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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Apr 17. 2021

싸움의 벽-편견

웅크림 


형 씁쓸하지만 오늘은 좋지 않은 소식을 들려주어야 할 것 같아요.  


한 달 전 T 시인의 시집 해설을 쓰게 되었는데 시집 해설이 비틀어졌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연락을 받은 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반론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시집 해설을 멈추게 되었어요.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편집장님에게 T 시인의 전화번호를 물었고, 바로 전화 걸지 않을 수 없었어요. T 시인에게 무슨 이유로 내 시집 해설을 거부했느냐고 물었답니다. 거절당한 이유를 들어야만 의자에 앉아 노동한 대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자존심 문제였기 때문에 원고료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내가 가진 지푸라기를 꺾이고 쉽지 않았다는 마음이 적절할 것 같아요.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볼 때, 창피함과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 같아요.  그래서 내 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라며 스스로에게 물음의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고 다시 시인에 대해 생각하고 글 쓰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생각해 보면 이러한 면박이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스스로를 냉정하게 되돌아볼 수 있으니 말이에요. 


시인에 대해 생각해요. 시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어요. 시 쓰는 행위의 진정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내 글이 아닌 누군가의 글을 읽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요. 읽는 행위는 어느 장르건 간에 누군가의 절박한 몸짓을 만져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 삶과 다른 누군가의 삶을 읽어 보는 것이겠지요. 나와는 전혀 다른 누군가의 삶을 온전히 느끼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몽상을 하다가 T 시인이 펴낸 모든 글을 읽지 않고 시집 한 권만을 읽고 해설을 쓴 불성실한 내 자신과 마주하게 되었어요. 성실하지 못하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겠지요. 남녀 간에도 의리가 있어야 하듯이 글 쓰는데도 의리가 있어야 해요. 글 쓰는 데 있어서 의리는 저자가 쓴 모든 글을 읽고 그의 곁을 사뿐히 걸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지 못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웅크릴 수밖에 없고 스스로를 자학할 수밖에 없어요. 오늘 일에 대한 원인은 밖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던 것이에요. 패배를 당하더라도 비굴하게 당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늘은 어깨를 펴지도 못하고 TKO를 당한 겁니다. 



누군가의 삶을 잘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있어요.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내가 가진 편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편견을 가졌던 탓에 대상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밑바닥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내 불성실함도 한몫했겠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가진 무의식적인 오만함을 문제 삼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프레데릭 마이어가 쓴 『편견』을 펼쳐 보게 되었고,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진 ‘벽’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인류의 재앙’이라는 부재가 붙은 이 책은 주로 인종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하지만 ‘인종’ 문제가 단순히 인종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 것 같아요. 위쪽과 아래쪽 사람들, 남성과 여성,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나’와 ‘당신’으로 확장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밑줄 그어가면서 꼼꼼히 읽었어요. 그런데 막상 책을 덮고 나니 생각나는 문장이 별로 없어요. 그 이유는 아무래도 편견을 깰 수 있는 방법이 ‘아는 것’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몰라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적혀 있는 이 책은 나에게 알고 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있는 피부가 더 값지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어요. 


그래도 마지막까지 내 몸속에 남아 있는 흔적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아요. “편견은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하여금 비이성적”(ⓐ: 17)인 사고를 하게 한다는 것과, “남의 얘기를 더 진지하게 듣고, 더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더 신중”(ⓐ: 154) 해야만 편견을 무너트릴 수 있다는 것이에요.


내가 아닌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겠지만, 비이성적인 감정 자체가 때론 폭력보다 더 큰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이 섬뜩하게 다가왔어요. 이 뜨거운 감정은 우리를 죽이고, 당신을 외면하고, 동료들을 짓밟고, 끝내는 ‘나’를 죽이는지도 몰라요. 이 책에 적힌 다양한 논의 중 왜 하필 이 문장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당신의 몸동작을 느끼기 위해서는 정말로 천천히 당신에게 다가가야 할 것 같아요. 시집 해설을 거절당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정말로 천천히 당신에게 걸어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형 투정 부리는 내 모습에 당황해 할 수 있겠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고 여러 가지로 부족한 인간이에요. 이렇게 자책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창피해서 투정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배운 것이 없다고 할 순 없어요. 그러니 힘내야 겠어요.  


