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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Apr 06. 2021

이해가 아닌 깊은 이해

이대미 작가의 『비우』에 대한 인터뷰

“색깔만이 살을 가진 인간에게 생명력을 줄 수 있다”

(미셀 파스투로) 



2016년 5월 30일 여름의 시작을 알리며 『비우』는 출간되었다. 지금 현재 2020년 4월을 지나가고 있으니, 4년 전에 출간된 오래된 책(?)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수많은 책이 쏟아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무슨 이유로 이 책과 이 작가에 대해 주목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2019년 9월 10일에 발간된 시 전문 계간지 《딩하돌하》 52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비우는 어린 시절부터 환영을 보며 성장한다. 언니 해린은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는 동생의 다름을 예술가라고 다독여준다. 하지만 비우 눈에만 보이는 괴기한 현상을 주변 사람들이 이해할 리 없다. 비우는 자연스럽게 주변 친구들로부터 이상한 아이로 인식되었고, 대부분의 학창 시절을 우울하게 보내게 된다.


비우가 받은 상처는 언니 해린의 위치로 인해 더 크게 부각되었다. 언니는 비우보다 그림을 잘 그렸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자유로운 성격에 얼굴도 예뻤다. 더욱이 해린은 비우가 사랑한 남자 캐빈과 연애를 하기도 했으니, 언니에 대한 질투는 누르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해린은 목숨을 잃게 되고, 그때부터 비우는 언니가 숨겼던 슬픔과 고독을 하나 둘 알아가기 시작한다. 결국에는 언니의 아픔을 온전히 느끼게 된다. 이대미 작가의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비우』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비우가 자신의 상처를 깨닫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데 있다. 나는 이 덕목이 지금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타인을 알아간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것이고, 결국에는 내 몸속에 흐르고 있는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꿔주는 마법을 펼쳐 보이는 것이니 말이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한정된 밥그릇으로 인해, 서로를 미워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흐름 속에 놓여 있다. 마치 누군가를 먼저 죽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회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각자 흉측한 괴물이 되어 동료들의 발목을 부러뜨리고 으깨 먹으며 행복한 삶을 논한다. 그 누구도 올바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올바름에 대해 논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 올바름은 올바름이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올바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이한 세상이다. 정의와 의리가 중요시되는 사회라기보다는 오로지 생존만이 삶을 결정하는 시대다. 이러한 괴기스러운 사회를 무엇이라고 명명해야 하는가. 구조적인 문제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이 흐름 속에서 반기를 들지 못한다. 무기력하게 쓰러질 뿐이다. 이처럼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내가 아픈 만큼 당신도 아프다는 것을 인식하는 태도이다. 이 명제는 너무나도 흔하고 식상해서 새로울 것이 없지만,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지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시작된다. 이대미 작가의 그래픽 노블을 서두에서 언급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팔목이 점차적으로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당신의 뒤꿈치도 흉측하게 곪아 터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가을에는 ‘나’의 아픔과 ‘타인’의 아픔을 동시에 헤아리는 시집을 찾았다.




2020년 4월을 시점으로 8개월 전에 쓴 이 글의 요지는 주인공 비우가 자신의 고통을 직시하는 과정에서 ‘나’의 고통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깨닫게 된다는 데 있다. 나는 이 지점을 혁명의 한 시작점으로 읽었고 이러한 변모 과정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여기서 신선하다는 것은 앞서 말한 내용적인 측면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그래픽 노블이라는 매체적인 특징도 한몫했다. 내용과 잘 어울리는 환상적인 형식(그림)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동일한 내용이라도 층이 다르면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온다. 『비우』는 내게 그런 책이었다. 그래서 오래도록 옆에 두고 지켜봤던 것 같다.




