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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Apr 11. 2021

병원 1)

손미,  오상룡, 긴건영 시인의 시집에 대한 단상

언니의 죽음은 

내 안에 알 수 없는 감정들의 충돌이었고

난 그 찌꺼기들과 싸워 나갔다.

그것은 고통이었다.


언니처럼 되고 싶었다.

자유로워 보이는 언니처럼.

환하게 웃는 언니처럼.

예쁘고 인기 많은 언니처럼.

그림 잘 그리는 언니처럼.

그렇게 되고 싶었다.


언니에게 아픔과 상처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아픔을 말할 때,

언니가 아파했을 때,

엄마, 아빠, 이모의 아픔도,

심지어 나의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난 그렇게 막혀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아파한다. 


이제 나는 조금씩 내가 아픈 것을 느끼는 만큼 

그들의 아픔도 느낄 수 있다. 


얼마나 아파했을까?2) 




비우는 어린 시절부터 환영을 보며 성장한다. 언니 해린은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는 동생의 다름을 예술가라고 다독여준다. 하지만 비우 눈에만 보이는 괴기한 현상을 주변 사람들이 이해할 리 없다. 비우는 자연스럽게 주변 친구들로부터 이상한 아이로 인식되었고, 대부분의 학창 시절을 우울하게 보내게 된다. 


비우가 받은 상처는 언니 해린의 위치로 인해 더 크게 부각되었다. 


언니는 비우보다 그림을 잘 그렸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자유로운 성격에 얼굴도 예뻤다. 더욱이 해린은 비우가 사랑한 남자 캐빈과 연애를 하기도 했으니, 언니에 대한 질투는 누르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해린은 목숨을 잃게 되고, 그때부터 비우는 언니가 숨겼던 슬픔과 고독을 하나 둘 알아가기 시작한다. 결국에는 언니의 아픔을 온전히 느끼게 된다. 이대미 작가의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비우』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비우가 자신의 상처를 깨닫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데 있다. 나는 이 덕목이 지금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타인을 알아간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것이고, 결국에는 내 몸속에 흐르고 있는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꿔주는 마법을 펼쳐 보이는 것이니 말이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한정된 밥그릇으로 인해, 서로를 미워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흐름 속에 놓여 있다. 마치 누군가를 먼저 죽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회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각자 흉측한 유령이 되어 동료들의 발목을 부러뜨리고 으깨 먹으며 행복한 삶을 논한다. 그 누구도 올바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올바름에 대해 논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 올바름은 올바름이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올바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이한 세상이다. 정의와 의리가 중요시되는 사회라기보다는 오로지 생존만이 삶을 결정하는 시대다. 이러한 괴기스러운 사회를 무엇이라고 명명해야 하는가. 구조적인 문제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이 흐름 속에서 반기를 들지 못한다. 무기력하게 쓰러질 뿐이다. 


이처럼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내가 아픈 만큼 당신도 아프다는 것을 인식하는 태도이다. 이 명제는 너무나도 흔하고 식상해서 새로울 것이 없지만,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지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시작된다. 이대미 작가의 그래픽 노블을 서두에서 언급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팔목이 점차적으로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당신의 뒤꿈치도 흉측하게 곪아 터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가을에는 ‘나’의 아픔과 ‘타인’의 아픔을 동시에 헤아리는 시집을 찾았다. 



