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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Mar 26. 2021

담배를  끊으면  멋진  사람이  되는 거다

황현산 선생님의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에  대한 단상




“담배 끊은 지 1년 5개월, 이제 완전히 끊은 것 같다. 담배 생각 안 하고 글을 쓸 수 있다”       


        


물음      


Y형 아폴리네르는 정신이 메말랐을 때, 아무 단어나 써놓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해요.      


저도 이 방법으로 아무 단어나 써놓고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밀고 나가려고 해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몸속에 꿈틀거리는 감정과 의욕과 욕망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아무것이나 써놓고 글쓰기를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방법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어요. 제 유일한 돈벌이가 여기서 시작되거든요.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돈을 벌어야 사람 구실을 하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쓸모 있다고 생각하게 된답니다. 입장은 조금 다르겠지만 며칠 전에 읽은 김봉곤 씨의 소설 「그런 생활」에서 “형 문제가 아니라면 소설을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해”라고 말한 것처럼, 저 또한 미래의 당신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글 쓰는 일이 제일로 중요해요. 이런 저의 악머리를 Y형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Y형 전 요즘 좋은 비평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요. 여기서 ‘좋은’이라는 말을 붙였으니 Y형에게 비평가의 길을 묻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노골적으로 물어볼게요. Y형 오랜 시간 비평 쓰셨잖아요. 회사에서 준 공로상이라고 T 시인이 술자리에서 형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공로상 받는 것도 쉽지 않잖아요. 그러니 대답해주세요. 비평이 뭐예요. 좋은 비평은 무엇인가요. 하지만 형께서는 이런 저의 절박한 대답에 매번 모범적인 대답만을 늘어놓더군요. 그런데 저는 모범생이 되기 싫어요. 규격에 맞추어진 황금 잉어빵을 기계처럼 찍어대기 싫다고요. 왜 형은 늘 시스템에 안착할 수 있는 요령만을 가르쳐주시나요. 난감합니다. 그래서 형에게 물어보기보다는 우리 시대의 스승으로 불렸던 황현산 선생님에게 도움을 받기로 했어요. 선생님께서는 좋은 비평에 대해 차분히 설명해 주실 것 같아요.        




                                

비평     


잠깐만요. 담배 한 개비 물고요.      


Y형 금연해보셨어요. 금연 참 쉽지 않죠.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금연에 성공하셨어요. 이 금연 행위 때문에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는 참 지독한 책이 되는 것 같아요. “증오가 사랑보다도 더 위대하는 것”을 금연 행위를 통해 사후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선생님의 주장은 믿음이 가요. 말만이 아닌 몸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금연하신 이유가 궁금 하시다고요. 뭐예요 형. 며칠 전에 한국현대시사 종강하셨다면서요. 평론가라는 분께서 그것도 모르고. 헛웃음이 나옵니다. 몇 년 전에 상식을 무시한 폭군이 이곳을 지배했었잖아요. 불과 몇 년 전 일인데도 불구하고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을 보니, 지금 이곳의 삶이 많이 팍팍하신 것 같아요. 이해합니다. 오늘은 지옥은 아니지만 지옥 같은 현실 이야기하지 말고 비평에 대해서만 논해요.

     

선생님께서는 예술가의 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계세요. “문학이건 다른 예술 장르건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것도, 어느 길로 가야 한다는 것도 없다”고 말이에요. 이 말속에는 새로운 길을 가야만 하는 예술가의 책무가 담겨져 있어요. 유튜버도 장사꾼도 시인도 소설가도 화가도 판화가도 건축가도 자신의 목소리를 새롭게 발설할 때, 사람들의 닫힌 귀가 열리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이러한 새로움보다도 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 더 구체적으로 다가왔어요. 자신의 “작업이 무슨 일을 했는지, 그게 왜 필요한지를” 동시대 사람들에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선생님께서는 글쓰기의 ‘쓸모’를 언급하고 계세요. 우리가 화폐를 논할 때 자주 언급하는 사용가치의 쓸모없음-있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쓸모없음-있음이에요. 외롭고 슬프고 높은 쓸모없음-있음이죠. 아무튼 선생님의 이 발언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글쓰기로 확장되고 결국에는 ‘나’의 비평이 지금 이곳에서 왜 필요한지 묻게 만들어요.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쓴 비평이 “내 글을 쓰는 것”이라고 말해요. 특정한 작가에 대해서 글을 쓸 때, 작가에 대해서 글을 쓰되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일 수밖에 없다고 말해요. 저 또한 마찬가지겠죠. 얼마 전 R 형 앞에서 비평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지 못한다고 한탄했지만, 선생님의 이 문장을 읽고 난 후, 직접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몽상을 하기도 했어요. 이것을 지금에서야 ‘몸’으로 깨달은 것이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후적인 측면에서도 내가 쓴 글들을 떠올려 보니, 절반은 내 이야기이고 나머지 절반은 작가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마찬가지겠죠.      


