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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Aug 23. 2021

홍지호 시인의 첫 시집에 대한 단상

쓸쓸한 뒷모습을 사랑하지 못하고 느낌만을 사랑했던 어리석은 이야기

쓸쓸한 뒷모습을 사랑하지 못하고 느낌만을 사랑했던 어리석은 이야기1)











천지 창조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였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하느님께서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르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땅은 푸른 싹을 돋아나게 하였다.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사흗날이 지났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빛물체들이 생겨, 낮과 밤을 가르고, 표징과 절기, 날과 해를 나타내어라.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서 땅을 비추는 빛물체들이 되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큰 빛물체 두 개를 만드시어, 그 가운데에서 큰 빛물체는 낮을 다스리고 작은 빛물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이것들을 하늘 궁창에 두시어 땅을 비추게 하시고, 낮과 밤을 다스리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나흗날이 지났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에는 생물이 우글거리고, 새들은 땅 위 하늘 궁창 아래를 날아다녀라.”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큰 용들과 물에서 우글거리며 움직이는 온갖 생물들을 제 종류대로, 또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제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 이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번식하고 번성하여 바닷물을 가득 채워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닷샛날이 지났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제 종류대로, 곧 집짐승과 기어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집짐승을 제 종류대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제 종류대로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하느님께 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이 창조될 때 그 생성이 이리하였다.2)




홍지호 시인은 무슨 이유로 자신의 작업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3)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시집 속에 숨겨진 슬픔에 대해 적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그는 다른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손쉽게 닿을 수 없는 것에 매달렸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작품을 흘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욱더 슬픔에 대해 적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 같은 종족은 넘을 수 없는 벽에 마주하는 것이 일상이니까. 일상이 특별할 것은 없으니까. 더욱이 슬픔을 노래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치유되는 과정이니 오히려 그는 건강하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쓸 수 없는 몸이며, 실패할 수 없는 몸이다.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눈물만을 쏟아내는 말 없음이다. 하지만 시인은 행복하게도 실패를 할 수 있고 쓸 수도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의 슬픔에 대해 적는 것보다 그가 걸어간 여정을 쫓아가는 것이 더 흥미롭다. 그 과정에서 그만의 인상이 그려지리라. 그렇다면 그가 매달린 대상은 무엇일까.


시집에서 신()과 부딪친 것이 이색적이다. 많은 시인이 신과 대결했었기에 이 과정이 특별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평론가로서 신과 대결했던 작품을 끌어모아 차이를 정리하고 그 간격을 좁혀 제법 긴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것은 흥미롭다. 홍지호의 첫 시집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해줄 것이다. 언젠가 이 쓸모에 대해 생각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아니다.

그렇다. 그는 신에게 집중하고 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신의 가장 큰 능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창조다. 없는 것을 새롭게 만드는 능력이다. 시인은 분명히 이 지점을 붙잡고 고민했을 것이다. 이러한 고민이 목차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인이 했던 방식과 동일하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천지 창조의 순서대로 시인은 자신의 작업을 꾸몄다. 물론 이 의도는 진지하지 않다. 유쾌하게 불규칙하게 소화했다.


그의 첫 시집 첫 번째 작품이 흥미롭다. 그는 이 시에서 첫 키스. 초범. 데뷔작. 미숙함. 이해. 형량. 등의 개념을 통해 ‘첫’에 숨겨진 너그러움에 관해 이야기한다. 누구나 “봐줄 수도 있을” 것 같은 ‘첫’에 대한 맥락이 그것이다. 이 ‘첫’의 손짓은 자연스럽게 ‘신’에게 바통이 넘겨진다. 생활에서의 ‘첫’이 신의 창조 능력에서도 반영되는 것이다. 앞의 문장을 신에게 그대로 갚아준다면 다음과 같은 명제가 완성된다. ‘신’ 역시 ‘첫’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실수를 범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고로 신(시인)은 특별하지 않다. 이러한 발언은 ‘나’의 탄생으로 변주될 뿐만 아니라, 완전하지 않다는 점에서 기도와 묶인다.


의 탄생은 불안을 품은 시인의 탄생이다. 그래서 이 불안은 시집에서 시작詩作의 모습으로 다양하게 펼쳐진다. 홍지호의 시집을 읽은 독자들은 ‘과잉’의 방식으로 이 지점과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런 유쾌함은 문장이 문장을 낳는 방식으로 번지기도 한다. 무의식적인 창조가 창조가 되는 리듬의 방식이다. 문학 용어로 환유가 아닌 환유의 속도다. 시인은 쓰는 과정을 중요시했다.


일부분만 적어보자. “같은 문장에서 다른 문장을 발견”(「존」) 했던 방식으로 자신의 시가 그렇게 되기를 바랐던 것. 설경(雪景)처럼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자” 했던 일. 동일한 방식으로 “번쩍거리는 것이 번개가 우는 방식”(「번개가 천둥을 기다리는 시간 혹은 천둥이 번개를」)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이 형식을 닮고자 했던 일. “오늘까지만 울고/ 어디에나 있으나 보이지 않는 당신들의 이야기를/ 폭로”(「네온」)하는 일에 관심은 두고자 한 것. “나는 나의 것이”(「정원에서」) 아니라며 자신을 갱신하고자 했던 일. “사건을 믿는다는 것”(「어둠과 정원에서」)이 무엇인지에 대해 촉각을 세운 일.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다는 너에게/ 내가 보았던 것을 보이는 것처럼 말해주는 것”이 쓸모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일 등은 창작자로서의 고통과 노력을 보여준다. 결국 이러한 과정은 “어리석은 이야기”(「내 손목에」)로 명명되지만 어리석은 이야기는 아니다. 아쉽고 부족한 이야기다.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바람이다.


