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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Apr 07. 2021

나는 봄을 낳아야 겠다

박송이 시인의  『조용한 심장』에 대한 단상


“누구에겐 아픈 봄 / 누구에겐 서러운 봄 / 꽃 피지 않는 봄”



이날만큼은 허리와 어깨가 아프지 않았다. 기운을 낼 수 있었다. 검은색 옷을 입고 이삿짐을 나르는 날, 우연히 읽게 된 그의 시는 너무나 반가워서 팔뚝에 힘을 더 쏟았다. 서랍 속에 이 시를 감추었고, 언젠가 이 시에 관해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약속을 지금에서야 지킨다.


내가 기억하는 그는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을 줄 알았다. 느리게 사는 법을 알고 있었고, 성실했다. 그런 그가 함께 공부하던 ‘낱’ 모임을 멈추고 사라졌다. 문우였던 그는 정신분석과 관련된 자신의 책을 서가에 꽂아 놓고, 미련 없이 떠났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떠난 이유를 자신의 탓이라고 둘러댔다.


그는 느리게 읽는 법도 알고 있었고, 선비로서 지조를 지키고자 했다. 자신의 시가 함부로 소비되지 않기를 바랐다. 시집을 묶지 않는 것도 느리게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믿었다. 이름도 첫 시집도 없는 쓸쓸한 이 시인의 시는 그래서 믿음이 갔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그는 자신의 이름을 팔지 않았다.


내가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이 시인과 몇 해 전 우연히 만났고, 함께 공부한 이력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순전히 개인적인 감각과 기억에 의존한 것일 뿐이다. 내가 기억하는 방식으로 적어 놓은 것이니, 독자 분들께서는 어떤 방식이든지 기억은 각자 다르게 적힌다는 유행가를 떠올려 주시길 바란다. 훔칠 수밖에 없었던 두 편의 시를 읽어보도록 한다.



이 세상은 입덧의 쓴물로 피어나고 태어나고 산란한다


해동하는 몸, 봄이라 부를까


금강변에 엎드려 헛구역질을 한다

빈속을 게워내다

땅에 고개를 묻는다


나와 마음이 강둑에 처박혀 나란히 울던 나날들

삶을 부정하는 독서법을 배우면서


나는 단 한 번도 땅을 품어본 적 없었다


봄이 올 때마다 기쁘지 않았다

해마다 죽은 척

내 몸은 피어오르지 않아서


나는 단 한 번도 강물과 하늘을

내 것이라 여겨본 적 없었다


금강변에 엎드려 헛구역질을 한다

빈속인 줄 알았는데

사방 푸른 토사물들


이건 우주가 나에게 주는 내가 살 신비인가


저 먼 데 구름이 부드러운 배냇저고리로 펄럭이고

이 생의 첫 바람인 듯

첫해를 쐬고 있는 싹들이

옹알옹알하는 이 봄


나는 이 무지한 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


나는 봄이 하자는 대로

아랫배에 두 손을 감싸 얹고

맨바람이 가자는 데로

나의 발끝은 사분사분 순해지고


결합과 분열과 소멸과 확장이라는 말은

이제 나로부터의 사건이다


아직 발각되지 않은 이 우주는

그것이 마냥 신비로워서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나는 봄을 낳아야겠다


                                       「입덧」 전문



마음이 강둑에 처박혀 울던 나날, 삶을 부정하는 독서법을 배우던 날들, 봄이 올 때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피어오르지 못해, 죽어서 살아야만 했던 시간들, 그는 단 한 번도 강물과 하늘을 내 것으로 여겨본 적이 없다. 왜 그는 지난날, 동료들에게 시처럼 말하지 못했던 것일까. 말해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시를 통해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봄을 질투해 본 사람은 안다. 봄의 잔인함은 ‘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품고 있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봄을 잔인한 계절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봄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 탓이다. 따라서 ‘봄’과 함께 동화되기 위해서는 봄과 동등한 위치에 놓여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봄기운을 만끽하기란 쉽지 않다. 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과, 봄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벌어져 있다. 이 틈을 메우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시인은 어느 순간부터 무지한 생을 다시 시작하고자 애쓴다. 봄을 느낄 수 없었던 자신을 밀어낸다. 이 시를 읽으며 나와 당신은 힘겹게 버틴 봄날의 순간을 떠올릴 수 있고, 봄 자체를 즐겼던 순간으로 몸을 비트는 상상을 할 수 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봄이 하자는 대로 몸을 맡기고, 바람이 가자는 데로 발끝을 모은다. “나는 봄을 낳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긍정은 ‘나’와 ‘당신’을 긍정하게 만들고, 얼마 남지 않은 봄을 기다리게 만든다. 화해할 수 없는 대상과 화해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긍정을 재생시키는 힘이 어디에서 시작되건, 이 힘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잠이 들 때마다

