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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Aug 11. 2021

작고, 어두운곳을 향해

황규관  시인의 시집 <호랑나비>에 대한 단상

작고어두운 곳을 향해





지금의 상황은 과학기술과 간통을 하면 존재 자체가 바스라집니다. 저는 큰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해결책은 있느냐? 그것은 제게 주어진 역할이 아닌 듯합니다. ‘응시’라고 한다면 괴물로 다가오는 과학기술을 응시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계획이 아닙니다. 제 영혼이 그것을 점점 못 견뎌하고 있습니다. 살려면 싸워야지요. 그리고 살아 있다면 시를 계속 쓰고 있을 겁니다.1) 


황규관2) 시인에게 영혼은 매우 중요하다. 그에게 영혼은 강직하고 정의로운 것과 관련이 있다. 이 마음은 그를 서 있게 하고 살아 있게 만든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영혼의 모습은 무엇일까. 그는 신체의 역량을 퇴화시키는 기술 자본주의 구조를 비판하면서 “정신과 영혼을”3) 돌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발전된 문명은 영혼을 자유롭지 못하게 막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붙이고 있는 이곳이 만족스럽지 않다. 살갗에 닿는 온기를 중요시하기보다는 교환 가능한 것으로 모든 것을 환원해 버리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인은 포스트 휴먼(posthuman) 시대의 한복판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뿐이다. 새롭게 거듭나는 기술 문명 발전이 부정될 요소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인간이 품고 있던 흔적을 통해 이곳의 틈을 논하고자 한다.


이러한 모습은 시인의 시창작과도 밀접하게 만난다. 건강한 정신과 영혼의 조합으로 시가 만들어진다는 태도가 그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영혼이 탁하면 시도 탁한 형태를 닮아간다. 반대로 영혼이 맑고 투명하면 시도 맑고 투명한 색을 닮는다. 그는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영혼을 훈련한다. 정신과 영혼은 살갗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니 시적 형식은 삶과 동의어다. 정직한 몸의 시학이다.





그러나 이 바람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시인의 영혼은 현재 생기를 찾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가 닮고 싶은 영혼의 모습은 무엇일까. “거대한 영혼”(「물결의 정체」)은 그가 닮고 싶어 하는 대상인 반면 “굳어버린 영혼”(「대추나무」)은 폐기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이로운 영혼은 화자를 흔들고, 굳어진 몸을 “삐거덕”(「호랑나비」) 흔들어 정신 차리게 한다. 화자는 그때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은 손을 움켜쥔다. 다시, 시작이다. 자신을 낡지 않게 만드는 이러한 반복이 그의 시 쓰기이다. 그러나 황규관 시인은 거대한 영혼만을 쫓지 않는다. 그가 닮고 싶은 영혼은 오히려 낮고 겸손한 위치에 놓여 있다. “세상이 너무 환해”(「반달」)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반달의 흔적과 유사하다. 일상의 분주함으로 인해 닿지 못했던 살결이다. 시인은 소소하고 정다운 영혼에 희망을 건다.


하지만 지금 현재 시인의 영혼은 흐려지고 있다. 시인이 사는 도시는 밝은 불빛으로 인해 반달 찾기가 쉽지 않다. 힘들 때마다 몸을 일으켜 주던 존재를 찾기 힘드니, 기댈 곳이 마땅치 않다. 원인은 외부에만 있지 않다. 항상 ‘나’를 긴장 위에 올려놓지 못한 시인 본인의 책임도 있다. 이 지점에서 물리적인 시간을 생각하게 된다. 시인의 몸은 예전같이 움직이지 못한다. 어쩌면 이러한 슬픔이 영혼의 모습을 뒤로 물러나게 한 것일 수 있다. 그가 꽃을 보며 “영혼”(「꽃밖에 없네」)의 부재를 떠올리고, 곡괭이를 만지며 온전한 “영혼”(「곡괭이 한 자루와 당나귀 한 마리」)의 흔적을 더듬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그래서 일부의 독자들은 시인의 몸이 위태롭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시기상조다. 문턱에 서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낡은 신체를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갱신해 새로운 길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벽에 부딪혀 발을 동동 굴리더라도 손톱이 뭉개질 정도로 벽과 다투는 것이 시인의 길이다. 그가 품고 있던 “영혼”(「다시」)은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간다. “시간을 갈아탄 영혼”(「겨울 골짜기」)의 발자국은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끝에서 고독하게 주변을 배회하며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 너무 일찍 끝에 도착한 탓에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다시, 힘을 낸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쳐다보면서 앞으로 걸어가게 될 길을 응시한다. 이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길’과 관련된 시편들은 이 지점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지나온 길”(「나의 가장 외롭게 높은 곳」)은 무엇이고, 새롭게 걸어가게 될 길은 무엇일까.