쇠꼬챙이4) 



나를 돌볼 수 있는 사람만이 당신을 주의 깊게 쳐다볼 수 있다. 자신의 아픔을 냉정히 쳐다볼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에너지의 이동은 정치적인 영역으로 걸림돌 없이 확장된다. 그녀가 “한 번도 광장에 나가지 않은 나를”(「양말도 안 신고」) 써 내려 가는 것과는 무관하게 정치적인 것의 올바름은 나와 타자의 아픔을 공감하는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나-내가-네가-너’를 통해 자신 안에 있는 나‘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한다. 수많은 ‘나’를 확인하는 과정은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내 안에 있는 나‘들’을 반성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시인 옆에서 힘겹게 서성거리는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흰 달이 돌던 밤

의원에 누워 있는 너의 머리에 수건을 얹어 주었다

거기에 내가 들어 있지 않았다


밖에서 아이들이 공을 찼고 

너는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방금 멸종된 종족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안 사랑하는데

여기 있어도 될까 


머리와 머리가 부딪혀 깨지는데

흰 달이 도는데

네가 누워 있는 여기로 아무도 오지 않았다 


수건을 다른 방향으로 접어

너의 머리에 얹어 주었다


병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슬펐다


「한마음 의원」 전문



아픈 사람이 병원에 누워 있다. 


화자는 아픈 사람에게 수건을 얹어주며 우리를 생각한다. 화자는 누워있는 사람이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부정하지만 부정은 긍정의 영역과 땔 수 없다는 점에서 아픈 사람은 화자 자신이기도 하다. 

화자는 힘겨운 삶을 걱정하고, 사랑할 수 없는 몸 상태를 걱정한다. 자신을 위로해주는 사람은 또 다른 ‘나’ 일 뿐, 그 누구도 곁을 지켜주지 않는다. 아픈 몸은 계속해서 통증을 더할 뿐이다. 그녀는 머리가 깨지는 고통 속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간다.

아픈 사람에게 그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니 서글프고 외로운 마음은 점점 커진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병이 없지만 지독하게 아프다는 것이다. 아프지 않은데 아플 수밖에 없으니, 치료될 수 없다는 점에서 아픔의 크기는 더 진하게 다가온다. 시인은 “장례도 없이 / 환생도 없이 / 같은 몸에서 / 몇 번이나 죽을”(「옥수수 귀신」) 수밖에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화자의 병은 위독하다. 


하지만 시집 첫 번째 시 「옥수수 귀신」과 마지막 시 「문」 사이에 놓인 여러 시편들을 통해 시인은 스스로를 치료한다. 그 방법은 자신을 객관화 시켜 냉정히 나‘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끝은 다음과 같이 펼쳐진다. 



문이 열린다 네가 닫힌다

따라 나가던 내가 닫힌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문을 열고 들어가

무수히 많은 의자에 앉았었지만


벌컥 열고 들어와 

누군가 너를 훔쳐갈까 두려웠다


비밀이었던 문이 삭제된다

힘주어 문고리를 물고 있던 복도도 사라진다


더는 애쓰지 말자


손잡이 떨어진 문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참 오래도 서 있었다


어쩌면 문 같은 건 아예 없었던 거다 

나는 이제 네가 궁금하지 않다 


「문」 전문 



시인은 더는 애쓰지 말자고 다짐한다. ‘나’와 ‘나’를 가로막았던 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나와 네가 함께 있던 장소에 누군가가 벌컥 들어와 너를 데려갈 걱정은 이제 쓸모없다고 말한다. 시인은 ‘문’을 의식하지 않는 행위를 통해 견고한 문을 허문다. 


‘나’는 이제 ‘네’가 정말로 궁금하지 않다. 시인은 ‘나’를 의식하지 않는 상태에서 건강하지 않은 ‘나’를 밀어낸다. 이 행위를 통해 ‘나’의 상처를 쓰다듬는다. 이러한 성질은 시집을 관통하는 하나의 습관이다. 시인은 이 행위를 밀고 미는 태도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를 지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나’의 고통을 냉정히 바라보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심스럽게 타자의 고통을 공감5)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 방법을 의식하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완수했다. 


손미 씨의 시집은 ‘나’를 진단하는 고백서 같다. 독자들은 이 시집을 읽으며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도 백번 이긴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시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과정에서 ‘나’를 지움으로써 ‘나’를 얻었다. 이 시집은 말랑말랑하지만 그 어떤 시집보다도 단단하다. 나를 바꾸는 것처럼 위대한 혁명은 없으니 말이다. 


