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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Mar 31. 2021

군산

최원 시인의 『미영이』에 대한 단상


몇 달 만에 형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요. 지금은 가을인데 이 편지가 형에게 도착할 무렵에는 찬 바람이 거세게 불어올 것 같아요. 곧 겨울이 다가온다는 말이겠죠. 제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곳은 분주함 속에 잔잔한 음악이 들려오는 스타벅스 안이랍니다. 창가 쪽에서 바라본 풍경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비슷합니다. 여러 상점들이 즐비해 있고 자동차와 버스도 평소처럼 지나갑니다. 이렇게 앉아 창밖을 보고 있으면 하얀 눈이 갑자기 내릴 것 같아요. 이 눈을 바라보면서 저는 누구를 그리워할까요.  


형 저는 군산대학교 도시인문센터 전임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었어요. 제가 이곳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일하게 될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군산에 와 있답니다. 여태껏 살면서 군산에 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군산은 내게 장률 감독의 영화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보증금 500에 월세 25만 원 하는 좋은 집을 얻었고 냉장고와 세탁기도 장만했어요. 형께서는 저의 이러한 소비 행위에 대해 깜짝 놀라실 것 같아요. 늘 항상 기생충처럼 살았던 네가 고향인 인천을 떠나 홀로 군산에 산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맞아요. 이번 군산 행은 정말로 예상치 못했어요. 박사학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강의 하나 받지 못하던 제가 이렇게 독립을 했으니 말이에요. 물론, 완전한 독립이라고는 볼 수 없어요. 600만 원 정도의 빚을 어깨에 짊어지고 내려간 군산 행이었으니 말이에요. 내려오기 직전 제 통장에는 68만 원이 전부였답니다. 


한 선배는 제게 재촉했어요. 이곳에 원서를 내보라고 말이에요. 처음에는 가고 싶지 않았어요. 공무원이 되고 싶었거든요. 환경미화원 일을 하면서 글 쓰는 삶을 상상했어요. 그래서 뭉그적거렸답니다. 그런데 선배가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꾸짖었어요. 해보고 안 맞으면 그만이니 한번 도전해 보라고 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군산에 오게 되었답니다. 군산 행은 제게 뜻밖의 행운이었어요. 제가 지금 행운이라고 적은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했기 때문이에요. 처음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답니다. 




인문도시센터(이하 “갑”이라 함)과(와) 문종필(이하 “을”이라 함)은 다음과 같이 근로계약을 체결한다. 




20년 동안 저는 기생충처럼 살았고 틈틈이 아르바이트하면서 생계를 버텼는데 ‘계약서’ 같은 것을 작성해보니 이상하고 야릇한 기분이 들었어요. 물론 이 직업은 정년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10개월 정도의 계약직이고 저의 실무 능력에 따라 2년 정도를 더 할 수 있는 조건이랍니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번 일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제게는 혁명적인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어요. 무엇보다 불혹의 나이에 독립하게 된 것이 가장 놀랐고, 제 밥그릇을 홀로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데 자부심을 느끼게 됩니다. 



어렵게 얻은 이 직업은 언제 잘릴지 몰라요. 불안한 마음에 강박적으로 연구원 일을 배우려고 노력했어요. 이런 제 모습을 보며 누군가는 안쓰럽게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넉넉하답니다. 이사 과정에서 쓴 돈을 갚아야 하지만 이 빚은 아픈 빚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빚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에게 편지를 쓸 때는 항상 결핍된 상태에서 글을 쓰곤 했는데 오늘만큼은 이렇게 풍선처럼 붕 떠 있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네요. 



전 이곳에서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해요. 지금 현재는 처음 써보는 공문서와 회계일이 낯설어 곤욕을 치르고 있답니다. 혹여나 일하지 못해 쫓겨나는 상상을 하기도 했어요. 그만큼 제게 이번 기회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기회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이곳에서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오랜만에 형에게 편지를 썼는데 저의 이러한 소식이 형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겠어요. 형께서는 오랜 시간 팍팍하게 살아왔으니 당분간은 군산을 즐기면서 여유 있게 살아보라고 말해주실 것 같아요. 



그런데 제게 고민 하나가 생겼어요. 제 몸이 완전히 변해버렸어요. 제 글쓰기의 원동력은 가난이었고 불안이었고 외로움이었고 애인 없음이었고 배고픔이었고 위태로움이었고 쓸쓸함이었는데 한순간에 이 무기들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그래서 걱정이 들었어요.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지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해야 할지를 고민했어요. 형 저는 이 순간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까요. 형이라면 제 입장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면이 ‘시집 계간평’인데 이 규칙을 깨고 제 이야기로 가득 채우고 있다는 거예요. 저 참 비겁하죠. 축구 경기에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저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형 저는 지금 시집 계간평을 쓸 수 없어요. 하지만 계간평을 쓰기 위해 시집을 다시 들춰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제가 쓰는 글이 돈을 받고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집 계간평’의 규칙에 따라 시집을 소개하고 시집 속에 숨겨진 장점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럴 수 없어요. 망가진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읽은 시집을 소개하면 될 것 같다는 꾀가 생겼어요. 이 꾀는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에서 파생된 감정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부끄러움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머릿속에 머물러 있는 시집에 대해 이야기 해야겠어요. 형께서는 저의 이러한 무례함을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표준근로계약’을 맺었으니 너그럽게 저의 부끄러움을 쓰다듬어 주실 것 같기도 해요. 




