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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Mar 20. 2021

갈림길에 서 있는 화자

이설야  시인의  신작시에  대한  몽상





‘나-화자’    

 

과거를 바닥에 내팽개쳐보자. 과거의 멱살을 붙잡고 눈 부릅뜨며 이제 그만 사라져 달라고 소리쳐보자. 희망을 가져다줄 테니 미래의 시간에게 조금만 더 찬란해달라고 매달려 보자. 그러면 현재는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상처가 낫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상처가 꿈틀거리지 않는다. 온갖 노력을 쏟아부어도 상처가 낫지 않는다. 상처는 아물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딱지가 생겼다. 간지러움을 피운다. 연고를 바르고, 바람에 말린다. 딱지가 완전히 굳어지길 기다린다. 수분은 모두 증발되었다. 조심스럽게 딱지를 벗긴다. 천천히 딱지를 밀어 올리자 하얀 티셔츠에 핏물이 튄다. 냄비에 넣은 라면 수프처럼 핏물이 거세게 흘러내린다. 


딱지가 굳고 굳은 딱지를 천천히 뜯어내는 일. 이 행위를 수년간 반복했다. 지루하고 조심스러운 이 일을 매일매일 동일한 크기로 반복한다. 일상이 되면 둔해진다고 주변에서 비웃었지만, 아직까지는 딱지 떼는 일이 지루하지 않다. 앞으로도 딱지 떼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면 이러한 가정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상처가 아물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상처가 더 이상 걸리적거리지 않는다면 어떤 것을 치료해야 하는가. 상처가 사라진 지점에서 흉터를 오징어 씹듯이 끄집어 올려야 하는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새로운 상처를 찾아야 하는가. 내 상처가 아닌 당신의 상처를 찾아 주변을 맴돌아야 하는가. 내 주변도 당신의 주변에서도 상처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닳고 닳은 글쓰기를 그만두어야 하는가.


평생 내가 해온 습관은 딱지를 떼는 일이다. 딱지를 잘 떼기 위해서 내가 가진 노하우를 모두 펼쳐 보일 수 있다. 이 방법으로 돈을 벌었고, 힘겨운 삶을 악착같이 버텼다. 잘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다. 오랜 시간 해왔기 때문에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잘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이것밖에 없다. ‘나-화자’는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다림 


이설야 시인의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속에는 괴기스러운 동네가 등장하고 이 동네에서 힘겹게 버틴 화자가 무섭도록 반복된다. 애처로운 흔적들은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평생토록 놓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시집 뒷부분에선 이러한 관성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새로운 흔적이 감지된다. 


시집 속에 등장하는 화자는 시인 주변을 맴돌며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 관성이 어느 순간 다른 시공간으로 확장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변화’는 시인이 새롭게 들고 올 두 번째 시집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연민’에 의한 시선이 어떤 방식으로 새롭게 진화되고 펼쳐지는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시선이 외부로 향할 수 있고, 지금처럼 내부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 두 경우가 아니라면, ‘내부’를 두 번 반복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시인이 걸어가는 길이 길을 만든다.  


연민은 지독한 감정이다. 연민은 사랑보다 따듯하지만, 매몰차기는 그 어떤 감정보다 냉정하다. 그래서 연민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며, 자연스러워야 한다. 연민이 자신 스스로를 의식할 때 연민은 괴물로 변한다. 이 괴물은 ‘나’를 속이고 ‘시인’을 속이고, 궁극에는 ‘시’를 속인다. 그녀의 신작 시 5편을 쪼그리고 앉아 기다린다.           

변신        

 

‘나’를 연민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물러난다. 시인은 더 이상 예전 기억에 얽매이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기억과 절연한 것은 아니다. 칼에 베인 수술 자국처럼 회복되는 것을 멈춘 채, 시인의 옷깃을 붙잡는다. 독기 있는 이미지들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내가 그 벌레를 본 것은 시계 분침이 13에서 14로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너는 나에게 전화를 했다. 너는 나에게 자꾸만 전화를 걸고, 나는 나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있다가,  너를 다 놓쳤다.   