소원6)  



고(故) 오상룡(1974~2004) 씨의 시집 『텅텅 가벼웠던 어떤 꿈 얘기』는 가볍지 않다. 투박하지만 무엇인가 묵직한 힘이 느껴지는 기이한 시집이다. 지금 나는 작은 카페에서 경쾌한 음악을 들으며 그의 시집을 읽고 있지만 시집 속의 언어를 음악이 방해하지 못한다. 언어 속에는 정말로 글 쓰는 사람의 영혼이 묻어 있는 것 같다. 이상하게도 이 시집은 낡은 것7)처럼 느껴지지만 생기 있는 측면이 유독 더 빛난다. 그는 어떤 삶을 살다가 이곳을 떠난 것일까. 


시집을 펼쳐본다.


시인은 물과 물 사이를 송곳처럼 헤집고 들어가는 물고기가 되고자 했다. 무엇이든 쉽게 만들어지는 것을 경계하며 천천히 자신의 건축물을 쌓아 올렸다. 겨우 얼어버린 것들을 함부로 깨지 않았고, 창작을 위해 고양이를 가두거나 거미를 죽이지 않았다. 겸손하기 위해 노력했고, 삶과 죽음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애썼다. 


아픔을 견딘 나무의 비명을 외면하지 않았고, 서울과 원주를 오고 가며 글공부를 했다. 그 사이에서 마른오징어를 씹었다. 바람이 불면 생기를 얻었고, 바람이 불면 헛발이라도 꾹 밟았다. 그러나 가장 경계해야 할 적(敵)이 자신이 좋아하는 바람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고양이를 보면서 익살스러운 상상을 했고, 풀잎을 보고선 이로움과 역겨움을 동시에 떠올렸다. 가혹한 삶만을 선택했다.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다. 작가의 연보가 실체가 아님을 역설하며 자신을 독보적인 영역에 끼여 넣고자 했고, 유리인형을 광적으로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뱀이 가르쳐준 살갗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흉터를 바람에 말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아침만 되면 나는 다시 태어난다

이상하게도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었던 책을 생판 모르는 책으로 다시 읽게 되고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실직되지만 이상하게도 굶어죽지도 않고 이사도 가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사흘 전에 사뒀던 담배 한 보루가 한 갑밖에 남아 있지 않고

이상하게도 술 먹고 들어온 바지 주머니에 불티나 라이터가 다섯 개나 들어 있다

이상하게도 백주 대낮에 시 창작 실습 교실에선 교수와 학생 모두가 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앉아 있고 이상하게도 누구는 열변을 토하고 이상하게도 누구는 상처를 받고

이상하게도 나는 한순간 우울에 잠긴다

이상하게도 선배들은 한 명도 취직하지 못한다

이상하게도 선배들은 웃으면서 학교에 들르고

이상하게도 명동역 화장실에서는 입장료 백 원씩을 꼬박꼬박 받는다 

이상하게도 한 여자와 독하게 헤어지고 

이상하게도 한 달도 못 되어 새로운 여자에게 애가 탄다

이상하게도 술만 마시면 그 여자에게 하나씩 실수를 하고  

이상하게도 누구의 자취방에 혼자 누워 있다

이상하게도 술이 깬 날이면 그 여자에게 한 걸음도 다가가지 못하고

이상하게도 그 여자는 전날 밤 내 실수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제대한 친구 놈은 경영학과로 편입하고

이상하게도 단잠에 들고 

이상하게도 비명 같은 잠꼬대를 내지르다 제 풀에 놀라 깨난다


이상하게도 내 몸은 그런대로 건강하고

이상하게도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쏟아지는 햇볕을 바라보며 계단 귀퉁이 같은 데 앉아 있을 때

이상하게도 그것이 지나치도록 충만하고 여유로운 것이어서 누구와도 공유 불가능한 이상한 행복감에 젖는다 한없이 

이상하게도 순환하는 거대한 우주에서 삐끗 삐져나오고 때론 일부분을 일그러뜨리기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렇게 또 봄은 온다

이상하게도 저렇게 벚꽃의 우주는 제 복잡한 어둠을 희디흰 환희로 지나치도록 활짝 터뜨린다

이상하게도 견딜만한 희디흰 허탈함 희디흰 단순함으로 터뜨린다.