『비우』 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은 각자의 방식으로 아파한다. 주인공인 비우도, 비우의 언니 해린도, 소설가 김지은도, 소설가를 꿈꾸었지만 지금은 출판사 일을 하고 있는 비우의 선배도, 비우가 사랑한 캐빈도, 비우의 엄마와 아빠도, 소설가 김지은이 만들어낸 가상 인물 ‘복자’도 모두 아픔을 곁에 두고 살아간다.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아프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다. 소설가 김지은과 비우는 환영을 보기 때문에 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아픈 친아빠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나야만 했던 해린은 새로운 가족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미안하다. 동시에 동생 비우가 사랑한 남자 캐빈과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난감할 수밖에 없다. 엄마는 딸 해린을 잃어버려 가슴이 너무나 아프고, 비우의 아빠는 복잡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자신보다 더 고통스러운 책 속의 주인공들과 조우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비우 선배는 소설가의 꿈을 이루지 못해 위축되어 있다. 두 자매와 삼각관계에 있는 캐빈도 입장이 편할 것 같지는 않다. 이처럼 『비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만의 아픔을 품고 있고, 이 아픔은 유기적으로 얽히고설킨다. 이중 해린의 다음과 같은 대사는 이 그래픽 노블을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 아닐까.





사람은 빈센트 반 고흐가 불운했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았을 거야.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봐. 빈센트는 테오와 깊게 연결되어 있었어 다른 사람을 깊게 이해하게 되면 절대 불행하지는 않을 거야. 나도 누군가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 늘 그것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정말로 깊게 이해받고 싶어 그건 내 욕심일까?





언니 해린은 위의 인용문에서 불운했던 천재 예술가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에 대해 말한다. 자신을 깊게 이해해주는 동생 테오가 있었기 때문에 고흐의 삶이 외롭지 않았다고 말이다. 이 지점에서 아이러닉한 것은 해린이 고흐와 테오의 관계를 동생 비우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니 해린은 동생 비우에게 진심으로 자신의 상처를 이해받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 지점은 캐빈과 해린이 만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제공한다.





하지만 해린을 너무 미워하지 마. 해린이를 먼저 좋아했던 건 나였어. 내가 가족 때문에 힘들었을 때 해린은 내 마음을 알아줬어. 해린이도 가족 때문에 힘들어했어. 우린 그런 점이 통했던 거야.




해린과 캐빈이 연인 사이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예외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진정한 연애에 있어서 외모와 성격과 권력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더욱 값진 것은 ‘이해’였다. 같이 공감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이들은 함께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대미 작가의 그래픽 노블을 읽으면서 이해가 아닌 깊이 있는 이해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어야 할 것 같다. 당신은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라고 말이다.


화려하게 피었던 벚꽃도 이제 바람에 날려 떨어진다. 이제 우리는 여름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이대미 작가는 내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우리에게 진정한 이해가 무엇인지 『비우』를 통해 질문해 주었던 그녀를 만나보기로 하자.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
문종필: 이대미 작가님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2016년 5월에 『비우』가 출간되었으니 어느덧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시간이 참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근황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면 독자들께서 참 좋아할 것 같아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후속 작품으로 지금 현재 무엇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다음 작업은 언제 즈음 서점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잠시 문학 장에 들어오신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작가이시니 촉촉할 정도로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웃음)



이대미: 『비우』가 다시 숨을 쉴 수 있도록 ‘발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디자이너로서 달려오다가 멈춰야 하는 시기에 도달했던 것 같습니다. 누구나 한번 그런 시기가 찾아온다고 생각합니다. 자의적이진 않았지만 저는 멈췄고 멈춘 다음 만났던 것이 작가로서의 삶이었습니다. 늦는다면 늦은 나이에, 빠르다면 빠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작업을 시작했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지 작가로서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늘 공부하려 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며 하루를 즐겁게 사는 편이지만 어쩌면 간신히 버텨내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사는 것은 인생의 행운이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두 번째 이야기를 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밤새 꾼 스펙터클한 꿈을 복기해 보는 것이 제 하루 시작에 즐거움이고 커피 중독 증상이 있으며 고양이 집사 노릇 하며 고양이들을 돌보는 즐거움(?) 또한 제 기쁨 중의 하나입니다. 고양이들을 관찰하면 웃음이 절로 나거든요. 또 뭐가 있을까요….


