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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Mar 29. 2021

사월

                                                                        



                                                                         “봄이 되면 얘네들도 이름을 찾겠다”1)





온기


오랜 시간 자학하며 생활한 탓인지 위축된 날을 보내야 했다. 지나치게 스스로를 강박적으로 내몰았던 탓에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집착의 연속이었다. 순수한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빛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마을 주변을 기웃거렸다. 웃음을 밀어내고 슬픈 척 하며 지냈다. 이러한 태도가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운명 같은 것은 존재한 적이 없지만, 내가 선택한 발걸음이 운명이 되었다. 어리석었다. 나는 스스로를 병들게 했고, 무의식적으로 아픈 몸을 자랑스러워했다. 나의 30대는 이렇게 바짝 마른 굴비처럼 허리를 펴지 못한 채 흘러간다. 하지만 최근엔 오랜 시간 해오던 습관을 멈추고자 노력한다. 다른 꿈을 꾸고, 새로운 길을 생각한다. 긍정의 힘을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린다.



사랑을 논한 두 장면이 떠오른다. 다자이 오사무 소설 『인간실격』과 파벨 포리코브스키의 영화 <Cold War>2)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랑의 장면이 그것이다. 우선 소설 속 장면부터 풀어보자. 주인공 요조는 사랑했던 애인과 자살할 것을 결심하게 되지만, 실행해 옮기지 못한다. 그 이유가 섬뜩하다. 알약을 삼킨 애인이 고통스러워하며 요조의 다리를 붙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애인의 얼굴을 힘차게 발로 걷어 차 바다에 빠트리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서 요조는 사랑한 애인과 함께 몸을 던지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개인을 선택한다. 하지만 <Cold War>에서 주인공인 빅토르와 줄라는 죽음을 성공적으로 실행해 옮긴다. 그들은 둘만의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해 죽음을 거뜬히 받아들인다. 이들에겐 요조 커플처럼 얼굴을 걷어차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죽기로 다짐했지만 서로 다른 결말로 치닫는 두 장면을 바라보면서 운명과 선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죽음 앞에서 개인을 먼저 챙기는 인간과 당신을 생각하는 인간에 대해 고민한다. 진정한 인간의 모습은 무엇인가.



나는 오랜 시간 다자이 오사무 편을 들었다. 인간은 괴기스럽고 비겁한 속물일 수밖에 없다는 요조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했었던 것이다. 이 감정이 오랜 시간 나를 지배했었던 탓에 내 글과 생활은 암울한 색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어둡고 칙칙한 모습을 밀어내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나’는 ‘나’와 다른 ‘나’를 끄집어낸다. 내 안에 있는 무수히 많은 ‘나’ 중에 긍정적인 ‘나’를 끄집어 올린다. 나는 다시 어리석은 꿈을 꾸기 시작한다. 이러한 마음을 품고 있으니, 내가 소개하려는 시집들도 어떤 방식이든지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으리라.


당신3)






혼자 산책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진다. 혼자 있을 때 나는 더 수런거렸고 붐볐다. 바람이 많이 불고 비가 세차게 내린다. 밤에도 가라앉지 않는 태양처럼 안타깝고 슬픈 일들이 많다. 태양과 달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처럼, 아직 오지 않았고 아직 떠나지 않은 당신과 걷고 싶다.4)





마지막으로 무엇인가를 적는 행위는 군더더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시인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곧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기개와 자존심을 당당히 보여주었다. 흔들리지 않는 이 정신은 후배 시인들에게 바통을 넘겨줄 것이고, 시인이 무엇인지 시 쓰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해줄 것이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그는 죽음을 통해 시를 완성했다.


죽음을 응시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행위는 어떤 방식이든지 시적 포즈를 걷어낸다. 포즈가 물러난 공터에는 정직한 언어만이 살아 숨 쉰다. 나는 이 시집을 단숨에 읽었고, 읽는 과정에서 온몸이 찌릿찌릿한 순간을 경험했다. 그는 아프게 품었던 감정을 과장하지 않았으며, 아픈 상처를 자랑하는 행위는 더더욱 하지 않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뒤틀린 몸을 적었다. 이런 흔들림은 오랜만이다. 몸이 붕붕 떠다녔다.