몽상 


가장 먼저 떠오른 시인은 최원 시인의 『미영이』였어요. 이 시집과 처음 만난 날은 『내일이 있어 우리는 슬프다』1)를 쓴 김광섭 시인의 출판 기념회 날이었어요. 종로의 한 허름한 피맛골 술집에서 김광섭 시인과 『오늘은 오른손을 잃었다』2)의 차성환 시인 『미영이』3)의 최원 시인  그리고 곧 시집이 나올 김정웅 시인과 만나게 되었어요. 처음 보는 자리라 조금은 어색했지만 ‘시’라는 매체는 우리들의 서먹서먹한 경계를 풀어 주었어요. 저는 이런 조촐한 출판기념회가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그날을 오래도록 기억한답니다. 김광섭 시인의 시집 해설을 쓴 인연으로 차성환 형과 최원 형의 시집을 붙잡을 수 있었던 그 날은 제게 특별했습니다.


   



최원 형의 시집 『미영이』는 제게 동료의식 같은 느낌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나요. 저 사람도  나만큼 외롭구나 겉은 씩씩하지만 나와 비슷한 구석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감정이 인연이 되어 최원 시인과 좌담회4)도 하고 제 박사논문 토론자5)로 섭외하기도 했어요. 제가 그를 호명한 이유는 아주 간단해요. 최원 시인은 앞과 뒤가 동일하려고 노력한 시인이었어요. 이런 정직함이 나를 이끌었던 것 같아요. 


『미영이』에 수록된 시들 중 제가 형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미주 명신 아진 그리고 나」6)예요. 저는 이 시에 대해 각주를 붙이지 않을 거예요. 이 시를 형께서 직접 읽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 이 시에 대해 아무런 말도 붙이지 않을 거예요. 김학중 시인의 「판」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저는 독자들에게 시 읽기를 권유하려고 해요. 비평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비평은 지나치게 비평가들에게 해석만을 권유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시만 인용하려고 해요. 




우리는 회현동의 삼류 호텔 술집에 함께 있었다 명신과 나는 술을 나르고 미주는 술을 따랐다 아진은 미주의 옆자리에서 사내들에게 쉽게 가슴을 꺼내 보이던 여자 미주는 아름다운 구슬처럼 화장한 검은 눈이 도도한 여자 그런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사내는 없을 것이므로 미주가 지나칠 때 이는 바람 앞에서 명신과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곤 했다. 그것이 그녀의 영혼이라고 생각했던 명신은 언제부턴가 미주의 앞에서 말을 쉽게 잊었다 미주는 많은 사내들이 찾는 여자였으므로 취한 메뚜기처럼 룸을 옮겨 다니곤 했는데 그러다 사내들에게 들키곤 했는데 명신은 미주 대신 따귀를 맞았고 미주는 호텔 방 키를 들고 사내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날 고깃집에서 명신은 마른 화초처럼 취했다. 어릴수록 흔한 일에 분노했고 명신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막 전역한 명신은 눈이 붉은 사내 미주와 아진을 꼬드겨 질펀하게 놀아 볼까 반쪽짜리 농을 치던 나를 노려볼 때도 복학할 때까지만이라고 더듬더듬 말할 때도 그랬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내들은 미주를 사랑했을 것이다 하룻밤 사랑하고 한동안 잊고 다시 하룻밤 사랑하고 기나긴 시간 잊고 다시 하룻밤 사랑하고 긴 시간 잊곤 하며 시간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몇 년 후 명신은 지하철 기관사가 됐다고 마지막 전화를 했다 그렇게 흘러가던 어느 아침 출근길 미주를 본 것이다 내가 열차에서 내리고 반대 방향에서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어두워지면 모이고 해 뜰 무렵 헤어지던 시절의 기억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그 원숙한 여인은 미주였을 것이다. 찌익찌익 웃상자에 박스 테이프 붙이는 소리가 먼지처럼 매캐하던 회현동의 지하철역이었으므로 미주여야 했다 명신 또한 그 시각 뜨거운 바람을 몰고 들어오던 열차의 운전석에서 미주를 봤어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아직 열차가 움직이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봤어야 하는 것이다 한 시절의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듯 어둠 속을 달리는 명신에게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서도 한때의 사랑을 단번에 찾아내는 것은 의무였을 것이다 그날 거기에 미주가 있었고 내가 미주를 봤으며 명신도 미주를 봤어야 하는 것이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뼈저리게 공감하며 명신은 두 눈의 붉은 악력으로 미주를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 나와 아진 그리고 낡은 술집에서의 한때를 기억해 냈어야 한다 그 시절의 표정으로 문 닫는 것을 잠깐 잊어도 좋았을 것이나 명신은 미주를 향한 욕망 혹은 채우지 못한 욕정 대신 자신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떠올리며 열차를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운행은 순조로울 것이고 명신은 조금 들뜬 그러나 중년의 목소리로 안내 방송을 했을 것이다 문 닫습니다 열차 출발합니다 이 열차는 당고개를 출발하여 오이도까지 가는 열차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니다 특별한 나의 특별한 방송을 중년의 명신은 했을 것이다 지하를 벗어나 중천을 향해 서서히 기어오르는 태양빛 가득한 지상을 언덕을 지나 평지로 때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흰 구름의 동쪽에서 노을 짙은 서쪽으로 나아가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바랄 법한 생을 빗댄 방송을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랬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쁜 출근길 말 없는 사람들이 생은 어찌 됐건 해피 엔딩이라고 믿으며 출근 도장을 찍을 것이고 하루를 또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모두가 바라듯 해피 엔딩이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이 상투적인 이야기를 써 나가는 이유이지 않은가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의 가볍게 쥔 주먹에서 사연의 모래가 흘러내려 세상은 뿌연 삶의 색이다 