『비우』에서 반고흐와 테오의 이야기가 잠시 언급되는데, 두 번째 이야기에서 '테오' 이름이 나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글을 정리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꽤나 걸리고 있는데 올해 작업이 저를 놔 준다면 만나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문종필: 이르면 내년 봄에 테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두 번째 작품을 만날 수도 있겠군요. 어떤 내용으로 다가올지 기대됩니다. 창작과 관련해서는 저 또한 즐거움과 괴로움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작가님께서 말하신 지점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아침마다 밤새 꾼 스펙터클한 꿈을 복기”하신다고 하셨는데 예를 들어 어떤 꿈을 복기(復棋)하시는 건가요? 그리고 혹시 고양이 방송 유트버 크림히어로즈 아시나요? 루루라는 ‘고양’이가 오밀조밀 나오는 방송입니다. 


이대미: 예전에는 그날 꾸었던 꿈을 적어두었습니다. 지금은 인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꿈을 기록합니다. 재미있는 꿈을 꾸었을 때 아침에 복기해서 기록해 두지 않으면 금세 잊어버리는데, 그게 싫더라고요. 침대에서 가능한 한 오래 머무르려고 하는 수작도 있고요. 하하. 꿈을 설명하려고 할 때 대충 알 것 같은데 도대체 상황설명이 잘 안 됩니다. 꿈을 적어 놓을 때는 최대한 머릿속에 남은 이미지와 근접하게 묘사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적게 되면 내가 왜 이런 꿈을 꾸었을까 생각해보고 참 재미있습니다. 개인적인 놀이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평론가님이 언급한 유튜브는 제가 보지 못했습니다. 하하. 고양이 유튜브는 아니지만 얼마 전에 발견한 다람쥐들 유튜브도 재밌더라고요. 귀여워서 하루 종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종필: 개인적인 놀이의 차원에서 꿈을 복기하신 거군요. 그리고 다람쥐 유튜브 신선합니다. 저도 구독 눌러야 할 것 같습니다. (웃음)




이대미: 저에게 있어 그림은 그 내용의 정서와 밀접하게 반영되는 것 같습니다. 내용이 어두운데 그림 톤이 밝은 수는 없으니까요. 그림은 직관이 더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 서사를 다루게 되었을 때 저의 뇌에서 일어난 충격을 기억합니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느낌이랄까요.


비우에서 ‘파란색’은 주요색으로 쓰입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 색을 선택하여 썼습니다. 밝고 파스텔톤의 파란색보다는 좀 더 깊고 무거운 파란색을 선호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책 작업을 할 당시 저는 어두웠고 마음이 슬펐던 것 같습니다. 내 안에 품고 있었던 정서의 그림자는 형태로, 색채로, 이야기 속의 인물들로 표현되었던 것 같습니다. 꾹꾹 색연필을 눌러가면서 한컷 한컷 그렸던 때가 생각납니다. 3년 내내 다래끼와 피부 염증으로 고생했던 생각도 나고요.