당신   


타자를 느끼는 방법에 골머리를 앓다가 며칠 전 본 영화 <The Shape of Water>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 영화를 보고 흥미로웠던 것은 주인공이 괴생명체에게 다가가는 몸동작이에요. 다리를 꼬고 『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을 읽고 있는 스트릭랜드와 다르게 엘라이자는 어떤 방법보다도 다정하게 괴생명체에게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스트릭랜드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방법이 거친 섹스로 비유된다면 엘라이자는 교감을 중요시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녀도 물속의 저것 같은 존재였던 적이 있었다. 남자들은 말 못하는 그녀의 의사도 묻지 않고 제 마음대로 다루었다. 엘라이자는 그들보다 더 친절하고 공정할 자신이 있었다. 그 어떤 남자도 하려고 하지 않았던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었다. 엘라이자는 60센티미터 높이의 가장자리가 허벅지에 닿을 때까지 수조에 다가갔다. 수면은 고요했지만 완벽하게 고요하지는 않았다. 자세히 보면 물이 숨을 쉬는 것처럼 보였다. 엘라이자는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 후 도시락이 담긴 종이봉투를 수조 가장자리에 올려놓았다. 종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삽으로 흙을 퍼 올리는 것만큼 컸다. 수면의 반응을 살폈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엘라이자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얼굴을 찡그리며 봉투에 손을 넣었다. 역시 조용했다. 그녀는 삶은 달걀을 꺼내자 부드러운 조명 아래에서 달걀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자일스 몫인 세 개의 달걀 외에 하나를 더 삶았다. 그 달걀을 까기 시작하자 손가락이 떨렸다. 그렇게 못생기게 깐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흰자 부스러기가 수조 가장자리에 떨어졌고 마침내 껍질이 다 벗겨졌다. 한 알의 달걀보다 완벽하고 자연적인 것이 있을까? 엘라이자는 마법의 물건이라도 되는 듯 달걀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드디어 물이 반응했다. (ⓑ: 132)   





오늘은 조심스럽게 달걀을 건네고, 내일은 달걀과 음악을, 그다음 날은 달걀과 음악과 샌드위치를, 마지막 날에는 달걀과 음악과 샌드위치를 건네며 함께 춤출 것을 수줍게 권유하고 있었어요. 이러한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간다면 그가 어떤 언어를 쓰던 무엇이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장면을 떠올리며 내 해설을 거절한 T 시인과 몇 주 전에 다투었던 Y 시인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들이 했던 말이 나를 멈추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소중한 것을 가르쳐 주었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형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해온 작업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앞으로도 부족한 것은 더 많이 배울 것이고 글 쓰는 것을 오늘처럼 거절당한다 할지라도 눈치 보며 주례사 비평은 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우리 같은 종족은 눈치 보는 순간 죽는다는 것을 형이 가르쳐 주었잖아요.    

형 지금 나는 병실에 앉아 있어요. 아버지께서 소변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아버지 곁에서 오랜만에 아들 노릇을 하고 있어요. 집안일을 하지 않던 아버지가 수술 전날 설거지를 하고 방 청소를 하는 것을 보니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아요. 


아버지는 성경책을 읽고 나는 우울한 마음에 기다란 보호석 의자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어요. 이쪽과 저쪽 집안 사정이 들리는 4인실 병원 귀퉁이에 앉아 무작정 이렇게 흘려 쓰고 있어요. 병원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나와 당신을 평등하게 만드는 장소 같기도 해요. 형 나의 투덜거림을 들어주어서 고마워요. 봄이 오기 전에 꼭 한 번 같이 걷기로 해요.




※ 


-여기서 인용한 책은 프레데릭 마이어가 쓴 『편견』과 기예르모 델 토로와 대니얼 크라우스가 쓴 소설 『The Shape of water』이다. 편의상 전자를 ⓐ로, 후자를 ⓑ로 표시하고, 옆에 페이지를 적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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