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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Apr 07. 2021

좀비 파이터

ㅡ에코세대가 자신의 삶을 말하다





“정병일(鄭炳一)―― 그놈은 내심과 정반대되는 행동만을 / 해왔고, 그것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몽상한다.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이유. 내 ‘의지’가 아닌, ‘당신’ 때문이라고.


당신이 강박적으로 광장 주변을 배회하는 것도, 당신이 보험을 들기 위해 애쓰는 것도, 당신이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당신이 병에 걸리면 절대로 안 된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습관처럼 내뱉은 것도, 당신이 철저히 건강관리 하는 것도, 어쩌면 가족이 붕괴되면 모두가 끝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발언들을 사회적 책임으로 우회할 수 있고,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비판할 수 있다. 당신 책임이기 보다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구부러진 사회가 더 책임이 크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불만을 쏟아내도 ‘나’와 ‘당신’은 특정한 ‘조직’이나 ‘사회’가 우리를 지켜줄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당신’은 두꺼운 가면을 쓴 채, 평생을 살아간다. 남들 앞에서 수많은 거짓말을 하며 등을 구부린다. ‘가족’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사랑하는 ‘당신’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산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 글은 피할 수 없는 저주를 어깨에 짊어 쥐고 살아가는 늙지 않는 청년의 이야기다. 우울하지도 참혹하지도 않다. 먹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부르주아 좀비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봐도 어리석은 ‘찐따’다. 혼자서는 살지 못해 거머리처럼 남의 피나 빨아먹고 사는 찌질이. 이런 ‘진따’의 생존기를 누군가는 비웃겠지만, ‘진따’가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쓸모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자유의 길과 생존의 길. 두 갈림길에 서 있다. 비겁하게 생존을 선택한 이상 살기위해 피를 빨아먹어야 하는 드라큘라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선택한 운명이므로, 이번 생에 받아야할 벌은 달게 받겠다. 


좀비 


나는 행복하다. 성실하신 아버지와 어머니 덕분에 배고픔 없이 성장할 수 있었고, 마음씨 착한 누나가 내 곁에 있어서 별 어려움 없이 공부하며 잘 지낸다. 결혼 하지 못하고 돈 벌지 못해 눈치 보며 우아한 말을 우아하지 않게 뱉어 가며 살아가지만, 공부한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 속에 놓여 있다. 그래서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는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컨서머토리(consummatory)라고 이름 붙인다. 하지만 현재의 삶을 긍정하는 태도는 오래가지 못한다. 흘러가는 시간 앞에 ‘컨서머토리’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말한 다음과 같은 대사는 영화 속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몸짓이었는지 모른다. “사랑에 빠졌어요. 너무 아파요. 하지만 낫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이다. 그래서 가난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기 싫어하는지 모르고, 흘러내리는 피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늙은 피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좀비 같은 삶을 무의식적으로 즐긴다. 


좀비처럼 사는 인생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연민을 재생시킨다. 그래서 슬픔은 기술이 될 수 있고, 자랑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슬픔을 만들어 내는 일이 항상 유리하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구겨진 눈빛을 동시에 받아내야 한다. 이 눈빛은 나로 하여금 등을 웅크리게 하고, 내 안에 있는 괴물을 재생시킨다. 


‘습관’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는 것 같다. 슬픔도 습관이 되면 더 이상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지 모른다. 영화 <Hostiles>에 등장하는 한 병사(토마스 메츠)의 몸짓처럼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한 채, 말을 타고 질주한다. 상처가 낫지 않는다고 스스로에게 투정 부리지만, 어쩌면 상처 낫지 않음이 오히려 깨끗하게 상처가 낫는 것과 관련 있을 수 있다. 노숙자의 마음으로 산책 하고 주변을 걷는다.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이것은 분명 장점이겠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학부 때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과 만날 때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A는 재능이 있고 성실했지만, 형평이 좋지 않아 소설 쓰기를 그만두어야 했고, 학부시절 이광수를 주제로 A5 200장 분량의 논문을 쓰고, 일본어 책을 번역한 B도 살기위해 공부하는 것을 포기 해야만 했다. 


인생은 아이러니 한 것인지 모른다. 공부를 잘 하지 못해,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닌 메뚜기 같은 내가 박사논문을 쓰고 있고, 평론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것은 내가 좀비처럼 죽지 않고 기생할 수 있는 특수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회 


에코세대에 속하는 1980년생인 나는 정규적인 수입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디를 떠돌 던 떳떳하지 못하다. 독자 분들께서는 어떻게 살아요? 라고 신기하게 쳐다 볼 수 있겠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데 살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이런 나를 처연하게 바라 볼 수 있겠지만, 좀비는 죽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내 꿈은 일정 수입을 벌어들이는 거다. 이 돈으로 밥 지어 먹으며 하고 싶은 연구를 매듭짓고 죽는 것이다. 누군가는 지방대 시간강사의 삶이 피곤하다고 적었지만, 내게는 피곤함을 느껴 볼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진 적이 없다. 그래서 더욱 더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지 모른다. 