저는 『비우』가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서 조금 더 머물 수 있는 책이 되길 바랐습니다. 책이 잘 읽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무 빨리 책을 읽으면 여운이 잘 남지 않더라고요. 조금 불편하지만 좀 더 그 페이지에 머문 다음 그다음 장으로 넘어가게 말입니다. 그래서 내용이나 상황에서 생략된 느낌도 들었을까 싶기도 하고 어쩌면 그 바라는 것이 제 욕심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문종필: 작가님의 말을 듣고 있으니 모든 창작활동은 매질이 다를 뿐 유사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 맥락에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파란색을 선택해서 썼다는 내용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데요. 창작 작품에 의도를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의도의 의도(의도를 두 번 반복하는 행위)일 경우, ‘나’를 드러내고자 할 때 보다 투명하게 ‘나’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간단히 말해 ‘머리’로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한다는 말로 변주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비우』는 이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보다 더 진한 파란색으로 ‘진정성’이 반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의도’의 측면이 직접적으로 부각된 지점은 “한 페이지에서 조금 더 머물 수 있는 책”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컷과 컷 사이(동작 간 이동)의 긴장을 유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여기서 질문하나 더 드릴게요. “처음 서사를 다루게 되었을 때 저의 뇌에서 일어난 충격을 기억”한다고 하셨는데요. 이 부분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실 수 있나요?


이대미: 흔히 좌뇌와 우뇌를 비교하잖아요. 좌뇌는 보통 언어를 담당하고 수학, 과학, 분석적이며 우뇌는 이미지, 종합적, 은유적인 것을 담당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한쪽 뇌만 쓰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에게 있어서 그림 표현은 더 직관적, 감각적이고 한 번에 쏟아 부으며 대상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추상적인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종필: 『비우』는 직관과 함께 우뇌를 열심히 훈련해서 만들어낸 작품이었군요. (웃음) 




*
문종필: 『비우』는 제게 특별하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개인적인 감각일 수도 있겠으나 최근 2~3년간 한국 문단은 특정 담론에 지나치게 치우쳐져 있다고 생각했어요. 다양한 작가에 대해 논하기보다는 유명한 작가들만을 조명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한동안 문학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문예지에 수록된 특집 내용도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 같고요. 그러던 찰나에 다소 생소(?)한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를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문학은 이제 끝(?)났나, 라고 생각하면서요. (웃음) 그런데 이 장르가 부끄럽지만 상당히 매력적인 영역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어요. 문학적인 요소를 충분히 녹여내면서 개별적인 작가의 붓 터치를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장르라고 생각했거든요. 문학적인 즐거움과 그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目)적인 측면에 자극받았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때부터 꾸준히 이 장르를 찾게 됐어요. 이대미 작가님의 『비우』도 그 당시에 만났어요. (웃음) 스콧 맥클라우드는 『만화의 미래』에서 윌 아이스너가 178쪽 분량의 두꺼운(?) 만화책 『신과의 계약(A Contract with God)』을 출간하면서 이 책을 ‘그래픽노블’로 명명했다고 해요. 기존의 ‘만화’와 구별 짓기 위해서요. 이 맥락에서 질문을 드리도록 할게요. 이대미 작가님께서는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장르에 대한 대중들이 품고 있는 편견은 없었나요? 만약 편견이 존재한다면 어떤 편견에 대해 화가 났었나요? ‘그래픽 노블’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요? 그래픽 노블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대미: 그래픽 노블은 정의하기에 참 어렵습니다. 서구에서는 그림 소설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천대받던 만화를 소설의 권위를 빌려 만화의 위치를 격상시키려는 고육지책으로, 혹은 예술로 승격시키기 위한 노력의 산실로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단행본을 일컫는 말 등으로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여러 의미로 쓰이고, 불리는 것이 그래픽 노블입니다.