‘길’과 관련 있는 두 편의 시가 인상적이다. 그는 이 시에서 앞으로 걸어가게 될 ‘길’에 대해 상세히 적고 있다. 독자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 걸어가고자 했던 길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은 말한다. “새로 가는 길은/ 항상 처음 가는 길”이라고. “새로 가는 길은 내게/ 다른 어둠을 안겨주려”(「동트는 쪽으로」) 한다고. “아직 가지 않은 길은 언제나/ 안 보이는 길”이라고. “하루 종일 괭이질에 몸살이/ 온몸을 기어 다니는 길”(「아직 가지 않은 길」)이라고. 이런 길의 흔적을 고려했을 때, 그는 잠시 몸을 움츠리고 있을 뿐, 언젠가는 반듯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신감 있었던 과거의 젊은 시절 모습 그대로 당당하게 다시, 시를 쓸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시인의 이러한 태도는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을 가르쳐준다. 끝에 서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의지가 더 의미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걸어가고 있는 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는 태도일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영혼은 여전히 건강하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게 될까. 내 안에 있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 중 어떤 것을 선택하게 될지 고민하게 된다. 독자로서 이 지점이 가장 흥미롭다. 결론을 이야기하자.


시인은 기로(岐路)에서 ‘유년’의 흔적을 선택한다. 그는 예전의 시간으로 돌아가 빛났던 ‘순간’을 움켜잡고 ‘이곳’에서 재정비한다. 이 시집에 수록된 「낮달」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낮달」에 그려진 풍경을 옮겨와 보자. 집 앞 대추나무, 어머니의 한숨, 어제 불던 돌풍, 숲속에서 우연히 만난 샘물, 홀로 고독하게 서 있는 돌멩이, 강물에 와 닿은 햇볕, 강바닥에 묻은 모래알. 홀로 외롭게 떠 있는 달의 모습이 그것이다. 시인은 유년에 느꼈던 이 감정을 다시 회복하고 싶어 한다. 이 노력이 그를 이곳에서 버틸 수 있게 도와준다.


하지만 이 방법에 무조건 찬사를 보낼 수 없다. 유년의 흔적은 지금, 여기에서 움켜잡을 수 없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과거로 돌아가 위험을 피하려는 모습으로도 읽힌다. 이러한 모습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겪을 수밖에 없는 시적 주체의 불안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불안은 환상을 만들고 왜곡된 의도를 재생산한다. 이 방법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는 듯도하다. 황규관 시인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시인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이 시집에서 뚝심이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벼랑의 시간」과 「숲을 놓아주자」, 「그림자」 등의 작품에서 문명 비판 시를 확인할 수 있다. “이제는 숲을 인간에게서 놓아주자”라는 목소리나, 타닥타닥 걸어가 나뭇가지를 자르는 공무원들을 향해 “자르지 마라”라고 항의하는 목소리는, 지구를 못살게 구는 당대의 문명에 저항하는 몸짓이니, 그의 영혼은 여전히 생기 있다고 봐야 한다.


시인의 양심은 여전히 살아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몽상을 할 수 있다. 그는 이 시집에서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 물었으나, 무의식적으로는 이미 대답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문명과의 싸움이 그것이다. 가능성은 외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시인은 이미 가슴 안에 품고 있었다.


“어머니가 알아”(「냇물의 목소리」)들을 수 있는 뼈 있는 언어를 통해 그는 다시 도약을 준비한다. 시인은 “내가 가난이 되고 고독이 되고/ 빗방울”(「시를 써요」)이 되더라도 시 쓰는 행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심장에 내려”(「봄눈」) 앉는 언어를 찾아 주변을, 술집을, 이웃의 발자취를, 씩씩하게 돌아다닐 것이다.


우리는 그가 걸어가는 길을 자연스럽게 응원하게 된다. 한 시인의 삶은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그에게 보내는 응원은 우리에게 보내는 응원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다시, 일어나자. “좀 더 작아”지고 “골짜기처럼 더 어두워”(「화장」)지자!




*


1) 이 글은 황규관 시인이 어느 웹진 잡지에서 인터뷰한 글을 빌려온 것이다. 인터뷰 글은 총 5회에 걸쳐 게재되었다. 다섯 번째 글에서 그의 목소리를 빌려왔다.

(황규관, 「때로는 아픈게 큰 싸움이 된다.(5))」, 웹진 <문화 다>, 2020년 2월 5일~9일.)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power_interview&ps_boid=60

2) 황규관 시인은 오랜 시간 꾸준히 시를 썼다. 그가 출판한 시집은 ① 『철산동 우체국』, 내일을 여는 책, 1998; ② 『물은 제 길을 간다』, 갈무리, 2000; ③ 『패배는 나의 힘』, 창작과 비평사, 2007; ④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실천문학, 2011; ⑤ 『정오가 온다』, 도서출판 삶창, 2015; ⑥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문학동네, 2019 이다. 아시아 출판사에서 출판된 이 시집은 공식적으로 그의 일곱 번째 시집이다.

3) 산문 「시 스스로 ‘무엇’이 되는 일」에서 빌려 온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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