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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Apr 10. 2021

지옥은 아니지만

ㅡ 이원하, 김건영, 황유원, 배진우의 시에 대한 단상


슬픔의 나라로 가고자 하는 자 있거든 나를 거쳐 가라.

영원의 가책을 만나고자 하는 자 나를 거쳐 가라.

파멸의 사람들에 끼고자 하는 자 나를 거쳐 가라.

정의는 지존하신 주를 움직여 

주의 위력, 지상의 지혜, 그리고

사랑의 근본이 나를 만들었노라. 

내 앞에 창조된 것이 오직 영원 말고는 없나니,

나는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이니라.

나를 거쳐 가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취향 


“좋아하거나 즐겨서 마음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흔들림은 의식의 영역에서 발동되지 않는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잔잔하게 흔들리는 코스모스 꽃이다. 취향에 노출된 주체는 특정한 대상을 무심코 쳐다보게 되고, 본능적으로 마음이 쏟아진다.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눌려진 힘의 크기만큼 더 크게 부풀어 오른다. 그래서 본능은 숨길 수 없고,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서슴없이 손길을 내밀게 된다. 당신은 취향을 셈하지 않고 나란히 그와 발을 맞춘다. 내가 너의 손을 놓을 수 없는 것처럼, 취향은 냉정한 당신의 주변을 서성거리게 만든다. 


취향은 한 인간이 태어나 겪게 되는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경험이 융합되어 만들어진다.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동시에 접촉하는 주체의 경험이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취향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형태도 모두 다르다. 비슷할 순 있지만, 동일하지 않다. 시를 바라보는 취향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 시를 선택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취향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자신의 에피고넨(epigonen)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고, 나와 닮은 그들과 신명나게 놀아보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무작정 취향만을 앞세워 시를 선택할 수는 없다. 좋은 시와 좋지 않은 시, 난해시와 가짜 난해시를 구분하는 기준이 있어야겠다. 


기준 


시는 새로워야 한다. 하지만 시가 새롭다고 무조건 좋은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것이 새롭지 않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무조건 새로워야 한다는 발언이야 말로 썩어 빠진 편견이다. 오히려 새로운 것은 낡은 관성과 함께 이행될 때 존재가 부각된다. 그래서 새롭다는 말을 자유로 바꿔 생각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이다. 자유는 형식적인 새로움과 내용의 새로움을 동시에 품고 있어서 새롭다는 막연함을 보안해 준다.  


자유는 틈을 만들어 기존의 질서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자유는 용기를 품고 있어서 독자의 심장을 요동치게 한다. 자유는 사랑과 동의어 관계에 놓일 때, 자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사랑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 편견을 무력화 시켜 분리된 서로를 껴안게 만든다. 돌처럼 굳어진 당신의 마음을 봄날의 얼음처럼 녹인다. 사랑과 자유는 죽음과 나란히 걷을 때 더욱더 가속화된다. 이 과정 속에서 생명이 쟁취된다. 사랑, 자유, 죽음, 생명은 쇠사슬로 묶인 뫼비우스의 띠이다. 서로 구별된 상태로 존재하지만 뒤엉켜있다. 뫼비우스의 띠는 시를 보는 하나의 기준이다. 


인간이 시를 쓰는 시적 순간만큼은 진실하다고 믿는다. 인간은 믿을 수 없지만, 인간이 쓰는 시적 순간을 의심해 본 적은 없다. 이 순간은 개별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횡단한다. 하지만 시적 순간을 읽어야 하는 주체가 병들었다면 이 순간을 붙잡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좋은 기준을 내새운다 한들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시를 읽는 주체의 몸가짐과 공감 능력 그리고 소양에 따라, 뫼비우스의 띠로 비유되는 멋진 시의 기준은 무용지물이 되기도 하고, 빛을 바라기도 한다. 중요한 것을 시를 읽는 주체의 몸가짐이다. 


이런 이야기를 적는 이유는 내 몸이 병들었기 때문이다.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시를 느낄 수 없었다. 겨울에 간행된 시 잡지를 모두 읽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시가 이상하다고 투덜거렸다. 숨이 막혔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똥도 하루에 내번을 쌌다. 아무래도 다시 사랑을 해야 하나 보다. 너가 없으면 나는 안 되는가 보다. 