미국과 유럽 그래픽 노블은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데, 예전에 미국 디즈니에서 일하는 분이 미국에서 그래픽 노블은 성적인 것, 폭력성 등 좀 더 비급의 정서와 내용을 내포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마블 코믹스도 그래픽 노블이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 그래픽 노블은 해커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유럽은 좀 더 개인적이고 예술적인 형태를 지향한다는 느낌이랄까요. 저는 유럽의 그래픽 노블을 먼저 접했습니다. 제가 처음 접한 그래픽 노블은 Enki Bilal(엥키 빌랄) “THE NIKOPO TRILOGY” 공상과학 소설 그래픽 노블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번역된 책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 지금까지 저는 내용도 모르고 그림만 봅니다. 하하. 책의 그림은 화려합니다. 저는 이 책을 1998년도 프랑스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책을 본 순간 신세계를 보는 듯했습니다. 비록 읽지 못하는 프랑스어로 가득 차 있지만 그림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책을 바로 샀습니다. 프랑스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엥키 빌랄의 책이 저에게 영향이 미쳤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저는 그래픽 노블을 논할 만큼의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이나 대중들이 어떻게 그래픽 노블을 바라보는지, 어떤 편견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다양한 시선이 있는 책들이 더 활성화됐으며 하는 바람은 있습니다. 시험에 나오기 때문에,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등의 목적으로만 책이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목적도 지니고 있지 않은 책들이 있어 주기를 바랍니다. 어떤 책들은 목적이 없기도 하니까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끌리는 커피숍을 보고 우연히 내리기도 하고 갑자기 강이 보고 싶어 한강에 달려가기도 하고 헤어진 남자친구가 문뜩 생각나서 메시지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실수로 메시지를 보내는 등 우리는 온통 이해 안 되는 짓들을 하는 동물이니까요.


우연히 프랑스 서점에서 만난 그 책은 저에게 깊게 내재하여 있었고 저는 그것을 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소소한 발견들이 각자의 삶에 일어나길 바랍니다. 인터넷에도 훌륭한 웹툰이 존재하듯 서점에서는 작가들이 만든 다양하고 멋진 그래픽 노블들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종필: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에 대한 비우 작가님의 애정이 느껴지는 발언이었네요. 엥키 빌랄의 “THE NIKOPO TRILOGY”를 구글에서 찾아보니 아래와 같은 이미지를 하고 있었어요. 저도 이 그래픽 노블을 읽어보고 싶네요. 프랑스어를 하지는 못하지만요. (웃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대미 작가님께서는 우연적이고 사건적인 것에 몸이 이끌리는 것 같아요. 프랑스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엥키 빌랄의 작품을 잊지 않고 좋은 추억으로 기억하시는 것도 그렇고, 조금 전에 말해주신 사적인 이야기도 그렇고요. 간단히 말해 ‘목적’이 없는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목적이 없다는 것은 대상을 투명하게 쳐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님께서 하시는 작업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창작은 생활과 분리될 수 없으니까요. 갑자기 『비우』의 한 구절이 떠올랐어요. 해린이의 작업 노트에 적힌 부분인데, “그림을 그리면 그 대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시몽이 만든 커피가 늘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가 그 때문일까?”라는 구절이에요. 이 내용처럼 대상을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목적 없이 다가가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창밖에 보이는 매력적인 커피숍을 보고 버스 안에서 하차 벨을 누르는 것처럼 말이에요. 생각해보니 제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제가 조금은 때가 묻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하하) 아무튼, 이러한 맥락에서 독자 분들에게 추천해 주실 그래픽 노블이 있을까요? 이왕이면 구입할 수 있는 좋은 작품으로 추천 부탁드릴게요.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도 알리고, 저도 좋은 작품을 읽고 싶어요. (웃음)


이대미: 훌륭한 다른 작품들이 많지만 제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들을 소개해 드릴게요. 『사브리나』(닉 드르나소), 『아들의 땅』(지피), 『노근리 이야기』(박건웅), 『다머』(더프백더프), 『발작』(다비드 베), 『아스테리오스 폴립』(데이비드 맞추켈리), 『예술 애호가들』(브레흐트 에번스), 『반고흐』(바바라 스톡), 『초원의 아이들(여름, 가을)』(야마다 후사쿠), 『자학의 시』(고다 요시이에), 『브라보 나의 삶』(보드엥 외) 『콩고』(크리스티 앙페리생 외), 『비수기의 전문가들』(김한민) 등이 있습니다. 



