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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Apr 06. 2021

‘첫’/ Show me the money 1)












“결코 멈추지 않는 열차가

영원한 겨울의 광활한 백색 세상을

지구 이편에서 저편 끝까지 가로지른다.”2)



형에게 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형에게 보낸 편지가 2020년 1월 9일이었으니 1년 만에 편지를 쓴 셈이군요. 잘 지내시고 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형께서도 잘 알고 있듯이 저는 이맘때쯤 국립대에 취업했고 몇 달 후 사표를 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제게 사표를 낸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유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끝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건너보지도 않고 섣불리 말하는 것 같아 비겁한 것일 수 있고 그 끝이 좋은 모습으로 펼쳐졌을지도 모르겠으나 정해진 길을 걸어가다가 죽기는 싫었습니다. 저의 이러한 발언이 부정적으로 내비쳐질 수도 있겠으나 제 몸과 마음이 그곳의 정서와 맡지 않았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 어느 곳 하나 쓸모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나 봅니다. 형은 저를 위로하겠지만 동정하진 말아 주십시오.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이 삶에 어느덧 적응했으니 말입니다. 애인이 없고 희망이 없고 가난했지만 이제는 애인이 없어도 희망이 없어도 가난해도 희망을 품으며 살아갈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여유 속에서 긍지 있게 오래 지내다 보니 뜻하지 않게 행운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어느 시인께서 12월에 좋은 분을 소개해 준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어린 소년처럼 설레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른들께서 마음은 여전히 십대라는 말을 자주 하셨는데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지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릴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키득키득 웃었지만 시간이 흘러 지금은 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마음을 품으니 저는 여전히 늙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머리털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늙기는 늙나 봅니다. 그래서 병원에 들려 남성형 탈모증 치료제 프로페시아를 구매했습니다. 시집 열다섯 권의 비용을 지불하면서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늙음을 거부하는 제 자신이 초라해 보였습니다. 나이가 들면 머리털이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아픈 것도 아닌데 매일 한 알씩 작은 좁쌀을 삼켜야 하는 행위가 우울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늙기를 거부하기보다는 죽음의 시간을 받아들이기 위해 좁쌀 먹기를 중단했습니다. 약이라기보다 미용 약이겠지요. 몇 알 먹지 않았으니 형께서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부치도록 하겠습니다.


형께서 놀라실지 모르겠지만 살도 많이 쪘습니다. 차가운 겨울에 저를 다시 보게 된다면 왜 이렇게 몸이 좋아졌냐고 웃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깨 수술로 인해 수영을 할 수 없게 되어서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었더니 포동포동 살이 오른 바다 대구가 된 것입니다. 어서 빨리 몸 관리를 잘해 소개팅에 만전을 기해야겠습니다.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거든요. 요즘은 문학보다도 이런 생각뿐입니다. 소개팅에 마음이 쏠려 좋은 분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을 해봅니다. 갑자기 입가에 미소가 도는군요. 형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부끄럽습니다. 끌로드 를르슈 감독의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The best years of a life)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지금 이 ‘순간’을 누리고 싶은 겁니다. 형 저는 잘 살고 있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저는 작년 이맘때에 형에게 아래의 편지를 띄었습니다.





저는 2020년 새해에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꿈을 찾아갑니다. 또다시 바퀴벌레가 되었습니다. 무모한 환상을 쫓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환상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처연(悽然)한 권태와 싸우겠습니다.3) 





저의 이러한 다짐이 1년의 지난 이 시점에서 성공적으로 이뤄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꿈을 찾았는지. 무모한 환상을 여전히 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환상은 희망이겠지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희망이기도 하고 문학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저는 한 개인이지만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 공간에 묶여 있으니 저의 희망은 문학의 희망인 것입니다. 개별적인 목소리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문학과 연관이 있고 이곳의 문학장과 어떤 방식이든지 만납니다. 누군가는 저의 이러한 글쓰기 방식에 비웃음을 보내겠지만 다양한 글쓰기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 어떻게 하나의 길만이 놓여 있겠습니까. 인정을 위해 선량한 동료들과 의미 없는 경쟁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희망’을 두 손에 움켜잡으며 ‘개인’의 이야기를 꺼내 놓을 생각입니다. 저는 지금 제 시론을 형께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형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자기 복제’를 즐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쓰는 에세이 평론도 어떻게 보면 ‘나’를 편하게 소비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됩니다. 다양한 철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잣대를 정하고 보다 옳은 지점에 대해 문제 삼지 않는 것이 저의 게으름 탓 일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최근에 읽은 두 편의 글 「포스트-아포칼립스“를 향한 미지未知의 미러링」과 「‘그날’ 이후의 서정시와 ‘망막적인 것’」을 읽으면서 제 글쓰기를 몽상하게 됩니다.