며칠 전 인천에서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막걸리를 마셨다. 늘 그렇지만 술자리에선 ‘인싸’와 ‘아싸’에 대해 논하게 된다. ‘인싸’는 ‘아싸’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이야기와 청탁이 오느냐 안 오느냐에 대해 떠들었다. 잡지에 실린 시들이 편하게 실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을 잡고 어깨가 아프더라도 속물인 나를 이행해야한다.


취향과 기준을 내려놓고,  


나를 일으킬 수 있는 시를 찾았다. 


4인의 화자


여섯 명의 화자가 추위에 떨며 횡단보도에 서 있다. 체념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소녀와 고독을 감내해야만 하는 여자, 씁쓸한 삶을 긍정하는 당신과 품위를 지키고 싶은 그, 희망 없는 것에 목을 매다는 처량한 나와 당신이 그들이다.   



제가 가을을 봄이라고 부른 건요 

실수가 아니에요

봄 같아요 봄 같아서


얼굴에 입은 거 다 벗고

하늘에다 바라는 걸 말해봅니다


하지만 하늘에다 말한 건 실수였어요

실수를 해버렸으니

곧 코스모스가 피겠네요


코스모스는 매년 귀밑에서 펴요


귀밑에서 만사에 휘둘려요

한두 송이가 아니라서

휘둘리지 않을 만도 한데 휘둘려요


어쩌겠어요 


먹고살자고 뿌리에 집중하다보니 

하늘하늘거리는 걸 텐데 

어쩌겠어요


이해해요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잖아요

귀밑에서 스스로 진리에 도달하고 

질문도 없잖아요


그 좁은 길 

무게 넘치는 곳에서

질문이 없잖아요


꺽어다 주머니에 찔러넣어도

내년에 다시 회복할걸요


휘둘리며 사는 삶에는 

애초에 비스듬하게 서 있는 것이 약이니까요


이원하, 「코스모스가 회복을 위해 손을 터는 가을」 전문, 『문학동네』 2018, 겨울호, 323~324쪽.



똘망똘망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고 싶은 말을 야무지게 다 할 줄 알았던 단발머리의 매력적인 이 소녀는 자신의 꿈이 패션디자이너라고 했다. 글을 잘 썼고, 여러 사람들에게 자신의 피를 나눠주기도 했던 독특한 소녀였다. 소녀는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달리기를 잘했고 나뭇잎처럼 아담한 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을 붙잡을 수 없었다. 소녀의 작은 손은 점차적으로 말라가기 시작했고, 현실 앞에서 꿈은 무기력하게 쓰러진다.  


귀밑머리에서 코스모스 꽃이 핀다. 소녀는 소녀의 문턱을 힘겹게 넘어섰을 때, 먹고사는 일에 직면하게 된다. 노력하고 애써보았지만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얼굴에 씌어진 무거운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하늘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쏟아 냈다. 하지만 지구의 중력으로 인해, 위로 올라간 말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떨어진다. 하늘은 단 한 번도 소녀를 도와준 적이 없다. 


소녀는 흥얼거리며 괜찮다고 웃는다. 좁고 좁은 세상도 버티다보면 참을 수 있다고 스스로를 토닥인다. 흔들리며 사는 삶이 오히려 약이 되지 않느냐고 자위한다. 세상에 희망 같은 것은 존재한 적이 없지만, 거뜬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새침하게 말한다. 소녀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체념’하며 버티는 것이다.      



같이 죽을래요 라고 물어본 사람이 있었다 유리를 만지면 부서진 기분이 든다 손끝이 터져나간다 같이 죽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같이 있다가도 죽을 때는 혼자다 벽에 기대 버텨야 한다 같이 죽겠다고 했는데 아무도 죽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꾸 유리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아주 작아져서 사라질 때까지 깊이 들어간다 유리 속에서 사라진다 아무도 유리 안에 있을 수 없다 입을 닫는 사람처럼 유리는 날카롭게 닫힌다 유리를 오래 만지면 잠들 수 없다 오래 바라보면 흔들리며 취한다 유리는 차갑다 변하지 않는다 유리를 오래 들여다보는데도 유리를 볼 수 없다 맺힌 상을 볼 수 있다 유리에는 아무것도 스미지 않는다 유리는 변하지 않는다 유리에는 보이는 것만이 들어있는가 유리는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처음 본 사람이다. 유리는 영영 사라지지 않고 부서지기만 한다 같이 죽을래요 라고 묻는 것처럼 작고 날카로운 유리들이 된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뾰족한 표정은 부서진다 


김건영, 「유리를 만지는 병」 전문, 『시작』 2018, 겨울호, 198쪽.