문종필: 책 제목에 관해 묻고 싶어요. 이 지점은 사후적인 맥락에서 논의될 수밖에 없는 무의식적인 측면이 강하게 작동하겠지만 책 제목을 상징적으로 잘 지은 것 같아서 꼭 질문하고 싶었어요. 이를테면 『비우』에 등장하는 ‘이모’는 이런 말을 해요.




사는 게 뭔지 모르겠다. 해린이 보내고 아버지까지 돌아가시면….  허무해, 인생이 너무 허무하다. 이 나이가 되면 뭐라도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비우야 난 말이야, 비가 오면 빗물에다 나를 깨끗하게 씻어 내고 싶어. 그리고 새 인생을 사는 거야




여기서 “비가 오면 빗물에다 나를 깨끗하게 씻어 내고 싶어”라는 말은 책 제목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비우’가 ‘비雨(우)’로 읽히기 때문이에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모두 아픈 존재로 그려지고 있어서 이모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 맥락에서 질문을 드리도록 할게요. 『비우』의 책 제목은 최종적으로 어떻게 결정되었나요? 주인공의 이름이 ‘비우’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대미: 평론가님 말씀대로 매우 무의식적인 면이 작용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그 때 개인적인 정서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세월호가 있었던 때였고 개인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이 있었던 때였습니다. 저에게 사람들은 매우 슬퍼 보였습니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그때 많이 제 마음을 흔들었던 것 같습니다.


문종필: 개인적인 사연과 당대의 시대적인 아픔이 『비우』에 녹아들었군요. 


*
문종필: 이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또 다른 장면은 캐빈, 비우, 해린이 빈센트 반 고흐의 묘지를 방문하는 장면이었어요. 이 장면에서 언니 해린은 비우에게 빈센트의 삶이 불운하지 않았다고 강조해요. 흔히들 우리는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이 불운하다고 생각하잖아요. 생전에 단 한 작품만을 팔았던 가난한 화가이자 동생 테오에게 생활비를 평생 조달받으며 힘겨운 삶을 살았던 안쓰러운 화가(?)로 말이죠. 물론, 고흐의 작업은 후대 화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지만 그가 살았던 현재는 그의 업적만큼 화려하진 않았다고 생각해요. 언니 해린은 이 지점을 전회 시켜 고흐의 삶이 꼭 그렇지는 않다고 반문해요. ‘이해’의 측면에서 고흐는 동생 테오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에 행복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죠. 이 맥락에서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작가님에게 ‘이해’는 무엇인가요? 깊이 있는 이해는 무엇인가요? 무슨 이유로 이 지점에 무게 중심을 두었나요? 




이대미: 테오가 빈센트 반 고흐에게 이렇게 말했을까요?




“형님, 제 돈을 형님에게 투자하니까 좀 팔리는 거로 근사하게 그려 보쇼!”
“도대체 왜 이렇게 스트로크를 미친 듯이 남발하는 겁니까? 물감값이 너무 많이 들잖아요! 반 고흐 형님, 제발 날 이해 시켜 보쇼?”




얼마 전 〈원스어폰어타임 인 할리우드〉(2019)를 보았습니다. 샤론 테이트 배우를 예쁘기만 한 로만 폴란스키의 부인으로, 연쇄살인범 찰스 맨슨 무리에게 처참하게 살해된 사람으로만 사람들은 그녀를 단편적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감독은 대체 역사―인류의 지난 역사가 기존 사실과는 다르게 전개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일련의 픽션 장르―를 통해 한 시대를 살았던 영화를 사랑하는 그녀를 조명합니다. 


효용성으로 따지면 마이너스 인생을 산 반 고흐의 삶은 참으로 고되고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후대 사람들은 압니다. 편지 속 반 고흐는 그림에 대한 열정과 환희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열정을 테오와 나눴습니다. 테오는 분명 고흐에 대한 ‘이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표현한 작품은 그야말로 선명하고 명쾌했습니다. 그가 만든 작품들,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 테오와 나누었던 대화들, 매일 매일 그림을 통해 새롭게 발견한 그의 이상들로 그림은 꽉 채워졌고 그것은 반 고흐에게 기적과도 같은, 죽음 이상의 결정들이 작품을 메웠습니다.


