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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Apr 12. 2021

권여선 소설의 「이모」에 대한 단상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성가시고 귀찮다고, 누굴 죽이지 않은 게, 어디냐? 그냥 좀, 지진 거야. 손바닥이라, 금세 아물었지. 그게 나를, 살게 한 거고”(ⓐ:106)




1


끝을 알고 있는데, 의심 없이 끝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안티고네처럼 걸어가고자 하는 길이 낭떠러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하는 당신이 거대한 장벽을 둘러싸고 나를 가로막더라도 벽에 부딪쳐 쓰러지는 사람이 있다. 이 움직임‘들’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 <Arrival>에서 루이스는 이완에게 물었다. “만약, 시작부터 끝까지 당신의 인생을 모두 알게 된다면, 무엇을 바꾸시겠어요?”라고 말이다. 이완의 대답은 모든 욕심을 버리는 듯한 태도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아마도.... 느끼는 걸 더 자주 말하려 하겠죠.”라고 말이다. 이 말은 비극이기도 하고 비극이 아니기도 하다. 예전에 느끼지 못했거나 덜 느낄 수밖에 없었던 ‘그 무엇’을 더 잘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비극이 될 수 없지만, 새롭게 느끼는 감정의 크기만큼 ‘끝’을 경험해야 한다는 점에서 비극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끝’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모두 다르다. 당신의 움직임을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끝’에서 광인은 정상인이 되고, 정상인은 광인이 된다. 수학자는 수학의 원리를 잃어버리고, 이성적이고 냉정한 감정의 소유자는 야수로 변한다. ‘끝’에서는 ‘극’과 ‘극’이 엇갈린다. 라스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Melancholia>는 이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끝’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인간의 민낯을 확인하게 된다.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다면 ‘끝’에 서 있는 그녀(그)의 태도를 확인하면 된다. 우글거리는 좀비들 틈에서 당신의 손을 놓는 자와, 당신의 손을 잡는 자는 이때 구분된다. 좀비들로 가득 찬 기차 안에서 그(그녀)의 얼굴 표정을 떠올리면 된다.


숨이 막히는 기차 안에서 좀비들이 달려온다. 이 좀비들을 막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없다. 몸이 움직인다. 싸워보는 거다. 몸이 움직이는 데로 주먹을 휘두르는 거다. 팔목에 여덟 번 붕대를 감고, 손가락에 두 번 붕대를 감아보는 거다. 내가 좀비가 되어 너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망설임 없이 싸워보는 거다. 울퉁불퉁한 좀비의 얼굴에 코너 맥그리거의 어퍼컷을 날려보는 거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낭만적인 ‘좀비’ 이야기가 아니다. 차라리 ‘좀비’가 꿈틀대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지만, 그래서 마음껏 싸워볼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좀비가 사는 세상보다 더 절박하고 더 잔혹한 괴기스러운 영화와 닮았다. 



2  







엄마는 지독하게 동생을 감쌌다. 동생의 실수를 실수로 생각하지 않았고, 동생의 잘못된 행위를 잘못된 것으로 믿지 않았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동생만을 생각했고, 동생만을 믿었다. ‘공평’ 하지 못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 홀로 가장이 되어 온갖 희생을 버텨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노력과 희생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엄마는 동생에게 눈이 멀었다. 그녀가 죽음을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동생의 도박 빚을 갚기 위해 그녀의 유산을 탐냈다. 엄마는 오이디푸스처럼 멀쩡한 자신의 두 눈을 찌르지 않으면 안 된다.  


권여선의 소설 「이모」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공평하고 정직”(ⓐ:86)한 것을 좋아한다. 공평하고 정직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공평하고 정직하지 못했던 ‘그 무엇’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공평하고 정직한 것을 선호한다. 


공평하지 못한 것이 무더위처럼 지속될 때, 공평하지 못한 흔적들은 주체에게 공평하지 못한 이유를 천천히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공평하지 못한 행위가 “피붙이”(ⓐ:86) 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공평하고 정직해지기”(ⓐ:86) 어렵다. 앞서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딜레마 위에 주인공은 서 있다. 

이 행위는 어쩌면 ‘피붙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 때인지도 모른다. 엄마는 동생에게 눈이 멀었고, 그녀 역시 동생을 위해 더러운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탯줄’에 면도날을 들이댄다. 그때 나이가 “쉰살”이다. 그녀는 50년 동안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어쨌든 그런 부모 밑에서 맏딸로 태어난 그녀는 대학 1학년 여름에 아버지가 술에 취해 넘어져 객사하는 바람에 가장 역할을 떠맡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기업 홍보실에 입사해 쉰다섯살에 홀연 사라지기까지 평생 결혼하지 않고 직장생활을 하며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리고 2년여간 잠적하여 혼자 살았고, 췌장암에 걸려 석달간 투병하다 죽었다. 이것이 남자 같은 이름을 가진 윤경호, 그녀의 삶이다. 