어제 저녁 그 남자에게서 ‘죽음’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 남자도 지칠 만큼 지쳐서 힘을 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나도 이 지옥 같은 세상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이 남자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래, 죽어보는 거다. 


남자와 여자는 남도의 작은 바닷가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마지막 여정을 보내기로 다짐하고 칼모틴(Calmotin) 두 갑을 사, 각자 한 갑씩 삼킨다. 그들은 바다를 쳐다보며 죽는 순간을 기다린다. 서서히 목구멍이 타오른다.  


남자는 구토와 열을 쏟아낸다. 나도 마찬가지로 온몸이 마비된다. 그런데 반전이다. 며칠 전 죽고 싶다고 말하던 그 남자의 핏발 선 눈에는 살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차 보였다. 내 발목을 붙잡고 살고 싶다고 애원한다. 나 또한 죽도로 살고 싶어서 내 발목을 끌어당기는 그의 얼굴을 힘차게 걷어찼다. 만약 바로 차지 않았더라면 그와 함께 바다에 빨려들어 갔을 것이다. 그는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하고, 며칠 후 퉁퉁 부은 시체로 발견된다.


“같이 죽을래요”라고 공손하게 거짓말 했던 사람이 있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화자는 잘 알고 있다. “같이 있다가도 죽을 때는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같이 줄을래요”와 같은 “뾰족한 표정”은 나를 슬프게 한다. 나를 사랑한 사람이 있었던가. 같이 죽어 보자고 뻔뻔하게 말하기 보다는 세상을 향해 거친 욕을 쏟아내는 것이 좀 더 정직한 것인지 모른다. 이 화자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은 “같이 있다가도 죽을 때는 혼자”일 수밖에 없는 고독을 감내하는 것이다.    



뚫어도 뚫어도 뚤리지 않는 나날들 

내가 싼 똥을 한참이나 마주하고서 그 냄새를 맡아줘야 하는 나날들 

우리가 형편상 많이는 못 주는데 이 돈 받고도 할 수 있냐는 

그 뒤로 수도 없이 들어온 똑같은 질문들

아무리 해도 해도

아직도 누가 한참 멀었다는 눈으로 날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데 


근데 막힐 일이 없으면 뚫을 일도 없잖아? 

오늘 시원하게 내려가는 이 변기를 

내가 이 생에 누릴 수 있는 최대치의 기쁨으로 알자

내려가는 변기에 무한히 감사하자


황유원, 「최대치의 기쁨」 전문, 『문학과 지성사』 2018, 겨울호, 52~53쪽.



홍대 게스트하우스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로 간다. 코흘리개처럼 보였을까. 사장은 그에게  이렇게 면접을 보면 안 된다고 훈계한다. 그가 한 실수는 어는 나라에 다녀왔느냐는 사장의 질문에 대륙 단위로 말하지 못하고, 이탈리아 영국 노르웨이 인도 미얀마 베트남 캄보디아 등을 여행했다고 말한 것, 변기통을 뚫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자신감 있게 뚫어 봤다고 거짓말 하지 못한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가면을 쓸 줄도 알았어야 했는데, 어리석게도 그는 가면을 쓰고 다닐 줄 몰랐다. 


그의 주변에는 보기 싫은 것들이 눈앞에 넘쳤다. 답답해서 힘을 낼 수 없었다. 뚫어도 뚫리지 않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 돈 받고 일 할 수 있겠느냐는 사장의 대답에 괜찮다며 곧바로 수긍해야 했고, 코흘리개 시절 사장처럼 사람들은 여전히 한참 멀었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본다. 혀를 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이러한 경험은 냄새가 풀풀 나는 자신의 똥을 바라보는 것과 다름없다. 