이 시집은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가 누구인지 어떤 시를 쓰는 사람인지 유고 시집5)을 읽기 전까지 몰랐다. 어떤 감정이 발동됐는지 모르겠지만 시인의 시집을 읽고 난 후, 사랑하는 애인이 남긴 글을 추적하는 심정으로 서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의 첫 번째 시집인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2006, 천년의 시작)와 두 번째 시집인 『좋은 구름』(2014, 실천문학사)은 구할 수 없었다.6)  대체 이 시집은 어떤 힘을 품고 있었기에 나를 끈덕지게 끌고 다녔던 것일까. 어떤 방식이든지 빠른 시일 안에 시집을 품어야겠다.





언젠가 당신은 눈먼 거미의 호주머니에서

내 유서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이해하려고 해봤자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한


그것은 우리가 물어뜯고 해체한 시간이에요

나에게 온 적이 없는 당신의 시간이에요

다 알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문장을 쓰고 있어요


                                      「타인의 일기」 부분



당신의 세계에서 보면 나는 살아남은 귀신인 셈이죠. 나도 이곳이 꿈이라는 걸 알아요. 모를 리 없지요. 죽음과 생, 안과 밖은 얇은 칸막이 하나 없잖아요.


                                     「꿈속의 비행」 부분




이 시집은 당신에게 향한다. 당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당신은 이 계절을 느낄 수 없다. 사랑하던 당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인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있어서 살 수 있었고, 숨 쉴 수 있었다. 하지만 겨울에 떨어지는 눈의 차가움을 당신은 느끼지 못한다. 차분히 자유낙하 하는 눈의 반동을 쳐다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래서 시인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귀신이 되어 그와의 추억을 지상에서 셈한다.


이 시집에 수록된 모든 시편은 당신에게 향한다. 온몸에 새겨진 흉한 칼자국을 만지작거리면서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당신은 어떤 사람이기에 시인의 모든 감정과 감성과 신체를 지배했던 것일까. 이 시집을 읽으면서 시인과 당신의 사연을 상상하고 조립했다. 내가 사랑한 당신을 떠올리며 그대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헤아렸다.


시인은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지만 당신과 관련된 이야기는 숨긴다. 당신과 같이 쌓아 올린 추억의 집을 쓰러지지 않게 받친다. 당신과 보낸 시간을 잊지 않겠다며 주먹을 움켜쥔다. 누군가는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아문다고 위로한다. 하지만 시인은 상처가 낫기를 바라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기억하고자 한다. 이 믿음이 시집을 끌고 간다. 촛불이 광장을 가득 메웠던 순간에도 시인은 당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애절하게 느껴진다. 그는 그곳에서 당신을 오버랩했다.


시인은 추억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한 사람을 잊을 수 없어, 그가 살아 있다는 환상을 부풀린다. 그래서 그는 너무 빨리 녹거나 너무 쉽게 물러난 것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시인은 죽음을 통해 신념을 이행한다. 그만큼 시인에게 당신은 절대적인 사람이다. 이 시집은 지상에서 쓰인 마지막 유서다.


웃음7)




너무나 무거운 시집을 앞에서 소개했으니, 숨을 고르자. 두 번째로 소개할 시집은 1947년생 김귀자 시인의 동시집 『옆에만 있어줘』이다. 시집을 넘기면서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겁게 웃었다. 무엇보다도 1947년생 시인이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웠다.


이 시집을 읽고 최근에 읽었던 시집들이 너무나 우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암울한 정서를 밀어낼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는 몽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밀어낸다고 해서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들이 포근한 언어를 쓰기에는 너무나 무기력한 세상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김귀자 시인과 다른 삶을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포근한 언어가 존재한다면, 이 언어를 통해 위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조금씩 모아

돕기 운동을 하자

숫자들이 모여서

의논을 하였습니다


―그래! 그래!