이상하게도 견딜만하게 이상하게도 견딜만하게 

이상하게도 이상하게도


이상하게도 아침만 되면 나는 또다시 태어난다

괜찮다


「이상하게도 봄날―1998년」 전문 




이 시는 이상하게도 힘이 느껴진다. 별다른 기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이상하게도 이상하게도 이상하게도에 리듬을 싣다 보면 어느새 아침이 오고,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봄이 허벅지 앞으로 다가온 느낌이다. 


시인은 이상하게도 아침만 되면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속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간 일상이 담겨 있을 것 같다. 시인에게 하루를 보내는 일은 힘겹다. 


힘겨운 시인의 삶은 자연스럽게 ‘나’를 쳐다보는 행위로 전염됐다. 그는 “모오든 불면과 강박과 편집에 절여져 과이하게 비대해지고 있다.”(「자기진단서」)며 스스로를 경계했으며, 스스로가 부끄러울 때면 “자책하면서 빠르게 그리고 어수선하게 나의 방”(「어떤 품 속」)으로 후퇴했다. 그곳에서 도약할 미래를 준비했다. 


시인에게 ‘나’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자 안쓰럽게 쳐다볼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나’에 대한 이러한 탐색은 요괴의 모습으로도 등장하는데, ‘요괴8)’라는 단어가 풍기는 에너지를 생각해 볼 때, ‘나’를 가까이서 돌본 시인의 시간을 셈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에너지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으로 확장된다는 사실이다.   



아직 어둠도 이루지 못했구나 


추락하고 싶어요 아 빠져들고 싶어요

비 웅덩이에 비가 내린다

비는 비 웅덩이 속 어둔 빗물 덩어리를 향해

수직으로 가늘고 투명하게

떤다

비 웅덩이에 비가 서성인다


때론 비에 비가 서성인다

아픔 주위에 아픔이 서성인다


그들은 두 배로 아파하는 것이다

아프기 때문에 아프고

아픔에 가 닿지 못하므로 아프고

비 하나, 비 둘, 비 셋


「비들」 전문



웅덩이에 비가 떨어진다. 웅덩이에 비가 서성거리면서 떨어진다. 아픔 주위에 아픔이 모여드는 것처럼 웅덩이에 비가 모여든다. 아픔이 모여드는 곳에서는 아픔의 크기가 증가한다. 하지만 아픔의 크기가 늘어난다고 해서, 아픔에 가 닿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오상룡 시인의 시집에 수록된 마지막 시 「소원」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소원을 비는 행위는 지금 현재 이뤄질 수 없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빌게 되는 간절함이다. 그는 타인을 느끼기 위해 신에게 두 손을 모은다. 


짧은 시간에 냉혹하게 결론 내리는 간사한 머리를 주지 마시고

살갗의 느낌으로 마구 흔들리는 앞뒤 없는 예민함도 주지 마시고 

가슴의 묵직한 감정, 진실한 열기를 주소서 

그 진실한 열기가 늘 잔잔한 물결 밑에 조금씩 치솟아 오르고 있어 

육감으로 결정하고 판단해도 그것이 후회가 되는 일이 없게하여 주소서 

저에게 부족한 건 그 진실한 열기임을 알고 있나이다 


또한 빠져들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만큼의 조용한 슬픔도 주소서 

그 슬픔으로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따뜻한 시선을 주소서

따뜻한 시선은 주시되,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유혹 앞에

꼼지락거리는 불길한 충동을 주지 마소서

나를 위해 반드시 사랑해야 할 것과

끊기 힘드나 반드시 끊어야 하는 나는 소모시킬 뿐인 연민을

구별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구별하였을 때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을 주소서