                                     죽은 엄마가 나타났다


엄마 그만 가

떠돌지 마

이 땅의 빗줄기는 날카로워

아무렇게 비를 맞고 있는데

상처가 없는데

모두 울고 있어


따라오지 마

어차피 엄마는 감당 못할 날씨였어

이 땅에 오래 머물지 못한

꼬불거린 머리채와 암 덩어리는

스스로에게 항변한 복수였으니

이룬 꿈이 되었으니

아무도 탓하지 마


수작 잭슨의 Evergreen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오는데

그건 눈물이 아니라

한 인간에 대한 가여움이야

술주정뱅이

거렁뱅이

나는 이 모든 초록들이 가여워

뿌리에 닿은 그 흙마저 앙칼지게 붙들지 못하는

그 길지 않은 손톱들이 가여워


나는 엄마의 딸로 태어나

시인의 딸로 자라고 싶었지

이 땅에 비가 쏟아지면

서로가 서로에게 닿고 싶은데

어떻게 닿을지 몰라

차갑고 날카롭게 흩날리는

그런 시를 마구 써 대는


엄마는 이제 자라기를 멈춘 나무들 사이에서

하얀 입술과 샛노란 머리칼을 한 채

춤을 추고 있어 활짝 뜬 눈으로

엄마 이제 그만 가


눈을 감으면 소름처럼

임종 냄새를

감은 속눈썹에서 갈피를 잃고

흐르기를 멈춘 눈물을 나는 잊지를 못해


같이 가자고?

내가 왜 엄마를 따라가

무너져서는 안 되는 게 있다면

그건 내부의 생이야

나는 이 젖은 땅에서

아이를 낳고 아이를 재우고

아이의 아침이 되어 줄 거야


엄마, 내 앞에서 사라져

제발 죽어서라도

제발 죽음만이라도 살아 봐

간절함이야말로

아름다운 시

삶이니까


향초를 피울게

잠잠히 자장가를 불러 줄게

아기처럼 잠이 들어 제발

아가, 괜찮아 괜찮아

잠깐 생이라는 나쁜 꿈을 꾼 거뿐이야

이제 코하자, 아가


                           「엄마 이제 그만 가」 전문


“엄마 그만 가 / 떠돌지 마”라는 명령어는 진솔하고 묵직한 언어다. ‘그만가’, ‘떠돌지 마’라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반어일 수 있고, 역설일 수 있다. 반어와 역설을 넘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단호한 목소리다. 시인은 이제 더 이상 엄마의 관성으로부터 얽매이지 않는다. 시인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였던 것일까. 시인은 무슨 이유로 개념으로 담을 수 없는 묵직한 이 언어를 사용한 것일까.


떠돌지 말고, 아무말도 하지 말고, 이제 그만 사라져달라는 말을 들은 당신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 침묵의 자세를 유지해야만 할 것 같다. 시인이 “엄마, 내 앞에서 사라져 / 제발 죽어서라도 / 제발 죽음이라도 살아 봐”라고 말했을 때, 엄마는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뒷걸음질하며 사라질 것 같다. 두 번 다시는 시인 앞에 나타나지 못할 것 같다. 「Mortal Engines」(2018)에서 슈라이커가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엄마는 거친 숨소리를 멈추고 뒤로 물러난다.


우리는 엄마를 향해 소리를 높여야 했던 시인과 이 목소리를 들어야 했던 엄마의 관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 관계를 사랑하는 연인이 주고받은 대화로 생각할 수 있고, 자신이 아끼던 옛 동료의 치열한 몸짓을 멈추고자 할 때, 언급한 발화일 수 있다. ‘-하지마’라는 그래서 슬픈 언어다.


묵직하고 소란스런 힘들이 오고 간 이후, 이 시의 마지막은 죽은 엄마를 달래면서 끝을 맺는다. 향초에 불을 피우고, 엄마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마침표를 찍는다. 어깨를 토닥거리며, 당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단호한 이 말이 아기에게 향한다는 점에서 역설은 더 깊게 들려온다.


이러한 방식이 그만의 ‘화해’일까.


2011년 한국일보에 등단한 그는 아직 시집이 없다. 그가 어떤 내용으로 첫 시집을 들고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무게라면 그의 시는 믿을 수 있다. 혹자는 박송이 시인과 문우였던 사실을 거론하며, 주례사 비평을 언급할 수도 있겠으나, 내 대답은 다음과 같다. 편견을 갖고 대상을 판단하기 전에, 물속의 물고기가 되어 아가미로 호흡해 보라고 말이다. 호흡해 보지 않고, 어떻게 좋고 나쁨을 논하겠는가. 내 글을 읽지 말고, 시인의 시를 직접 읽어 주시길 부탁드린다.


                                                                                                                        2019년 1월 5일.



⁕이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박송이 시인의 시 출처는 다음과 같다. 「입덧」은 2018년 『시작』 통권 65호 74~75쪽, 「엄마 이제 그만 가」는 2018년 봄•여름 『파란—시』 258~261쪽.


*「Mortal Engines」은 크리스찬 리버스의 감독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슈라이커는 주인공인 헤스터를 자신의 딸처럼 키웠다.


* 이 글 서두에 인용된 시는 쉰세 번째 304 낭독회에서 노래로 불린 금희씨의 「지금, 봄」을 인용했다.


* 박송이 시인은 2019년 8월 10일 『조용한 심장』이라는 첫 시집을 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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