며칠 전에는 세 명의 시인과 두 명의 소설가와 함께 「지금, 이곳의 문학―검열·페미니즘·오토픽션」4)이라는 주제로 좌담을 나누었습니다. 형께서는 문학을 그만두셨지만 형께서 좋아하셨던 좌담을요. 이 좌담을 통해 제가 느꼈던 감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작가는 악인도 괴물도 악마도 천사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많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작가 개인의 몫이라는 것이었지요. 이 좌담을 통해 저는 여러 가지로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책임을 작가 한 명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기계적인 모순을 내장한 정서의 흐름은 무시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기계는 무의식이고 이 무의식 속에 신체가 놓인다면 한 개인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는 것입니다. 시스템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무의식’ 때문입니다. 또한 소설가 김봉곤 씨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평론가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견해는 어느 평론가가 「소금이 짠맛을 읽으면―비판 정신과 비평의 책무」에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했으니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평론가들이 정해진 길만을 가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보다 더 넓은 세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길로만 가서 안정을 취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저 또한 예외는 아니겠지요. 아무튼.


지금 이곳에서는 글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용기’를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용기 내는 것이 용기 내는 것과 상관없는 것이 될 때까지 말입니다. 이 좌담에서 한 구절이 기억에 남습니다. 평론가들은 대학원생들이라는 말과 카피라이터라는 단어가 그것입니다. 형께서도 짐작하겠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문학이 우주와 실존이 아닌 대학이고 카피라이터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형께서는 생전에 봉준호 감독을 저열하다고 평가하셨지만 저는 이 감독의 <설국열차>를 생각하면서 열차를 멈추고자 했던 주인공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몽상으로 ‘관성(정서)’을 멈추고 싶은 겁니다.


가장 큰 문제는 문제를 문제라고 발언할 수 없는 분위기와 처지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유는 우리 평론가들의 밥벌이와 인정이 문단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겠지요. 형은 이러한 문단 분위기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먼 훗날 연구자들이 우리의 자화상을 연구한다면 양심 없는 사람들이 참 많았었구나. 라고 기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말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고. 잘 못된 것들에 대해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적인 대상에 대해 발언하기보다는 내 안에 있는 부조리와 모순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저부터 용기를 내야 하는 겁니다. 상투적이지만 적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상징계의 체계 속에 들어온 우리는 이미 무의식적으로 부조리한 감정에 둘러 싸여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싸워야 하는 것이지요. 사이에 있어야 하고 그 틈에서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생산적인 토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겠지만 제가 말하는 문제는 ‘생산’이라는 단어로 취급될 없습니다. 문제는 ‘실존’과 밀접하게 만나는 것입니다. ‘청탁’ 시스템을 통해 평론가들이 자신의 글쓰기를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시스템에서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시대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발언이 유토피아 같지만 저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체험한 몇 안 되는 평론가이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자유로운 몸을 표현할 수 있다면 행복하다는 것을. 이 방식은 기존의 잡지 방식이 아닌 새로운 ‘매체’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평론가들의 독자는 교수와 대학원생이 아니라 모어를 쓰는 모든 사람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한다고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런 방식으로라도 형에게 말을 해야 조금은 시원할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대변을 보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새로운 생각을 하려는데 그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사람을 모으기가 쉽지 않고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합니다. 스타크래프를 할 때 치트키 ‘Show me the money’를 누르면 손쉽게 건물과 유닛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게임보다 냉정합니다. 돈이 없으면 새로운 것을 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이미 백 년 전에 빈센트 반 고흐가 테오에게 ‘화가 공동체에 대한 구상’을 편지로 쓴 것은 예술가들의 주체적인 자립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술가들이 프로젝트나 집단에 소속되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이득을 남길 수 있다면 그것만큼 이상적인 사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정한 글을 써야 하는 예술가들이 이 방식으로 먹고사는 것이 가능하다면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를 검열 없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가 예산 정책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작 지원금과 같은 낡은 지원금 방식보다는 근본적인 토대 자체를 바꿀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자립시스템에 많은 자본을 투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원고료와 창작지원금이 아닙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돈을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조건과 시선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 순간이 아니라 10년 20년 더 나아가서는 미래를 응시해야 합니다. 예술가들은 자본으로부터 ‘독립’ 해야 합니다.