밥그릇을 챙기고자 하는 내 의지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공동체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오히려 병든 것은 내가 아니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 사회가 병든 것일 수 있다. 


병든 세상 속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동료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며칠 후, 떨어지게 될 벚꽃처럼 힘없이 내려앉아 으깨질 것이다. 꽃은 지고 다시 피겠지만, 우리 모두 더 이상 힘없이 떨어지고 싶지 않다. 단 한번만이라도 찬란하게 휘날려 보고 싶다.   


노동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말하면 이기적인 욕심일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회’다. 기회조차 부여 받지 못하는 이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백수 


돈을 벌지 못하는 내 마음은 다리를 절고, 어깨를 돌아가게 한다. 제대로 걷지 못해 이렇게 저렇게 걷는다. 이렇게 저렇게 걷고 있기 때문에 눈치 보며 살아간다. 술집에 가면 술값을 내지 못해 눈치 보고, 책을 살 때도, 아침에 일어날 때도 눈치 보며 살아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등단하게 된 이후, 소소하게 원고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원고료가 나올 때 즈음에는 종종 모임에 나가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술값을 몰래 계산하고 도망친다. 등을 보이며 질주 할 땐, 밀린 월세를 지불하는 것처럼 막힌 가슴이 뻥 뚫린다. 


학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등록금을 벌기 위해 노력했고, 재학생 시절에는 전산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 벌이를 했다. 전산실 아르바이트는 만족스러웠다. 터진 가슴을 끌어안고 전산실로 향하는 날엔 응급실로 실려가 며칠을 앓았다.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아르바이트였기 때문에 어떤 방식이든지 붙잡고 싶었다. 소논문을 마음껏 인쇄할 수 있었고, 칼라 프린트를 사용할 때도 큰 부담이 없었다. 언젠가는 이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시로 소논문을 복사했다. 이렇게 쌓여가는 논문을 바라보며 한동안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공부만 하면 시간당 최저임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집을 나설 때면, 사람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공부하면서 돈 벌 수 있는 꿈의 ‘직장’이라고 말이다. 그 당시 내가 받은 인금은 적었지만, 이 돈으로 읽고 싶은 책을 사고, 연애을 했다. 


생각해 보면, 전산실 아르바이트 하던 시절이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아침 8시에 전산실 문을 열고, 밤 11시에 문을 닫을 때면 시간당 최저임금을 계산할 수 있었고, 의무적으로 의자에 앉아 있어야 했던 탓에, 공부한 분량을 수치로 측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인천으로 향할 때면, 뿌듯한 마음을 움켜잡고 놓지 않았다. 하지만 전산실 아르바이트는 장학금 형식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박사 과정 수료 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학원에 다시 이력서를 뿌렸다. 


학원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운 좋게 연락이 왔다. 하지만 고민에 빠졌다. 버틸 수 있었지만, 걷기가 싫었다. 그래서 돈을 벌기보다는 ‘시발’ 정신으로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백수의 시작은 이때부터로 기억한다. 남의 피를 본격적으로 빨아 먹었던 날은 이때부터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D’라는 공간이다. 이 공간은 다양한 인문학 강좌가 열리는 곳이었는데, D 공간 대표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어, 몸으로 때우겠으니 인문학 강좌를 듣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다행이 D 대표가 허락해 주었고,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재수생 시절 칠판 지우는 아르바이트와 비슷하다고 생각 하며 독하게 일했다. 집에서 밥은 얻어먹을 수 있으니 어떤 방식이든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다양한 수업과 세미나를 병행하며 행복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즐겁게 설거지 하고, 청소하며 공부했다. 한 푼도 받지 못했지만, 돈보다 더 값진 것을 얻었다. 보수적인 학교 보다는 적응하기 편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즐거웠다. 이때 공부한 밑천으로 평론가가 될 수 있었고, 지금 이렇게 소소하게 원고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백수다. 백수로 산다는 것은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눈치 보며 살았던 시간이 너무나 길었던 탓에 이제는 눈치 보는 감각마저 느끼지 못한다. 


보험 


매달 나가는 보험료가 걱정이 되긴 했지만, 닳아가는 몸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실비 보험을 가입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난간에 부딪쳤다. 보험에 가입하기 위해선 직장이 필요했고, 어쩔 수 없이 없는 직장을 만들어야 했다. 만만치 않는 장벽이었다. 불안한 가슴을 끌어안고, 실비 보험을 가입하기 위해 은행에 방문하는 날. 자존심은 이렇게 무너졌다. 하지만 하늘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이런 나를 지켜보던 누나가 보험료를 대신 내주겠다며 자동이체를 해 주었다. 누나는 나를 생각하기 보다는 가족의 입장에서 책임져야 할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보험료를 내주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누나가 돈을 대주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도 한 달에 1만 2천원을 내야하는 실비보험에 가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다행이다. 몸이 아프면, 검사료 일정부분을 면제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현실인 것을 어떻게 하랴. 