  

                                                                     “먼지가 엉키면 흙이 되고, (…) 물이 되고, (…) 바람이 

                                                                      되고, (…) 여러 가지 벌레로 화하는바, 오늘 우리 사람                                                                        이란 곧 이 여러 가지 벌레의 한 종족일 것입니다.”*   

  

이런 기막힌 문장을 읽고도, 나는 그 벌레의 정체가 궁금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나는 벌레의 형체를 그림으로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려고 벌레처럼 기어 다녔다. 8절 도화지 위에서 벌레는 눈물을 뚝뚝 흘릴 듯이 슬픈 표정이었지만, 전혀 동정이라곤 일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입말로 풀어내기 위해 거의 두 시간이나 끙끙댔다. 그때, 한 문장이 지나갔다.    

 

“뒤돌아 벌레의 길을 가라”     


그러자 어디선가 날아온 벌레가 내 목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작은 발가락들이 꼬물거리는  알이 꽉 찬 벌레가, 내 뱃속에다 몸을 풀었다. 나는 이제 벌레를 사랑해야만 하고, 벌레를 살아야 할 것이다. 꽤 오래된 시간이 나를 끌고 다녔다.      


내가 비로소 벌레가 되었을 때,     


벌레의 밖으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유령벌레」전문    




화자는 ‘그 벌레’가 궁금하다. 벌레의 몸동작을 그림으로 그리고 흉내 낸다. 그런데 벌레를 떠 올리며 그린 그림이 특이하다. 아니 그 그림을 직접 그린 화자의 태도가 더 낯설다. “눈물을 뚝뚝 흘릴 듯이 슬픈 표정”을 짓은 벌레 그림을 보고 동정을 느끼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눈물 흘리는 대상을 바라볼 때, 손끝 떨리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화자는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공감하지 못함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다. 


‘그 벌레’가 놓인 상황을 ‘입말’로 풀기 위해 노력하지만 “뒤돌아 벌레의 길을 가라”는 외침이 있기 전까지 화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서 있다. 그때 반전이 일어난다. 무슨 이유로 반전이 일어났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벌레와 거리 두기를 하던 태도는 물러난다. 


“훔친 빨강 외투를 입고 / 아무 데나 도착하는”1)(「레드 멜랑콜리아」) 벌레들은 갑자기 화자 몸 속에 짐을 푼다. 그때부터 화자는 벌레와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 벌레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 사랑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데, 사랑하기 위해 애쓴다.  화자는 벌레를 사랑 ‘해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린 듯 보인다. 사랑하는 행위는 사랑한다는 말보다 앞선다는 점에서 ‘~해야만’은 화자를 괴롭힌다. 그런데 다시 반전이다. 화자는 “비로소 벌레가 되었을 때”, 벌레 밖으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 속에는 더 이상 특정한 의지에 구속되지 않겠다는 결의가 담겨 있다. 


이 시는 자신을 두 번 반복했다는 점에서 활기를 띤다. 이 시는 자기 성찰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고자 노력한 시인의 땀방울이 맺혀있다. 시인은 벌레의 벌레가 되었다. 앞으로 걸어갈 그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시커먼 공장 굴뚝 연기를 바라보며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오지 않을 너를 기다린다.

눈보라 치는 여러 갈래 길

한참을 지나왔다.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커지는 검은 눈덩이들     


돌아보면  

길이 지워진다.

또 돌아보면

거기 내 발자국 얼어있다.     

가지 부러진 나무에 앉아 있는 눈을 

닮으라.

닮으라.

저런 눈물 흘려보라고

눈은 내린다. 

내려 쌓인다.     


눈은 내려와

앞을 보지 말라고

내 눈을 지워버린다.

나는 다 지워져

커다란 눈사람이 된다.    

 

내 안에서 죽은 눈들

눈보라로 다시 돌아오는 눈들 

아무것도 보지 말라고

눈은 내려온다.