물론 이모의 삶에도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녀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남편과 시어머니로부터 조각조각 들은 얘기를 종합하면, 그녀는 대기업에 입사해서 4, 5년 동안은 생활비와 동생들의 학비를 댔다. 동생들이 대학 공부를 마친 후에는 금전적인 지원을 중단했다. 그러나 남동생이 사업을 하다 부도를 내는 바람에, 우리 시어머니는 그게 결코 부도가 아니라 도박빚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는데, 아무튼 그 빛 때문에 남동생이 감옥에 갈 판국이 되자, 그녀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과 회사를 퇴직하면서 받은 퇴직금을 모두 남동생의 빛 청산에 쏟아부었다. 그후로는 몇년마다 자리를 옮기면서 이런저런 출판사에 근무했다. 그러다 그녀의 어머니, 그러니까 내 시외할머니가 그녀 몰래 서류를 꾸며 남동생의 보증을 서도록 해놓은 바람에 그 빚에 휘말려 서른아홉살에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빚을 다 갚는 데 10년 가까이 걸렸다. 신용을 회복하자마자 그녀는 아동물 출판사에 취직했는데 그때 이미 쉰살에 가까웠다. 그때부터 그녀는 누구에게도 돈 한푼 내놓지 않았다.(ⓐ:87~88) 


이러한 인물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워야 하는가. 탯줄에 얽매인 이모의 운명 앞에서 어떤 몸짓을 흔들어야 하는가. 내 운명과 내 가족의 운명을 생각해야 하는가. 눈이 멀어버린 나와 당신의 모습을 떠올려야 하는가. 


옆에 있던 누나에게 이 소설을 읽어 볼 것을 권유하고, 이 소설의 내용을 설명해준다. 인상을 찌푸린다. 불편하다. 요즘 세상에 ‘이모’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소설은 소설이다. 낡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이모’는 있다. 우리 곁에 있는 이모‘들’은 부끄러워서, 창피해서 자신의 처지를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이러한 삶을 오랜 시간 버텨왔기 때문에 다른 삶을 꿈꿔 볼 수 있는 여유조차 주어진 적이 없는지 모른다. 이모가 아니라면 광장에서 땡볕을 버티는 우리의 ‘엄마-아빠’ 일 수 있고, 돈을 벌기 위해 꽉 찬 지하철을 힘겹게 통과하는 ‘아빠-엄마’ 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탯줄’ 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탯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론 이것이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죽음’과 마주하거나, ‘죽음’의 시간을 통과할 때가 바로 그때다. 


‘죽음’의 그림자는 언제나 좋은 선생님이니까. 



3


그렇다면 그녀가 죽음의 ‘끝’에서 행위 한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끝에서 행위 한 것은 자신만의 시간을 살아보는 거다.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해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살아보는 것이다. 조용한 아파트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작은 도서관에서 밤늦도록 천천히 책장을 넘기는 것이다. 하지만 오염된 세상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기란 쉽지 않다. 그녀는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며 싸운다. 


그녀는 예전 일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혹독하게 걸어온 자신의 길에 ‘만약’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과거를 살짝 비튼다. 이 수식어를 통해, 억눌렸던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억눌렸던 감정을 밖으로 내뱉은 행위가 치유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혹독하게 자신을 대했던 스스로를 달랜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변형될 수밖에 없는 기억들을 끄집어내 과거의 ‘나’와 대면한다.


‘죽음’의 끝에 그녀가 한 행위들은 어쩌면 평범한 것일 수 있다. 지난날을 멈추는 것 말이다. 누군가는 그녀를 시대의 희생자라 부를 수도 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가장의 역할을 떠맡아야 했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도 못한 어리석은 한 여인의 삶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흐름을 꼭 여성으로 대치할 필요는 없다. “한국 사회는 지금 너 나 할 것 없이 김지영을 외친다”(ⓑ:40)는 점에서 ‘김지영’의 문법을 피해갈 수 없겠지만, 이 흐름을  김지영의 문법으로‘만’ 읽을 순 없다. 부재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고, 누군가의 삶을 대신 짊어져야 하는 것은 ‘너’와 ‘나’ 모두에게 해당되는 평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소설은 보편성을 획득해 모두를 껴안는다. 


강도의 크기는 각자 다르겠지만, ‘탯줄’에 얽힌 우리들의 민낯을 이 소설은 냉정하게 보여준다. 탯줄에 얽힌 다양한 사연들을 ‘상상’하게 한다. 이것은 내 이야기다. 우리의‘들’의 이야기다. 


※ 이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소설은 2016년에 출판된 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에 수록된 「이모」이다. 이 소설을 인용할 때는 따로 각주를 표시하지 않고, 괄호를 통해 ⓐ 표시와 소설집 페이지를 적는다. 2018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간행된 『문학과 사회 하이픈』에 수록된 허윤의 「로맨스 대신 페미니즘을!- ‘김지영 현상’과 ‘읽는 여성’의 욕망」을 인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표시와 함께 해당 페이지를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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