타인 또한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함을 알고 있나이다

내 영혼이 심하게 찢겨졌을 때 그 공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고 있나이다

타인에게 아픔을 줄지언정 내 자신에게 그 공포를 주어서는 안 됨을 알고 있나이다


진실한 열기로 자연스럽게 타인과 관계 맺음을 가르쳐주시고

다시는 사랑이라는 착각으로 시작하여 쉽게 허물어져내리는 환상을

제게 보여주지 마소서

다시는 제가 누군가에게 아픔을 주지 않게 하소서 


「소원」 부분 



파이9)   



김건영 씨의 신작 시집 『파이』는 읽는 재미가 있다. 재미있는 시집을 접하기가 쉽지 않은데, 건영 씨의 시집은 읽는 즐거움이 있다. 이 즐거움은 연민이나 분노에서 시작되는 즐거움이 아니라, 즐거움 그 자체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즐거움은 “슬픔이 없는 농담”(「음펨바 효과」)이 싫다는 시인의 철학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엿(좆) 같은 세상을 여유 있게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시인의 태도에서 출발한 것일 수도 있다. 병들지 않았지만 병들 수밖에 없는 이곳의 삶을 그가 웃음으로 승화시켰으니, 『파이』를 달달한 우유와 함께 먹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슬픔이 슬프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웃음의 목덜미에 붙은 슬픔이 진격의 거인을 닮았다. 벽을 과감히 무너트린다. 여러 편의 시에서 ‘신’이 자주 언급되는데, 이로움을 유지하고 소원을 들어주는 신의 속성을 감안할 때, 시인의 삶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 같다. 진격의 거인이 점점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건영 씨는 자신 스스로를 질병에 걸렸다고 진단한다. 이 병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시인으로 생을 이어가는 동안 죽을 때까지 병을 달고 살아야 한다.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질병을 돌볼 순 있겠지만, 병은 그의 곁을 종종걸음으로 쫓아다닐 것이다. 


그는 평생 질병으로 아파할 것이다. 하지만 이 질병은 질병이 아니다. 죽지 않고 좀비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와 당신‘만’이 느낄 수 있는 통증이다. 우리는 물속에서 호흡할 수 있는 아가미를 가진 존재다. 이 병은 자랑해도 부끄럽지 않다. 흥청망청 뿌려대도 아깝지 않다. 미친 듯이 소리 질러도 추하지 않다. 


시인은 자신의 20대와 30대를 『파이』에 쏟아부었다. 이 시집을 작은 책상에 앉아 짧은 시간에 소화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여기서는 ‘병’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시를 논할 뿐이다. 분명히 누군가가 빈 여백을 채우고 메우고 더할 것이다. 



어찌하여 나는 병을 앓는가 끓어오르는 이러한 기포들을 품었는가 집이 없다는 건 그런 거겠지 지붕이 없다는 건 그런 거겠지 


어둠은 빛을 피해 부글거리고

귓가에 속삭였던 전설적인 거짓말들 별자리들

김빠진 상상력을 요구하는 선분들

변하지 않겠다는 말이 목구멍으로부터 공기 중으로 떠난다


밝을 거라는 말을 믿느냐 시원을 믿느냐 공평한 교환을 믿느냐 


사람들은 옷을 입고 향수를 바른다

몸속에서 넘칠 것 같은 검은 물을 참는 

갑각들 게고둥들 

투쟁을 투정으로 치부하고서

가난을 무능으로 몰아세우고서

허공을 잡아 집을 짓고 공기를 가두어 판다 


―몸에 물이 많아 미안해

기달 든 사람들은 

더욱더 딱딱한 거짓말들을 되뇐다;