1,2,3,4……

모두들 가진 걸

조금씩 내놓았습니다


끝자리에 앉아있던

0이 말했습니다

―미안해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그러자 친구들이 말했습니다

―넌 옆에만 있어줘

그럼 10, 20, 30………

얼마나 우리 힘이 커지는데………


               「옆에만 있어줘」 전문




시집 제목이기도 한 「옆에만 있어줘」를 읽고 한참을 미소 지웠다. 숫자들은 누군가를 돕기로 결정한 듯 보인다. 가진 것들을 하나둘 꺼내 놓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큰 숫자일수록 많은 것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통장에 적힌 돈이, 아파트 가격이, 학점이, 토익점수가, 나이가, 실적이, 자동차의 크기 등이 크면 클수록 좋아 보인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숫자 ‘0’은 그래서 부끄럽다. 가진 것을 꺼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순간 높은 숫자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넌 옆에만 있어줘” 라고 속삭인다. 이 순간 편견은 깨진다. 숫자들의 진가는 ‘0’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너무나도 상식적인 내용인데, 이상하게도 감동이 전해진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문구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식이든지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모두 어깨동무하며 함께 걸어갈 수 있을 듯하다.


『옆에만 있어줘』는 이처럼 가볍지만 가볍지 않다. 시인은 뜯어져 나가는 달력을 바라보며 가족을 생각하고, 쉼표의 입장이 되어 동료들을 위로한다. 발을 다친 현우를 도왔던 성호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적고, 숲속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황금빛 조각으로 상상한다. 간혹 등장하는 풍자적인 시선들은 독자들을 ‘웃프’게 만든다. 나는 동시 자체를 거의 읽어 보지 못했는데, 내가 바라본 눈(目)이 협소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부끄럽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동시집을 꺼내 읽어보면 어떨까. 모순적이고 답답한 지금 이곳에서 더럽혀진 내 마음을 조금은 씻어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을까. 멋지지도 난해하지도 어렵지도 않은 가벼운 시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들이 가진 힘을 나는 믿는다. 가끔은 이런 언어가 지친 우리를 쓰다듬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동시집을 어린아이들만 읽어야 하는 장르로 규정지을 수 있겠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 지친 몸을 달래고 깨달음을 얻는데, 어른과 아이를 구분할 필요는 없다.


이 시집의 장점은 담백한 언어와 ‘문인화’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인의 말에 의하면 문인화는 “예로부터 그림을 직업으로 하지 않는 시인, 학자나 선비 등 사대부들이 여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여 그린 그림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이 그림이 시와 어울려 읽는 재미와 보는 재미를 쏠쏠하게 선사한다.



관계8)




  드라이플라워라는 꽃이 있어 나는 그 꽃을 볼 때마다 소름이 돋았지 누군가의 표정을 박제해 놓은 줄 알았어 무용하다고 생각했어 네가 두 명의 엄마를 가졌다는 것 마음을 알 수 없는 동생을 가졌다는 것

  저번에 우리 집 개가 죽었다고 말했었지 이상했어 움직이던 것이 더 이상 움직이질 않는다는 게, 겨우 그런 사실로 슬퍼졌어 무용하다 아, 무용하지 마음도 없는 것에게 슬픔을 느꼈어


                                                                                                -「크로스 라이트」 부분




함께 걷는다는 건 어깨를 부딪치는 일이다. 아이폰을 나눠 끼는 행위는 서로를 구속하는 행위다. 사람들 앞에서 웃어보려고 애썼다. 딱딱한 갈기를 쥐어뜯어도 웃고만 있었다. 영화관에선 누구도 버려진 개를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들 주연으로 착각했다. 단역이야말로 자신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이언맨이 되고자 했고, 알리타와 같은 전사가 되길 바랐다. 흉측한 자팡은 자신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들은 세상과 동떨어진 눈으로 영화를 관람한다. 자신의 전성기를 회상하는 일은 현재가 죽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기에 씁쓸하다. 사람들은 차이를 좋아해서 서로 다른 옷을 선호했지만, 놀이공원에선 함께 비명을 질렀다.