                                                                    「미주 명신 아진 그리고 나」 7) 전문 



최원 시인의 시집 『미영이』에서는 「미주 영신 그리고 나」처럼 서정적인 시도 있지만 「국가네 공갈빵처럼」 정치적인 시도 확인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시가 참 특이해요. 잡지 발표본과 시집에 수록된 작품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전문용어로 개작이 이뤄진 것입니다. 저는 시집에 수록된 시를 읽고 다음과 같이 메모를 했어요. 




이 시는 몰입감을 극도로 끌어 올린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 구절 “민중의 판단”이라는 시어가 지나치게 의식적으로 쓰였다. 자연스러운 감정이 나열되는 앞의 흐름과 어긋난다. 이 구절로 인해 시가 비틀어졌다. 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저의 이러한 직감이 수학처럼 떨어진 거예요. 처음 발표 지면에는 ‘의식’적인 흔적을 찾을 수 없었어요. 오히려 개작하기 전이 훨씬 좋았답니다. 왜 시인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포기하고 개작을 한 것일까요. 개작은 보다 더 좋은 곳을 향한 욕망인데, 이 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잃을 것이 더 많았던 행위였어요. 형께서 직접 확인했으면 하는 바람에 잡지 발표 본과 시집에 수록된 작품을 동시에 인용하기로 할게요.   




【잡지】


그 배고프고 가난하던 시절 아버지는 국氏 아저씨와 막걸리를 마시는 날이면 공갈빵 한 봉지를 들고 오셨다 국氏 아저씨는 동네에서 공갈빵을 가장 맛있게 굽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공갈빵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국가야 네 딸 어딨니?” 묻고는, 국氏 옆에서 갓 구운 공갈빵을 뜯어먹고 있는 딸에게 눈깔사탕을 조공하듯 건넸다 아버지랑 국氏는 제법 친해서 나와 딸이 다 자라면 혼인시키기로 약조했다 어린 나는 “그 계집애는 멍청해서 싫어요” 외치고 집으로 달려왔다 그날 저녁 막걸리 냄새를 풍기며 돌아온 아버지는 나를 때리고 밟기를 여러 번 했다 찢어지고 깨지고 멍든 채 울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는 공갈빵을 먹였다 모가지를 움켜 잡고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핏물 젖은 공갈빵은 비리고 질겨 아무리 오래 씹어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맛이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술에 취해 急死했는데 남겨진 가족들은, 영정 앞에 엎드려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슬퍼했을 거라는 편견은 버려. 태울 것 태우고 버릴 것 버리고 마을을 떠났지만 지구는 둥글고 인연은 질겨서 고향에 찾아갈 일은 많지 이제 그곳에는 계집애가 공갈빵을 굽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나도 계집애도 희끗희끗하니 중년을 넘어섰고 혼자 살고 있다 국氏가 죽고(생전 친했던 사람은 죽는 방법도 닮는다) 계집애가 물려받은 것인데 이제 공갈빵은 ‘그 배고프던’ 시절의 사람들이 추억으로만 먹는 음식이 되었다 머지않아 공갈빵 가게가 철거되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다는 소문도 돌았다8)