                          「눈사람」전문 





눈이 내리는 날. 눈이 쌓이는 날. 내리는 ‘눈’은 화자에게 말한다. “가지 부러진 나무에 앉아 있는” 자신을 닮아보라고 말이다. 이 당부는 “저런 눈물 흘려보라”는 표현으로 변주된다. ‘저런 눈’이 지칭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잘’ 눈물 흘리는 것과 관련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흘리는 눈물이 부러진 가지에 사뿐히 내려앉은 눈의 형식을 닮은 것일까.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화자에게 “아무것도 보지 말라고”하는데 이 의미는 무엇일까. 보지 않음으로써 볼 수 있는 역설의 쳐다봄을 의미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시인은 더 잘 보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지독한 과거에 묶여 있던 첫 번째 시집 이후, 다른 방식으로 울어야 할 것 같은 갈림길에 시인은 서 있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을 갱신하기 위해 노력한다. “눈보라 치는 여러 갈래 길”을 지나 왔던 시인은 또 다시 새로운 길을 가고자 다짐한다.      

 

물에 불은 얼굴과 젖은 시계       




지구를 수리하려고 

녹색 가방 안에서

십자드라이버를 꺼내 들자

지구본이 박살 났다     


천국은 지구 밖에 있겠지 

지구만 박살 내면  

지구 밖에 있는 천국에 갈 수 있을 거야

지구 밖으로 가려면 하늘을 뚫어야지     


아니 

하늘도 다 박살 내는 거야

그럼

하늘에선 누가 기도를 들을까

바다도 다 메우면 누가 가장 많이 울까    

 

음악 속으로 점점 물이 불어나고 있다


물에 불은 얼굴들

십자드라이버를 들고 

박살이 난 지구본을 

수리하러 

돌아오고 있다


                             「지구 위의 지구본」전문 




지구를 수리하기 위해 녹색 가방에서 십자 드라이브를 꺼내 들자 지구본이 박살 나 버렸다는 독특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시는 지구가 없어진 시점에서 새로운 ‘곳’을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상상이 일반적인 판타지 영화처럼 새롭고 포근한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화자는 병든 지구를 떠나 지구 밖에 있는 ‘천국’으로 향하고자 한다. 화자는 천국에 도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감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구를 박살내고, 하늘도 박살내고자 한다. 하지만 박살내고자 하는 이 행위 속에는 자신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늘이 사라지면 기도를 듣지 못하는 하늘의 입장을 걱정하기도 한다. “바다도 다 메우면 누가 가장 많이 울까”를 염려한다. 


시인이 경험한 천국은 희망적이지 않다. 그가 경험한 “천국은 점점 더 가난”(①:「아버지 별명은 생쥐」)해지는 장소이자, “모두가 천국을 다녀 왔다고 하는데, 천국이 저마다”(①:「아버지 별명은 생쥐」) 다른 곳이며, “천국은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하는데, 아이들의 입에서는 검은 연기가 흘러”(①:「아버지 별명은 생쥐」) 나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천국은 오히려 ‘천국 아님’과 관련 있다. 


그렇다면 ‘천국’을 꿈꾸는 행위가 역설적인 맥락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에게 ‘천국’은 ‘신비한 그 무엇’ 일 뿐,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오히려 무겁고 묵직한 구체적인 대상이 시인을 돕는다. “물에 불은 얼굴들”이 나타나 십자드라이버를 들고 부서진 지구본을 수리한다. 여기서 ‘물에 불은 얼굴들’은 누구일까. 박살 난 지구본을 고칠 수 있는 ‘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지구본을 수리하게 되는 것일까.     



 

내가 돌 속에 숨어 

죽은 척 숨을 고르는 동안     


시계는 조금씩 죽고 있었다      


다 된 꽃을 참느라 

비명이 늘어가는 저녁     


해가 지는 몇 분간의 일들은 뒤늦게 내가 되어간다     


파랗게 죽어가던 

시계가 기침을 한다     


피던 꽃들 지고,     


꿈에서 만난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왔는데

다, 죽었다     


물에 젖은 마루가 삐거덕거리는 아침     


시계가 다 죽었다 


                  「물에 젖은 시계」 전문  




이 시에서는 조금씩 죽어 가는 시계가 등장한다. 시계는 조금씩 죽어간다는 점에서 언젠가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특별한 내용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시계가 죽어가는 과정이 눈에 밟힌다. 