말을 하지 않는 당신을 바라보며 손가락 살을 뜯어 먹었다. 우리가 같은 장르로 묶인다면 당신이 적었던 모래 위의 문장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는 돌아가자고 말했다. 너는 이어폰을 꺼내 나의 귀에 꽂고 주저 없이 음악을 틀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해도 견디기 힘들 때가 있다. 너는 이런 날 이해할까. 너는 내 손을 잡는다. 너의 눈빛보다 밝은 전조등이 우리를 비췄다. 바닥에 사탕을 어질러 놓으면 우리는 웃을 수 있을까.


사랑은 그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을 지우는 일이다. 선명하게 보이는 것을 사랑해선 안 된다. 우린 항상 죽을 만큼 쉬고 난 후, 사랑을 서약했다. 너의 길고 흰 손가락이 펼쳐지면 프리즘을 떠올렸다. 미래가 아득하게 멀어져서 호흡이 가빠졌다. 슬프다는 말을 너에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이 진짜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너에게만큼은 진실해지고 싶었다. 손목을 자르고자 했다. 밤이 영원할 거라고 믿었다. 난 너보다 먼저 죽을 거고, 넌 내가 죽고 나서 나에 대한 기록을 적어야 한다. 너는 창문을 열고 멈춰 서있다. 계속 두 팔을 벌리고 나를 기다린다. 애정과 증오가 반복된다. 너는 그것이 마음이라고 했다.


얼마 전에는 너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너만 죽으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죽고 싶은 마음이 크다. 슬픔을 만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고, 죽이고 싶은 사람만 떠올렸다. 닿지 않는 곳에서 빌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한낮이었고, 그곳에서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는 걷지 않는다. 그는 멀어지는 발자국을 바라본다. 빛으로 가득한 꿈을 꾼다. 서사 없는 소설 속 인물들이 시간을 모르고 아파했다. 누군가는 사랑에 빠진 이와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는데 우리는 왜 줄어들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다음 장면을 알기 위해 예지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여기까지 시인의 언어를 빌려와 각색해보았다. 그는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만질 수 없었지만, 관계의 흔들림이 시인을 붙드는 것 같고 흔들린 관계로 인해 시집의 질량은 무거워졌다. 이 무게는 사랑으로 번지고, 궁극에는 ‘나’에게 향한다. 하늘을 향해 높게 쏘아 올린 부메랑처럼 나와 우리의 이야기는 흔들리면서 돌고 돈다. 나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시집에 실린 「크로스 라이트」와 「축하해 너의 생일을」은 나에게 시 읽는 태도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다.


마을9)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남도의 작은 바닷가를 조심스럽게 서성거리는 우리의 이야기이며 끝에서 찬란한 미래를 상상하기보다는 마지막으로 해야 할 것을 고르는 당신에 대한 이야기다. 데려가고 싶은데 데려갈 수 없어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이야기이며, 날마다 베개를 젖힐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눈물의 근원을 쫓다 보면 그가 살아온 삶과 살았던 마을에 손이 닿는다. 무슨 이유로 그는 눈물을 흘려야 했던 것일까. 한 가지를 풀어보자.





다시 찾아온 추도 보건진료소 앞길


버리고 간 여자

누가 훔쳐 갔나

첫배로 왔다

숨을 코로 쉬지 못하는 여자


뿌리와 꽃을 잇는 꽃대가 숨길이다

꽃이 숨,

토해 놓은 순색 숨,

숨이 씨가 되나

다시 꽃이 되기는 어려운


작년에 버리고 간 여자

얌전하게 그 자리 그대로 있다

가솔 몇 더 거느렸다


데려갈 수 없는 여자


일 년에 한 번밖에 못 보는

물빛 그림자 어롱이는 슬픈 눈


꽃이 된 얼음 발가락

섬의 뼈다귀


가려린 수선화 식구들을 위해

언덕을 굴러 내려오는

예배당 종소리


                          「수선화-1월 추도에서」 전문




누군가가 한 여자를 버리고 갔다. 시인은 버려진 여자를 데려갈 수 없는 여자라고 적었다. 이 여자가 외부인과 만나는 순간은 일 년에 단 한 번이다. 화자가 살고 있는 마을은 어떤 마을일까. 이 마을은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 것일까.


