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종필 Mar 28. 2021

나의 생은 잘못만 가득한 初錄(초록) 이었다

김건영 시인의 시집 『파이』에 대한 몽상



전투가 끝나고 예언자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더 작은 지하드에서 더 큰 지하드로 돌아왔다.      

누가 물었습니다. 

‘더 큰 지하드’란 무엇입니까? 

그가 답했습니다.      

그건 바로 자기 자신과의 투쟁이다.1)





               

김건영 시인의 시집 『파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독자라면 그가 왜 이 시집의 제목을 파이로 명명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손가락에 침을 묻혀 힘차게 페이지를 넘길 때면 올라오는 부끄러움을 짓누르며 수줍게 동료들의 얼굴을 쳐다봐야 한다. 파이를 먹기 위해 누군가의 손가락을 부러트렸던 내 안에 있는 괴물과 마주해야 하고 곯아 터져 흘러내리는 당신의 노란 진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야 한다.  


시인은 역겨운 사회를 노골적으로 비판하지 않았지만 파이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초라한 우리들의 모습을 직설적이고 섬세하게 잘 그렸다. 그의 시집에는 불어 터진 라면 향기가 난다. 독자들은 아침에 먹은 퉁퉁 불은 라면 면발을 삼키며 따뜻한 쌀밥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향기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시인은 “나는 질병과 함께 나아갈 것”(15)이라고 말한다. “질병이 없으면 나아질 수 없다”(19)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질서 역시 질병의 한 순서일 뿐”(25)이라며 질병을 옹호한다. 그가 질병을 옹호하는 이유는 질병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결핍을 투명하게 보여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그릇된 사람”(「수의 바다」)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을 시집 속에 담았다. 


자신의 질병을 거리낌 없이 시인은 고백한다. 때론 자신의 몸이 “영영 곪”(「나만 지는 아침」)아 터지기를 바란다. 질병의 장점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은 마음껏 자신의 상처를 뽐낸다.  하지만 자신을 병들게 만드는 이러한 행위는 로건2)의 마지막 몸짓과 무관하지 않다. 언젠가는 반듯이 쓰러진다. 마지막에는 죽음과 조우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질병론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질병을 끓어 안으며 맥없이 쓰러지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모순이라면 나는 방패”(「E」)가 되어 이길 때까지 지겠다고 다짐한다. 그의 왼팔에는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스티브 로저스의 방패가 있다. 시인은 병들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건강하다. 


그의 시집이 아프지만 아프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러한 긍정의 힘이 시집을 받쳐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쉽게 죽지 않는다. 좀비처럼 죽어도 살아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부조리와 마지막까지 싸울 것이다. 캡틴은 포기를 모른다. 김건영은 캡틴이다. 김건영은 그런 숙명을 달고 태어났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싸움은 『파이』로 인해 다시 쓰일 것이다. 싸움의 기술을 습득하고자 애쓰는 이들은 『파이』를 힘겹게 통과해야만 한다.      





어찌하여 나는 병을 앓는가 끓어오르는 이러한 기포들을 품었는가 집이 없다는 건 그런 거겠지 지붕이 없다는 건 그런 거겠지      


어둠은 빛을 피해 부글거리고

귓가에 속삭였던 전설적인 거짓말들 별자리들

김빠진 상상력을 요구하는 선분들

변하지 않겠다는 말이 목구멍으로부터 공기 중으로 떠난다     


밝을 거라는 말을 믿느냐 시원을 믿느냐 공평한 교환을 믿느냐     

 

사람들은 옷을 입고 향수를 바른다

몸속에서 넘칠 것 같은 검은 물을 참는 

갑각들 게고둥들 

투쟁을 투정으로 치부하고서

가난을 무능으로 몰아세우고서

허공을 잡아 집을 짓고 공기를 가두어 판다    

  

―몸에 물이 많아 미안해

기달 든 사람들은 

더욱더 딱딱한 거짓말들을 되뇐다;

정의는 승리한다

사랑은 아름답다

신은 존재한다

차라리      


다음 세상엔 덩굴로 태어나

모든 집을 넘어뜨리겠다

하늘과 바다의 틈을 무너뜨리겠다

공기에 물을 눌러 담고 물에 공기를 실어서 

날개와 아가미를 달고

한밤중의 포말로 살아지고 말겠다     


                               「착향탄산음료」 전문       

    



『파이』는 읽는 즐거움이 있다. 김건영의 센 목소리가 좋다. 그의 언어는 상투적이지 않다. 하지만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질투가 날 정도로 그의 재능은 빛난다. 이 재능이 동시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길 바란다.  


2019년 9월 1일 김건영 시인을 만나러 간다. 다음 생애에는 덩굴로 태어나 모든 집을 무너뜨리겠다는 그를 만나러 간다. 공기에 물을 눌러 담고 물에 공기를 실어서 날개와 아가미를 달고 한밤중에 포말로 사라지겠다는 악만 남은 그를 만나러 간다.  



*


1) 이 제목은 김건영 시인의 시집 『파이』에 수록된 마지막 작품 「절연의 노래」의 한 구절을 빌려온 것이다. 이 문장에서 初자는 “‘옷 의(衤)’와 ‘칼 도(刀)”를 더해 ‘옷을 마름질하기 위해 처음으로 칼을 대다’라는 뜻을 나타낸 ‘처음 초(初)”(장의균, 『보면 보이는 우리말 한자』, 학민사, 2015, 248쪽.)로 ‘처음’이나 ‘시작’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錄자는 “‘쇠 금(金)’과 ‘벗길 록 혹은 파낼 록(彔)’을 더해 ‘쇠에다 그림이나 글을 새기다’라는 뜻을 나타낸 ‘새길 록(錄)’”(위의 책, 302쪽.)으로 ‘기록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김건영 시인은 ‘초록’이라는 글자로 쓰는 행위를 표현했다. ‘초록’을 행위한다는 이 말이 아름답지 않은가. 

2) 그레이그 톰슨, 『하비비』, 박중서 옮김, 미메시스, 2018, 605쪽. 


작가의 이전글 물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