12명의 라파엘 전파(前派) 연합(19세기 중엽 영국에서 일어난 예술 운동으로 라파엘로 이전처럼 자연에서 경험하게 배우는 예수를 표방하여 새로운 도덕적 진지함과 성실함을 표현하고자 했다)과 비슷한 성격을 띠는 인상파 화가들의 공동체 결성은 꼭 실현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화가들이 공동체에 일정 분량의 그림을 제공하고 그에 따른 손실뿐 아니라 이익도 공동소유한다면, 서로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화상들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런 공동체가 무한정 지속되지는 않겠지만, 공동체가 존속하는 동안은 화가들이 용기를 갖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5) 





중요한 것은 ‘독립’입니다. “예술은 예술가들에게!"6)에게 맡겨져야 합니다. 예술가들은 독립을 지향해야 합니다. 독립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의 예술을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부조리한 것에 대해 싸우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의무입니다. 저희 문단에서 상식적인 것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본이 덜 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는 기본이 덜 된 상태에서 가오(form)가 아닌 포즈를 잡았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 상식적인 문제에 대해 에너지를 뺏기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상식이니까요. 횡당보도에서 파란 불이 켜지면 건너도 되는 것처럼 소소한 약속이니까요.


우리는 상식의 문제를 앞질러 미래를 건너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독립’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의식적으로 독립매체를 생각합니다. 처음에 구상한 이 글의 의도는 독립매체의 특징들에 대해 적는 것이었습니다. 이 매체들을 지면에 소개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가능성을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두 달 동안 독립매체 잡지를 모았고 ‘첫’이라는 제목으로 그들의 마음이 문단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표방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도 ‘Show me the money'가 아니라 ’첫‘이라고 구상을 했던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러한 방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각각의 잡지에 대해 ’첫‘의 흔적을 노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이미 독립매체에 대한 글은 많이 발표되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첫‘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money'가 필요한데 말입니다. 돈에 묶여 돈을 생각하고 돈이 없어 먹을 것을 먹지 못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돈의 가치는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술을 논할 때 돈을 좇는다면 입장은 달라집니다. 가진 것은 없어도 ‘가오’가 있어야 하는 예술가의 입장에서 ‘돈’의 추구가 부정적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만들고 이루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돈’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형께서는 예술을 하는 놈이 돈을 좇고 있냐고. 너는 선비가 아니었냐고 저를 비판하시겠지만 도시에서는 제 것이 없으면 그 누구도 저를 안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Show me the money'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필요한 돈은 밥을 먹고 세수하고 산책할 수 있는 돈입니다. 며칠 전 어깨 수술로 인해 제가 모아 두었던 돈을 모두 소진했습니다. 이 돈이 없었다면 저는 치료받지 못했을 겁니다. 이처럼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고 이런 돈을 바탕으로 예술을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자유 없음에 대해 자유를 갈구하는 힘과 돈 없음에 대해 돈을 갈구하는 힘이 교묘하게 만나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자유와 돈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유와 돈을 얻기 위해 움직이고자 했던 의지가 더 의미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형께서 저를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작은 책상에는 잡지 창간호들이 몇 권 놓여 있습니다. 독립문예지 『베개』, 2013년에 창간호를 낸 『발견』, 1999년에 얼굴을 보인 『작가들』, 부산의 『be:lit』과 『오늘의 문예 비평』, 1994년에 등장한 『문학동네』, 2020년에 첫 표정을 보인 『에픽』과 『지금, 만화』, 대구의 『시인 보호 구역』, 2019년에 1호가 나온 『문학3』, 2016년에 파란 파란하게 등장한 『사건들』 웹 잡지 <문화 다>, <아는 사람>, 월간 1인 문예지 『시 읽는 아침』 등의 자료들이 그것입니다.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첫’에 숨겨진 선한 의지를 논하려고 했던 저의 의지는 ‘돈’으로 물러난 것입니다. 첫 표정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고 지속된다면 우리 문학은 좀 더 나은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라고 말하려고 했던 것이었지요. 속도는 느리겠지만 작은 문제의식이 모여 나비효과처럼 큰 파도롤 만들기 바란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잡지를 유지하지 위해서는 아까도 언급했듯이 ‘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에 지원금을 받아 운영을 해 나갈 수도 있겠지만, 기획서를 잘 써서 더 많은 지원금을 얻어낼 수 있겠지만, 이러한 방식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것. 다시 말해 예술가 스스로 자본을 움켜잡을 수 있는 사건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과격한 발언일 수 있겠으나 지젝은 『팬데믹 패닉』에서 이런 말을 했었지요.




