음을 맛보던 날을 잊지 못한다. 오랜 시간 식물처럼 살아야 했고 중력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로켓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무거운 질량이 하늘 위로 솟구칠 때면, 견디는 삶과 추락하는 삶을 떠올렸다. 하지만 생을 쥐어짜지 않았다. 오히려 게으르게 걸어갔다. 휘파람을 불면서 의자에 앉아 이상한 노래를 불러댔다. 이 여유는 여유를 통과한 여유의 여유다. 흔하고 식상한 여유가 아니다. 그럴수록 그녀의 신체는 단단해졌다. ‘삶-죽음’을 오고 가는 것은 열정과 투쟁이 아니라 일상에 가까웠다.     


암센터 난소암 병동에서 옆 침대 언니와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병원 생활을 버텼다. 몸을 씻을 때면 수술 자국을 작은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때마다 잊고 지내던 과거가 불쑥 튀어나와 그녀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그녀의 몸은 아프고 건강했다. 그녀의 마음은 건강하고 아팠다. 산전 검사(prenatal tests) 날에는 기대감과 불안감을 끌어안았다. 입술을 찢으며 웃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시인에게 이번 생은 혹독하다.


        



3월에 눈이 내립니다.

계절이 뒤로 돌아간 것 같아도

낮의 길이는 조금씩 길어지고 있어요.      


기분 나쁜 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건설되는 다리.

멀리 이어지는 길.

나는 어디론가 몰아지고 있어요.

불쑥불쑥 솟아나는 교각들.

화분에 심은 귀리.

솜털같이 가지런한 곰팡이.

장차 원령이 되겠다는 의지와 

현관 앞에서 보내는 시간.

긴 다리를 건너는 동안 눈보라가 시작되고 

길이 지워져도

자꾸 어디론가 어디론가

때론 뒤를 돌아보지만 

결국      


먼 곳부터 꺼지는 가로등. 

깜빡거리는 발가락.

발목은 희미해지고 

내가 지나쳐온 길이

어디까지 멀어지는지 알 수 없어요.

3월은 미친 듯 뒤처지고

나는 안락한 곳에 들지 못했습니다.      


낮의 길이가 제일 긴 날부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라지는 다리.

내 남은 시간 짧아지네요.     

아주 기쁜 일.      


                          「기나긴 이별」 전문     




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교각들은 불쑥불쑥 솟아나 다리를 만든다. 이 다리의 정체를 시인은 의심하기도 했지만 덤덤히 받아들인다.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물러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간다. 걸어온 길을 뒤돌아볼 때도 있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녀는 걷고 또다시 걷는다. 하지만 이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순간 다리는 “낮의 길이가 제일 긴 날부터” 사라진다. 


시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디론가 몰아” 세워진다. 운명이 만들어 놓은 다리를 용기 내 건너가 보았지만, 이 다리는 또다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흔들거린다. 시인은 그 어디에도 “안락한 곳”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오히려 아주 기쁜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반어다. 그렇기에 이 구절을 읽으면서 그녀의 손과 어깨를 말없이 토닥일 수밖에 없다.   

   

몽상의 끝     


병에 대한 주제로 며칠 전 이대미 작가의 『비우』, 김건영 시인의 『파이』, 손미 시인의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고(故) 오상룡 시인의 『텅텅 가벼웠던 어떤 꿈 얘기』를 묶어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시집들은 자신의 병을 객관화시켜 미래를 기약했지만, 권민경 시인은 병을 돌보는 태도가 달랐다. 미래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병과 마주 섰다. 이 싸움은 신체에 자라난 종양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펼쳐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예고 없이 죽음을 맞이한 사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사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할까.      


가을이 온다.                






1) 여기서 사용된 습관은 부정적인 맥락에서 쓰이는 습관이 아니다.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개념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의 글을 참조할 수 있다. 헤겔, 『정신철학』, 박병기․박구용 옮김, UUP(울산대학교), 2000, 226~227쪽.   

2) 한국에서 <Midsommar>은 2019년 7월 11일에 개봉했다. 

3) 한국에서 <The Lion King>은 2019년 7월 17일에 개봉했다. 

4) 나의 이러한 의도는 하재연 시인의 『우주적인 안녕』을 두고 한 말이다. 하지만 내 의도는 사후적으로 빗나간다. 

5) 여기서 특정한 주제란 도시적인 삶과 도시적이지 않는 삶을 구분하겠다는 나의 의도를 두고 한 말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나는 자기부정을 하게 된다.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글은 의도를 빗겨나간다. 의도가 사후적으로 사라졌다. 특정한 틀에 얽매여 논하지 못했다. 내 의지로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논했다.

6) 유용주, 『어머이도 저렇게 울었을 것이다』, 걷는사람, 2019. 

7) 「산에는」, 「폭설2」, 「지구가 망하지 않는 이유」, 「두더지」 등의 작품에서 이러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8) 시인은 자신의 시집 40쪽에서 ‘번거충이’를 “무엇을 배우다 그만두어 이루지 못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9) 김영미, 『맑고 높은 나의 이마』, 아침달, 2019. 

10) 김수영 시인의 「조그마한 세상의 지혜」가 이에 속한다. 

11) 이에 해당되는 직접적인 작품은 「파수」, 「직전의 강변」, 「회현」, 「銀」, 「한여름의 아이스링크」, 「비눗방울」, 「나의 여름」, 「물의 숲」, 「물의 결정」 등이 있다.  

12 )권민경,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문학동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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