지금은 다행히 백수가 아니다. 누군가가 직업을 물으면 평론가라고 대답한다. 물론 한 달 수입은 적다. 여전히 청탁 받긴 어렵지만 더 어려운 것은 청탁 받은 글을 잘 쓰는 것이다. 청탁 받으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지만, 잘 써야 한다는 압박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정욕망으로 인해, 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절하지 못하고 무작정 승낙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땐 누군가의 기회를 뺏는 기분이어서 동료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의자에 앉아 고생한 시간을 감안하면 원고료가 야박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원고료가 막상 들어올 때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이젠 누군가가 당신의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대답 할 수 있다. 


결혼식과 야학  


결혼식에 가기 위해서는 누군가로부터 돈을 빌려 축의금을 충당해야 했다. 백수로 생활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최소한의 비용으로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결혼식 소식이 들려 올 때면 땅속 깊이 숨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을 빌려서 결혼식에 가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이 질문 앞에 당당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지인의 결혼식에 가는데, 내 돈이 아닌 남의 돈을 빌려서 참석해야 한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내 노동으로 벌어들인 돈이 아니라, 남의 노동으로 축의금을 내야하는 행위가 오히려 더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혼식 자체가 행복한 날이니 굳이 가지 않아도 그들은 서운해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 했다. 결혼식 날이 인맥 자랑하는 날은 아니지 않겠는가. 먼 훗날 당신이 내 사정을 듣게 된다면 그랬었구나. 라고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야학교 후원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야학 선생은 부담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 되었다. 초롱초롱한 눈빛을 가진 학생들을 만나러 갈 때면 설랬다. 학교생활에 잘 적을 할 수 없었던 나에게 오히려 야학은 안식처와 같은 공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야학에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고민 하나가 생겼다. 야학교에 후원금을 내야 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부담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야학교로 이체되는 CMS 계좌를 없애는 방법을 알아보고, 지워 버리려고 노력했다. 


한 동안 내가 벌어들이는 수익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야학교로 자동이체 되지 않았고, 후원금을 내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웠다. 하지만 등단을 하고 난 후, 원고료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내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많은 돈을 벌지 못하는 내가 후원금을 내야 한다는 사실에 다리가 휘청 거렸다. 


야학교에 오시는 분들은 나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루를 힘들게 버티는지 모른다. 하루 빨리 속물에서 벗어나야겠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답은 자명하다. 돈을 벌어야 한다.  


이 글은 ‘에코세대가 자신의 삶을 말하다’라는 주제로 쓰인 글인데,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돈을 벌어야 한다고 적은 것 같다. 강박적인 리듬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이다. 문학은 하지 않고, 이렇게 돈 벌 생각만 하고 있다. 


짓눌린 벚꽃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벚꽃처럼 힘없이 떨어질 내 주변 동료들을 생각한다. 가진 것은 자존심밖에 없는 ‘나’와 ‘당신’을 생각한다. 힘겹게 일자리를 얻은 너에게 축하해 줄 수 없는 속물인 나를 생각한다.  


봄날에는 휘날리는 벚꽃을 만나보고 싶고, 경주에 가서 커다란 삶과 커다란 죽음 사이를 자전거 타고 질주하고 싶다. 사랑하는 너와 손잡고 갈라진 도시를 말없이 걷고 싶다. 이런 내  바람이 봄날에는 이뤄질 수 있을까. 남들처럼 나도 돈 벌게 되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여전히 보험금은 누나가 내준다. 야학교 후원금은 원고료가 들어오면 우선 보내기로 했다. 작년부터 얼굴이라도 비추기 위해 어느 모임이건 나가려고 애쓴다. 


여기까지 ‘좀비’ 이야기다. 살지도 죽지도 못해 남에 피나 빨아 먹고 살아야만 하는 드라큘라의 이야기. 찌질이 같은 삶. 어른이 될 수 없는 아이의 삶. 이런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다. 당신이 드라큘라거나 미녀가 아니면 모을까.



몽상


이 글을 쓰고 난 후, 내 몸도 내 주변도 내 마음도 많이 변했다. 어느 시인은 하루에도 몇 번 천당과 지옥 사이를 오고 간다고 적었는데, 나는 그런 경지는 아니더라도 여러 번 ‘카톡’을 지우고 탈퇴했다. 오랜만에 만난 너와 함께 밥 먹으며 거리를 걷고 수다를 떨었다. 누군가는 박사논문이 완성되면 돈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거라며 희망 섞인 말을 꺼내 놓기도 했다. 


이 글은 ‘급식체’로 쓰였고 자학적이다. 어쩌면 하소연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나이는 먹었지만 독립하지 못해, ‘가족’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당신’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생존할 순 있지만 ‘자유’가 없는 일상! 하루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살아야겠다. 



※ 


글 서두에 인용된 시는 김수영의 「적」(김수영, 「적」, 『김수영 전집 시1』, 민음사, 2004, 254쪽.)이다. ‘컨서머토리’는 “미리 ‘더 행복한 미래’를 상정해 두고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아주 행복하다’라고 느끼면서 사는 것”(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이연숙 옮김, 민음사, 2014, 136쪽.)을 말한다. 이들은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 비교적 압박감이 덜한데, 그 이유는 가족의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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