단편적인 재단은 대상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다고 생각합니다. ‘이해’는  어떤 ‘태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우에서 ‘이해’는 그런 맥락으로 쓰여졌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랬구나. 다 이해했어!’ 이런 태도는 아닙니다. 그 ‘이해’는 어느 정도 알 수 없음을 수반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자신의 에너지를 쓰는 것을 말합니다. ‘대상에 대한 노력’이 포함된 ‘이해’를 말합니다. 하지만 그 노력은 그저 알을 깨고 나오는 정도라고 생각됩니다.


이해의 강도에 따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나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한 인간의 머리로는 이 우주의 비밀들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시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혼잡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아톰 속에서 있어야 할지. 비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합니다. 지금 태어난 사람들의 생각과 전쟁을 겪은 어르신 세대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민주화를 쟁취한 세대들의 선택과 핸드폰 인터페이스를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접한 세대들의 선택이 같을 수 있을까요? 그 틈을 서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요새는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나의 이해는 어쩌면 싸구려 감정이나 풋내 나는 동정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반성을 많이 하게 됩니다.


문종필: 작가님께서 생각하시는 이해는 “대상에 대한 노력”이 포함된 이해인 것 같아요. 불가능하더라도 꾸준히 그 대상에게 닿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과정이라고 번역해 봅니다. 오늘 비가 내리네요. 파전과 함께 막걸리를 한 잔 마시겠어요? 홍대에 ‘참새방앗간’ 가보실래요? 아니면 여유 있게 차 한 잔 드시겠어요? 무엇을 먹든, 어디를 가든, 그래픽 노블에 대한 여러 이야기 많이 해요. 저도 지금까지 읽은 그래픽 노블 목록을 모두 펼쳐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웃음)


이대미: 네. 다 좋습니다. 좋은 대화와 맛있는 음식이 있다면 그곳이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문종필: ‘참새방앗간’으로 고고! 




 




‘참새방앗간’에 가지는 못했지만, 1년 전 김건영 시인과 함께 찾아갔던 더페이머스램(the famous Lamb)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디를 가야 할지 방황했는데, 문득 이 장소가 떠오른 것이다. 아무튼 장소가 생각났으니 다행이다. 김건영 시인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잘 지내고 있겠지? 아무튼, 우리는 이곳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신 후, 이대미 작가가 추천한 마포곱창 타운에서 야채곱창 2인분을 먹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엇인가를 만드는 사람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기분 좋았다.


이대미 작가는 커다란 눈을 가진 키 크고 멋진 사람이었다. 그래픽 노블 작가는 처음 만나는 터라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힘들어 했지만 그녀는 이런 나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비우』가 어색함을 풀어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 스타일과 결이 다른 ‘웹툰’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웹툰’의 시장성과 독자들 때문이다. 이대미 작가의 작업은 느리고 우직해서 무거운 무게를 자랑할 수 있었지만, 웹툰의 속도를 따라가기에는 이 장점이 오히려 단점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고민하고 생각하고 새로운 것을 멀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한 곳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에너지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매체와 함께 호흡했으면 좋겠다. 또한 그녀는 해외 출판 작업이 가능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두 번째 작업이 완료된 후, 『비우』와 함께 넓은 세상으로 번지길 바란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러한 판단 역시 한국의 그래픽 노블 시장이 다른 여타 장르에 비해 소외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언어를 사랑하는 애정 있는 번역가와 듬직한 출판사가 그녀 곁을 호위해 주길 희망한다. 그리고 건강히 오래도록 작업하시기를.


이대미 작가님! 멀리서 테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두 번째 작업 기다리겠습니다. 또 만나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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