정의는 승리한다

사랑은 아름답다

신은 존재한다

차라리 


다음 세상엔 덩굴로 태어나

모든 집을 넘어뜨리겠다

하늘과 바다의 틈을 무너뜨리겠다

공기에 물을 눌러 담고 물에 공기를 실어서 

날개와 아가미를 달고

한밤중의 포말로 살아지고 말겠다


「착향탄산음료」 전문 



살기 위해 투쟁을 하면 투정으로 치부되고, 가난하면 무능하다고 손가락질받는 이곳은 어떤 곳일까. 끓어오르는 기포를 억지로 눌러 담은 싸구려 음료수처럼 화자는 원망과 분노를 누르고 산다. ‘―믿느냐’고 묻는 장면에서는 짓눌러진 기포가 조금씩 새어 나오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곧바로 다시 쭈그러든다.  

화자는 낭만적인 언어와 몸짓을 쏟아내는 사람들에게 냉소적이다. 신이 존재한다거나 정의가 승리한다거나 사랑이 아름답다는 교과서적인 말을 시인은 믿지 않는다. 이곳의 현실은 순진한 교과서와는 차원이 다르다. 시인에겐 어떠한 탈출구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이번 생에 희망을 걸기보다는 다음 생을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억눌러진 기포가 마지막 행에서 터진다는 점이다. 시인은 오랜 시간 눌러왔던 감정을 더 이상 누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 의지는 포말로 사라지는 죽음과 함께 간다는 점에서 세다.


몽상을 한다. 


기표와 기의를 자유롭게 변형하며 재현해왔던 건영 씨의 두 번째 작업은 이 감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시인은 이 공터에서 『파이』를 죽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건축물을 다시 쌓아 올려야만 한다. 웃기고 슬프고 ‘센’ 다음 시집을 기다리겠다. 



가을 


누구나 아픈 몸을 자랑하지만, 정말로 아픈 사람은 드문 것 같다. 


누구나 시인임을 자랑하지만, 진짜 시인은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시인은 넘치지만 진정한 시인은 찾기 힘들다. 


너무나 아파서 작은 의자에 홀로 앉아 침묵을 지키는 한 시인을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아픔이 당신에게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힘겹게 슬픔을 삭인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만의 슬픔을 돌보는 것은 아니다. 당신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줄 안다. 아픈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나’를 넘어 ‘당신’의 슬픔을 헤아릴 수 있는 자다. 




1) 이  글의 제목은 윤동주 시인의 시 「병원」에서 영감을 받아 빌려오게 되었다. 그는 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파할 수밖에 없는 내면 상태를 그렸다. 이러한 아픔은 2019년 지금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의 상처와 우리의 상처를 기억하기 위해 윤동주 시인의 시 「병원」 전문을 인용하기로 한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인용한 책에 적힌 한자는 한글로 바꾸었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음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자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윤동주, 「병원」, 『육필원고 대조 윤동주 전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최동호 엮음, 서정시학, 2010, 49쪽.)

2)  이대미, 『비우』, 미메시스, 2016, 182~185쪽. 

3)  위의 책, 197쪽. 

4) 손미,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민음사, 2019.

5) 이에 해당되는 작품은 「물의 이름」, 「아무 날」, 「돌 저글링」, 「찰흙놀이」, 「전구」등이 이에 속한다. 

6) 오상룡, 『텅텅 가벼웠던 어떤 꿈 얘기』, 최측의농간, 2019. 

7) 내가 낡은 것 같다고 말한 이유는 ‘자서’와 「반딧불 이야기」에서 확인되는 ‘―보이네 ―때문이네 ―읽어 주게나 ―말하네 그려 ―싶으이’와 같은 문체 때문이다. 

8) 이에 해당되는 작품은 「내 속에서 걸어나온 요괴」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나-나’를 통해 침묵의 시론을 논한다. 

9) 김건영, 『파이』, 파란,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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