내가 돌 속에 숨어 죽은 척 숨을 고르는 동안 시계는 천천히 죽어간다. 꽃 피우는 것을 참느라 비명이 늘어가고, 해가 지는 몇 분간의 일들은 뒤늦게 내가 된다. 파랗게 죽어가는 시계는 기침한다. 피던 꽃들은 진다. 물에 젖은 아이들을 꿈속에서 대려 왔지만 결국엔 모두 죽는다. 마침내 물에 젖은 시계는 완전히 고장 난다. 


시인에게 있어서 참는 행위와 숨는 행위는 무엇일까. 시계는 결국 “물에 젖은 마루가 삐거덕거리는 아침”이 될 때까지 수리되지 못하는데, 숨거나 참는 행위가 역적 된다면 멈춘 시계를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것일까. 꿈 속에서 만난 아이들을 안전하게 데려올 수 있을까.      


커다란 눈      




파도와 칼이 지나간, 

아귀의 뱃속에서 나온

조기와 오징어의 눈은

살아 있다     


어느 흐린 날은 

어느 발이 놓친

검정 장화도 나왔다고

빨간 고무장갑을 낀 여자가

네모난 상자 안에서 이쪽에다 말했다    

      

검은 입속에 커다란 눈이 있다     


감지 않는 눈     


줄이 그어진 눈     


심야에도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 전문 




시인은 어느 날 아귀를 손질했었나 보다.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파도가 지나간 아귀 목구멍에 칼을 들이 된다. 미끈한 몸을 터트린다. 그러자 아귀 목구멍 속엔 조기와 오징어가 소화되지 못한 채, 잡혀 먹기 전 그 모습 그대로 화자를 쳐다본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했는지 모른다. 아귀의 검은 입은 낯선 것을 뱉어내는 장소로 인식된다.  


아귀의 뱃속은 살아 있지만 죽을 수 없는 존재가 살아 숨 쉬는 장소이며 이 공간에서 화자는 죽었던 대상이 죽지 않음을 확신하게 된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검정장화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낯선 감정과 마주할 때, 화자는 걸어가던 발걸음을 멈추었을 것이다.      


p.s       


시인은 갈림길에 서서 잘 울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고, 비틀어진 무엇인가를 펴기 위해 매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에 불은 얼굴”과 “물에 젖은 시계”는 걸어가던 시인을 멈추게 한다. 이 힘들은 앞으로 시인이 쓰게 될 시작품에 적지 않는 영향을 미칠 것으로 짐작된다.      


애정을 품고 한마디 더 보탠다. ‘진정한 시’는 ‘애수’를 넘어선 힘의 세계에 있다. 2)우는 행위 자체를 비판할 수 없지만, 울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는 벌레를 사랑했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우는 것을 우는 행위로 뚫어 버리는 방법도 있지만, 우는 것이 습관이 되면 자연스럽게 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연기하게 되는지 모른다. 감정마저도 우리(나-화자)는 달아나야 하는지 모르겠다.       




1) ‘유령벌레’는 시인의 첫 시집에 수록된 「레드 멜랑콜리아」에서도 등장한다. 이 시에서 화자는 ‘우리’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는다. “우리는 염소처럼 울고 / 말처럼 달렸지만 / 흩어진 구름 아래 / 늘 제자리였다”라고 말이다. ‘늘 제자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노력이 큰 소득을 보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득을 위해 노력한 행위는 무엇인가. 이 노력은 ‘혁명’ 행위다. 여기서 제시된 혁명이 어떤 맥락에서 적힌 혁명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음과 같은 표현은 혁명 주체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즉, “혁명을 말하던 책상들 / 금세 더러워졌다 / 햇빛 속으로 망명한 자들 / 축축한 그림자들을 / 결국 버렸다”는 것이 그것이다. 혁명이 무너진 자리에 “훔친 빨강 외투를 입고” ‘유령벌레들’이 내려앉는다.(이설야, 「레드 멜랑콜리아」,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창작과 비평, 2017, 130-131쪽.) 이 각주 이후, 이설야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을 인용하는 경우 인용 표시를 따로 하지 않고, 첫 시집(①=『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명칭과 시 제목을 적는다. 


2)  김수영, 「예술작품에서의 한국인의 애수」,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2007, 340~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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