마을 위에 서 있는 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곳에 가지 않아도 우리는 이 마을을 걸어 다닐 수 있다. 이 시집은 위에서 인용된 시 이외에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다양한 이유를 품고 있다. 그것을 찾아보는 것도 시집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 중에 하나겠다.



봄날이 온다


이 글이 인쇄될 즈음에는 벚꽃이 피고 지겠다. 긍정적인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로 마음먹었기에 내 마음이 어느 정도 전달되었으며 좋겠다. 최근에는 좋은 시와 좋지 않은 시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몸과 다른 언어에 대해서 생각한다. 당분간 이 마음이 지속될 것 같다.

시집만이 가지고 있는 고백의 의미는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이 지면에 소개한 네 명의 시인은 박서영, 김귀자, 양안다, 김진엽 시인이다. 녹색이 번지기 직전인 봄날에 이들의 시집을 넘겨보는 것은 어떨까.


위에서 소개된 시집뿐만이 아니다. 지금 현재 좋은 시집들이 계속해서 새롭게 출간되고 있다. 무엇인가를 넘기고 싶을 때, 자신과 어울리는 시집을 서점이나 도서관 또는 온라인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따뜻한 봄날, 시집 한 권씩 들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보는 것은 어떨까. 자연스럽게 손가락에 침을 무치고 딴딴한 종이를 넘겨보게 되지 않을까.


어떤 방식이든지 힘이 날 것 같다.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내 키가 조금씩 더 커지는 것이니까.


                                                                                                                       2019년 2월 21일







*

1) 김중현 감독의 영화 <February>에서 민경 역을 맡은 조민경씨의 대사이다. 이 영화는 2019년 1월 30일에 개봉되었다.


2) 한국에서 <Cold War>는 2019년 2월 7일에 개봉했다.


3) 박서영,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문학동네, 2019.


4) 박서영, 「시인의 말」, 『좋은 구름』, 실천문학사, 2014, 135쪽.


5) 여기서 필자는 유고 시집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 이유는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2월 3일에 출간된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에 적힌 ‘일러두기’에 “이 책은 박서영 시인의 유고 시집이다. 시인이 출판사로 최종 원고를 보내온 날은 2017년 10월 18일이었다.”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2월 3일 ‘걷는 사람’에서도 박서영 시인의 유고 시집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를 출판했다는 사실이다. 두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동일하지 않다. 혼란스러울 수 있다. 출판사 ‘걷는 사람’과 전화 통화를 한 후, 박서영 시인의 유고 시집에 대한 정황을 들을 수 있었다. 시인은 생전에 두 권 정도의 시집 분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한 권은 ‘문학동네’에서 판권을 가지고 가게 되었고, 나머지 한 권은 ‘걷는 사람’에서 판권을 소유하게 된다. ‘걷는 사람’ 측에서는 유족들과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시집 원고에 수록되지 않았던 시를 추가해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를 출간한다. 출간 날짜는 두 출판사가 2월 3일로 합의를 봤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해 볼 때, ‘걷는 사람’과 ‘문학동네’에서 출판된 두 시집 모두 ‘유고시집’으로 판단해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6) 박서영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인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2006, 천년의 시작)는 품절되었으나, 새롭게 복간 시집으로 출판되었다. 


7) 김귀자, 『옆에만 있어줘』, 청색종이, 2019.


8) 양안다,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민음사, 2018.


9) 김진엽, 『꽃보다 먼저 꽃 속에』, 천년의 시작,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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