【시집】


그 배고프고 가난하던 시절 아버지는 국 씨 아저씨와 막걸리를 마시는 날이면 공갈빵 한 봉지를 들고 오셨다 국씨 아저씨는 동네에서 공갈빵을 가장 맛있게 굽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공갈빵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국가야 네딸 어딨니? 묻고는, 국 씨 옆에서 갓 구운 공갈빵을 뜯어 먹고 있는 딸에게 눈깔사탕을 조공하듯 건넸다 아버지랑 국 씨는 제법 친해서 나와 딸이 다 자라면 혼인시키기로 약조했다 어린 나는 그 계집애는 멍청해서 싫어요 외치고 집으로 달려왔다 그날 저녁 막걸리 냄새를 풍기며 돌아온 아버지는 국 씨에게서 얻어 온 고무신으로 나를 때리고 밟기를 여러 번 했다 찢어지고 깨지고 멍든 채 울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는 공갈빵을 먹였다 모가지를 움켜잡고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핏물 젖은 공갈빵은 비리고 질겨 아무리 오래 씹어도 넘어가지 않았다 얼마 후 아버지는 술에 취해 급사했는데 남겨진 가족들은 영정 앞에 엎드려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슬퍼했을 거라는 편견은 버려! 태울 것 태우고 버릴 것 버리고 마을을 떠났지만 지구는 둥글고 인연은 질겨서 고향에 찾아갈 일은 많지 이제 그곳에는 늙은 계집애가 공갈빵을 굽고 있다 나도 계집애도 희끗희끗하니 중년을 넘어섰고 혼자 살고 있다 국 씨가 죽고, 생전 친했던 사람은 죽는 방법도 닮는다네, 계집애가 물려받은 것인데 이제 공갈빵은 그 배고프던 시절의 사람들이 추억으로만 먹는 음식이 되었고 공갈빵 가게는 시커멓게 타버리고 재만 남게 될 것이라는 것이 민중의 판단이다(강조는 인용자)9) 





시인의 이러한 개작은 “민중의 판단”이라는 부분에서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러한 변형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정치적인 성향을 드러낸 것으로 보여요. 그렇다면 왜 이런 개작을 감행했는지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그것은 아무래도 시인이 셈한 의도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일 수 있어요. 자신만의 독특한 정치 시가 정치 시로 읽히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불안’이 개작 속에 숨겨져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형 최원 시인의 시집 『미영이』를 통쾌하고 섬세한 ‘정치시’로 읽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이 시집이 더욱더 흥미를 지닌 시집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 같아요. 물론, 최원 시인의 모든 시가 정치적인 시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이 에너지를 소중히 품고 있습니다. 



p.s 


이번 겨울에 쏟아진 새로운 시집을 형에게 소개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쓸 수 없었습니다. 이 빚은 언제가 꼭 갚기로 하겠습니다. 하루빨리 군산이라는 도시에 적응해 글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형 잘 지내길 바랄게요. 다가오는 겨울도 무사히 건너시길 바랍니다. 다가올 봄도 여유 있게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최원 시인의 시집 『미영이』를 꼭 기억해 주세요.   






*

1) 김광섭, 『내일이 있어 우리는 슬프다』, 파란, 2018. 


2) 차성환, 『오늘은 오른손을 잃었다』, 천년의 시작, 2018. 


3) 최원, 『미영이』, 파란, 2018. 


4) 웹진 <문화 다>, [창간 6주년 기념 좌담] 촛불혁명 이후의 삶과 소수자 문학(1), 2018.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power_interview&ps_boid=41


5) 최원, 〈참여시의 김수영과 참여하는 시대의 민중들〉, 중앙대학교 대학원 신문, 2019, 6, 4. 

http://gspress.cauon.net/news/articleView.html?idxno=21813


6) 이 시에 대해 최원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주 명신 아진 그리고 나>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점은 현재입니다. 현재의 순간, 과거의 누군가와 비슷한 또는 그 사람일수도 있는 사람을 본 순간 그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즉 결과론입니다. 그때 우리는 많이 힘들었고 방황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난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때보다는 지금이 조금은 더 나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조금 더 살았고, 덕분에 노안도 경험하고 있고, 점점 대머리가 되어가는 나의 이마를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이 먹으며 앞머리가 빠질 거라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죠. 임플란트를 해야 할까 고민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지금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죠. 머리가 빠지지 않는 사람들은 평생 해보지 못할 고민인거죠. 마치 평생 한 번도 사랑에 빠져보지 못한 사람처럼 말이죠. 오로지 일단은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웹진 <문화 다>, [창간 6주년 기념 좌담] 촛불혁명 이후의 삶과 소수자 문학(3), 2018.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power_interview&ps_boid=44


7) 최원, 위의 시집, 75~77쪽. 


8) 최원, 「국가네 공갈빵」, 『사건들』, 파란, 2016, 344~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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