오늘날 모두가 우리의 사회 경제 시스템을 바꾸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최근 토마 피케티가 <누벨 옵세르바퇴르>에 기고한 논평에서 지적했듯이,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시스템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어떤 방향으로 바꿀 것인지, 어떤 조치들이 필요한지의 문제다. 지금 널리 퍼져 흔히 접할 수 있는 달콤한 말은 지금 우리 모두 이 위기를 함께 겪고 있는 만큼 정치는 잊고 오직 우리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틀렸다. 지금이야말로 진짜 정치가 필요하다. 연대를 위한 결단은 대단히 정치적인 것이다.7)



지젝의 이러한 발언은 코로나19를 경유해 흘러나온 것이지만 저는 이 문장에서 “연대를 위한 결단은 대단히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절만을 빌려오고 싶습니다. 센 누나. 센 언니들. 아우. 동지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나의 동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정치의 힘만이 이 열차를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러한 몽상만이 유일한 탈출구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러한 바람을 담아 저는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형께서는 제 생각이 너무나 과격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구체적이지 않고 낭만적인 감정만을 나열하는 것 같다고 쳐다볼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성만으로 움직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때론 순수한 ‘감정’이 이곳을 회전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시대는 이성보다 감정이 더 빛을 바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성과 감성 ‘사이’를 운운하겠지만 그런 교과서적인 발언은 필요 없습니다. 기울어진 구두 밑창처럼 한 번 크게 기울어져야 새 구두를 신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2020년에 제가 만났던 시인들을 생각합니다. 이들의 이름을 떠올립니다. 황규관, 최백규, 박은정, 이대미, 이수, 류현, 김광섭, 서현진, 박인숙, 홍일표, 신동옥, 신철규, 박세미, 김영산, 유희경, 기혁, 안태운, 김중일, 이현승, 서영처, 박민혁, 이철, 장현, 유비호, 한소리, 정우신, 강태구, 정재율, 이경, 이근화, 이서화, 송종규, 최지은, 윤종욱, 신용목, 오은경, 임재춘, 류진, 최세라, 이지아, 고재종, 민구, 은유나, 장미도, 서재진, 김지민, 전호석, 유승현, 전형철, 김건영, 이호석, 희음 등이 잡지나 시집에서 제가 2020년에 만났던 시인들입니다. 이들의 사연을 생각하며 각박한 이 시대에 그래도 세상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쩌면 이런 시인들의 목소리가 좋아 직장에 사표를 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에는 정교하고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품은 시인들이 계속해서 출현하고 있습니다. 형은 문단이 죽었다며 행복한 길을 떠났지만 이곳은 여전히 뜨겁고 시끄럽습니다. 이러한 시인들이 있는 한 저도 이곳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형께서도 읽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젊은 비평가를 위한 잡다한 조언」이라는 글에서 이러한 내용이 적혀있더군요.





우울증 환자는 어디서나 패배를 본다. 이 패배의식이 어떤 종류의 순경성에 그 밑거름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는 좋은 소설가가 될 수 도 있고 좋은 시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울증으로 좋은 비평가가 되기는 어렵다. 비평가는 자기 앞의 텍스트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려는 사람이다.8)




이 말을 듣고 뜨끔 했습니다. 저는 등단하고 4년 동안 우울증의 힘으로 글을 써내려간 것인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 글도 마찬가지 일수도 있고요. 제가 오랜 시간 힘겹게 써낸 에세이가 어쩌면 우울증(?)의 힘을 빌려 쏟아낸 것은 아닌지 몽상하게 됩니다. 이 작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텍스트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렵다”는 말에 반기를 들고 싶습니다.


형께서 이 편지를 받게 될 즈음에는 2020년 12월 끝자락에 놓이겠습니다. 스타벅스에서는 이미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카페에 앉아 창문 밖을 쳐다보고 있으면 그렇게 행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21년에는 정말로 진지하게 학업에 임해야 겠습니다. 나를 두고 떠난 형이 원망스럽지만 형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형의 삶이고. 형의 길이니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





1) 스타크래프트 치트키다. 게임 화면에 이 문구를 치면 미네랄과 가스가 1만씩 채워진다. 우리는 어떤 방식이든지 이런 치트키를 원하는지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제목은 Show me the money이다.

2) 장마르크 로셰트·자크 로브·뱅자맹 르그랑, 『TRANSPERCENEIGE』, 이세진 옮김, 세미콜론, 2013, 7쪽.

3) 문종필, 웹진 <문화 다> 2020년 1월 13일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reader_event&ps_boid=32

4) 이 좌담에서는 젊은 작가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인으로는 김미진, 서재진, 장미도. 소설가로는 장성욱, 이태형. 평론가로는 문종필이 함께 했다. 이 좌담 내용은 『인천문화현장』 44호 겨울호에 수록될 예정이다. 그래서 쪽수를 표시하지 못했다.

5) 빈센트 반 고흐, 『반고흐, 영혼의 편지』(3판), 신성림 옮김, 2019, 184쪽.

6) 위의 책, 185쪽.

7) 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강우성 옮김, (주)북하우스 퍼블리셔스, 2020, 117쪽.

8) 황현산, 「젊은 비평가를 위한 잡다한 조언」, 『현대시 산고』, 난다, 2020, 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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