또한 선생님께서는 비평가들이 “유명해진 사람들의 등에 붙어” 기생하는 것을 못마땅해했어요. 여기서 유명해진 사람들은 유명한 작가만을 한정한 것은 아닐 거예요. 지금 유행하는 당대의 담론도 포함되겠죠. 오히려 선생님께서는 유명한 작가보다도 젊은 작가들에게 시선을 돌려 그들의 가능성을 논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계세요. 지금 유행하는 담론을 뒤쫓기보다는 새로운 담론을 만들 것을 권유하고 있어요. 이 방법이 정직한 미래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는 소통이 되지 않는 시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을 혼내고 있어요. 그들에게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읽어보기 위해 노력해 본 적이 있느냐고 비판하고 있어요. “우리는 도스를 썼는데 너희들은 원도우를 쓰느냐고 화를 내는 사람”들에게 무슨 대화가 가능하겠느냐고 핀잔을 주고 있어요. 이 주제는 이 책을 통과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예요.      


다양한 내용을 품고 있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어쩌면 소통 가능한 시와 소통 가능하지 않는 시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더 나아가 이러한 흐름은 자연스럽게 ‘상투적인 시’와 ‘상투적이지 않은 시’에 대한 논의로 확장되고 있어요. 선생님께서는 비평의 중요한 덕목을  “그 대상이 허용될 만한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것보다 상투적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여기서 상투적인 것은 사전적 의미에서 논해지고 있는 상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선생님은 이 지점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어요. “오정희 문장은 쉽지만 상투적인 문장”이 없다는 거예요. 저는 이 말을 언어가 ‘죽음’을 통과했느냐 못 했느냐로 이해했어요. 난해시와 가짜 난해시를 구별하는 기준도 마찬가지겠죠. 최근에 출간된 시집으로 따지자면 박송이 시인의 『조용한 심장』과 고(故) 오상룡 시인의 『텅텅 가벼웠던 어떤 꿈 얘기』, 고(故) 배영옥 시인의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등이 여기에 속한다고 생각해요.      


기억      


선생님의 책에 적힌 다음과 같은 문장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어요. 가령, “고결한 것의 고결함을 설득하기는 쉽지만 천한 것을 천하다고 말하긴 쉽지 않다”, “문학에서는 한 작가를 후대의 역사는 영향력으로 평가하고, 당대의 비평은 재능으로 평가한다”, “비평가가 작품의 의도를 따진다는 것은 작품을 의도로 환원하기 위함이 아니다. 의도와 해석의 지평선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등이 그것이에요.   

   

하지만 저는 다음의 문장이 더 절실하게 다가왔어요. 시의 분위기를 파악하거나 시와 연결될 것 같은 인문학적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큰 메리트가 없다는 거예요. 물론, 선생님께서도 이 지점을 외면한 것은 아닐 거예요. 이것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이 있음을 강조한 것 같아요. 그것은 “시의 설명은 우선 시어 하나하나가 무슨 뜻이며, 그것이 어떻게 일상어와 연결되고 어떻게 일상어를 뛰어넘는지를 모두 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거예요. 저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반성하게 되었어요. 보다 정밀히 시를 읽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어요. 이 깨달음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낀 것이 백번 천번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시인은 믿을 수 없지만, 그들이 특별한 존재는 아니지만, 시적 순간만큼은 진실하다고 믿기에 앞으로 더 많은 공을 들이기로 했어요.   

  

이 책은 글의 사후성, 비평가의 길, 새로운 작가 찾기, 새로운 담론 탐색 등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사적인 정보들이 가득 담겨 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2014~2018년을 통과하면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불합리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어요. 누군가는 이 책을 비판할 수 있어요. 틔위터에 쓴 짧은 글에 불과하다고요. 하지만 발터벤야민이 사진에 대해 논하면서 아우라를 확인한 것처럼 1945년생이신 선생님께서 틔위터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의 예술을 펼쳐 보인 것은 새로운 실험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은 이 각오를 2014년 11월 21일 오후 8시 13분과 14분에 피력했어요. 선생님은 저처럼 취미나 재미로 이 매체를 활용하지 않았어요.      




1. 문학의 전문가로 문인들에게 우정을 표현한다.

2. 한국어의 제1급 사용자로(이 점에선 겸손이 필요없다) 짧은 글짓기를 한다.

3. 번역의 경험을 지닌 이론가로서 정보를 교환하고 짧은 토론을 한다.

4. 진보 성향의 독서인으로서 내 생각을 메모한다.

이 정도다. 잘할 것 같다.      





Y형 비평이 무엇인지 여전히 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를 읽으면서 힘을 얻을 수 있었어요. 2017년 8월에 등단한 이후 제가 쓴 글들을 되돌아보게 되었어요. 제 자신을 냉정히 쳐다보는 과정 속에서 저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저는 선생님의 ‘모든’ 의견에 동의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겸손하게 배울 지점이 많은 것은 분명합니다.       


Y형 노력상 받았다고 비웃은 것 같아서 미안해요. 다음에 소주 한 잔 해요. 어쩌면 형이 부러웠는지도 모르겠네요. 저 속물 같죠. 맞아요. 저 속물이에요.  

    


                                                                                                                       2019년 8월 19일            



* 이 글에서 인용한 참고문헌은 다음과 같습니다.    

  

ⓐ 김봉곤, 「그런 생활」, 《문학과 사회》 2019년 여름호(126호), 문학과 지성사, 2019, 196쪽.

ⓑ 황현산,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난다, 2019, 429쪽, 203쪽, 335쪽, 335쪽, 94~95쪽, 205쪽, 156쪽, 106쪽, 151쪽, 232쪽, 51쪽, 350쪽, 93쪽,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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