그는 엉덩이에 힘을 주고 난 후, 갈기갈기 찢어진 건강하지 않는 똥을 바라본다. 항문을 힘차게 닦고 피 묻은 휴지를 흩어진 똥 아래 휙 던진다. 물을 내린다. 똥물은 단숨에 내려가지 않고 공갈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넘쳐 흘리려던 찰라, 꾸르릉 꾸르릉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변기가 뻥 뚫린다. 


이 장면을 목격한 순간 시적 순간이 지나간다. 화자는 내가 하는 일들이 이처럼 시원하게 내려갔으면 하고 바란다. 오늘처럼 시원하게 내려간 똥이 이 생에 누릴 수 있는 최대치의 기쁨으로 생각한다. 누군가가 막힌 변기 뚫어 본 적 있느냐고 또 다시 묻게 된다면, 이젠 당당히 뚫어 봤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똥이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삶을 긍정한다. 이 화자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씁쓸한 삶을 슬프게 긍정하는 것이다. 



돈이랑 품격을 논하고 싶다

돈이랑 놀고 싶다

돈이랑 먹고 싶다

돈이랑 쉬고 싶다

돈이랑 여행 가고 싶다

돈이랑 친구 하고 싶다

돈이랑 공부하고 싶다

돈이랑 청록파도 외우고

돈이랑 방충망 구멍을 메우고 싶다

돈이랑 길도 잃고

돈이랑 어울리는 색도 찾아주고

돈이랑 방학을 보내고 싶다

돈이랑 백화점 1층에서 매장을 잘못 들어가 친구와 소개도 해주고 싶다 


배진우, 「나의 방 옷장과 천장 사이 스핑크스가 엎드려 있다」 부분, 『현대시』 2019, 1월호, 88~89쪽.



그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6가지 이상의 커피 맛을 구분할 줄 알고, 17번의 순서로 진행되는 청소법을 알고 있다. 더욱이 그는 세련된 의미와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예술가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고, 친구들 또한 그에게 오래오래 살아서 유명해지라는 덕담을 꺼내놓는다. 누군가는 그에게 소고기를 사주며 당신의 재능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기운을 불어 넣는다.


그런데 그에겐 돈이 없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데, 죽어도 때깔이 좋을 수 없는 환경 속에 살고 있다. 의미와 형식을 하루 종일 셈하는 노동자이지만, 돈을 벌지 못한다. 몸 안에는 돈 드는 것이 가득 차 있어서, 오래 살면 살수록 수돗물처럼 돈이 줄줄 새나간다. 맛 집 대부분을 외우고 있지만 돈이 없어서 찾아가지 못하고, 먹고 살려고 죽도록 일하는데 학생이라서 돈을 벌지 못한다. 누군가는 눈먼 돈을 찾으라고 조언해 주지만, 돈을 찾아도 돈은 나오지 않는다. 돈을 찾으러 이러 저리 뛰어다니다가 오히려 발목 인대가 휜다. 이 시의 화자는 품격과 돈을 함께 이행하고자 발을 구르지만 매번 실패한다. 


서러운 봄 


먼 훗날 사람들은 이들의 시를 읽으며 어떤 생각을 할까. 2019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먹고 살기가 참 힘들었다고 기록할까. 촛불 혁명을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인식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고 기록할까. 인간은 어쩔 수 없는 동물이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한탄할까. 시 속에 등장하는 화자는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비틀어져 있다. 나는 비틀어진 이들의 팔목과 어깨와 발목이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봄의 문턱을 넘어섰지만, 서러운 봄을 다시 맞이해야만 할 것 같다.


지옥의 문 앞에서 나와 당신은 당당할 수 있을까. 




                                                                                                                                                                                                                     2019년 2월 4일 




p.s 


‘취향’의 의미(연세대학교 언어정보개발연구원 편, 「취향」, 『연세 한국어사전』, 두산동아, 1999, 1850쪽.)는 사전을 참고했다. 


글 서두에서 단테의 글(「지옥편」, 『신곡』(2판 5쇄), 허인 옮김, 동서문화사, 2017, 30쪽.)을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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