그만큼 시인은 쓰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골몰하고 있다. 이러한 살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작업은 온전히 시작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첫 시집에 대한 여운을 뒤로한 채, 온전히 펼쳐지지 못했다고 판단했기에 그의 두 번째 시집과 세 번째 시집을 기다리게 된다는 말이다. 앞에서 논한 시 쓰기의 탐구가 시집에서 빠지고 새로운 내용의 작품들로 채워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이 시집이 가보지 못한 미래의 일이지만 그 순간을 상상하게 된다. 더불어 신에게 향한다는 것은 기도와 만난다신에 대한 불만은 목적이 담긴 기도와 만나고 기도의 거부는 신의 결핍을 논하는 데까지 흘러간다. 다시 말해, 현실의 틈이 신을 겨냥하고 현실에서의 속박이 신을 밀어낸다. 시인은 ‘의심’을 가슴에 품고 신을 향해 눈을 치켜뜬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지만, 답은 자명하다. 삶이다. 지독한 생(生)이다. 몰탈로 비가 새는 천장을 바른 후, 불안해하며 “한참 동안이나/ 자는 척을 해야”(「몰탈」)만 했던 시절.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가 기도할 때 할머니 할머니”(「거목」) 라고 부르지 못했던 이유가 ‘간절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일. “집으로 돌아오면”(「중보」) 할머니를 닮은 아픈 엄마가 두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목격했던 기억 때문인지 모른다. 이런 종교적인 삶이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기도의 흔적을 쫓아가 새로운 기도를 만들고 부수고 만들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기도도 노동도 자유도 삶도 짠한 것은 유전遺傳되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이 시집에서 는 누구일까. ‘나’와 관련이 없는 작품은 없겠지만,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다.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친구’다. “만날 수 없는 친구와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중보」) 했을 정도로 시인에게 친구는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 친구는 절박한 상태에서 내 말을 들어준 가상의 인물일 수도 있다. 가상이든 실제든 현실이든 판타지이든 친구는 화자 곁을 오래도록 함께했다. 따라서 친구는 ‘나’를 대변해 주는 인물이다. ‘나’는 친구 없이 그 무엇도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친구는 누구인가. “친구는 그저께” 죽은 인물로 묘사된다. 이 사건으로 “나는 은유를 잃어버렸던 것 같다”(「화요일ㅡ철거」)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친구는 친구다. 또한 친구는 “귀신을 본다”(「안국역」) 귀신을 본다고 해서 호로horror적인 느낌은 없다. 오히려 귀신을 보는 행위가 정적情迹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귀신을 보는 친구와 보지 못하는 나는 서로 소통하려고 하나, 그것이 잘 안 된다. 실제로도 편하게 만나지 못한다. 이런 안쓰러운 이질감이 나와 친구를 오고 간다. 친구는 또한 시 창작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다. “귀신들이/ 하는 말을 듣고 도와준다고 한 사람은 너였지”(「너무 상투적인 삼청동」)에서 ‘너’는 친구로 몽상해도 좋다. 도움의 측면에서 각별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다음의 구절도 마찬가지다.



친구야 너는 육손이었지

친구들에게

여섯번째 손가락이 있던 자리를 보여줄 때

나는 너의 흉터가 부러웠어 친구들의 눈동자와

여섯번째 상상력과


「토요일」 부분



화자는 손가락이 잘린 친구의 흉터와 친구의 여섯 번째 상상력을 부러워하는데 이 바람은 친구의 역할이 시인에게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나친 몽상일 수 있으나 여기서 ‘친구’는 ‘나’의 분열적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친구’는 시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화자는 누구일까. 화자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두려움 앞에 움츠리는 사람은 아니다. 누군가 화자에게 다가와 “침대 밑을 보지 말라고 더 무서운 것”(「은밀」)이 있다는 말에 화자는 숨지 않는다. 앞선 인용문은 ‘금기’의 차원이 아니다. 두려움을 제공한다. 화자는 이것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 극복이 실패일지라도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것과 품지 않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화자는 이처럼 담담한 사람이다. 화자는 자신을 갱신한 후, 일어서는 사람이다.


물론 이러한 특징은 누구나 품고 있는 보편성이지만 그가 관성을 깨는 순간은 언어와 직접적으로 닿는다.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매달려 있는 것”(「조화」)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고백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가능성은 시인을 부풀게 한다. 시인은 언어를 깨고 마음을 넓힌다. “빨간 불럭”(「산책」)을 밟으며 걷기 좋아하는 화자는 시간을 돌려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미래를 수정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야기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오래된 싸이(PSY)의 노래처럼 ‘어땠을까’이다. 시인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힘 있게 현실을 응시한다. 응시에 대한 답변으로 「포기하고 싶다면」이 답가가 되지 않을까.



옥상에 올라온 참새를 보고 놀라다가 아 너는 새지 너는 날 수가 있지, 라고 중얼거렸다


살아 있다는 것을 잊고

살아 있다


너무 위험하다고 느껴질 때는

나에게 전화해도 된다고 선생님이 말해줄 때

고마웠다


삶은 어디에나 있다


삶은 어디에나


삶은 어디에


삶은 어디


삶은


동생이 비둘기에 대한 단상을 이야기해줄 때

느꼈던 감격이 때때로 그에게 힘이 되기를 기도했다


하나도 안 슬퍼

생각했던 장면에서

울게 되었다


그런 장면은 이제 슬프다 그러나 어떤 장면은 여전히 슬퍼하지 못한다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은

미안한 마음만


이런 삶을 나누고 싶지는 않다

어디에서든 삶은


포기하고 싶다면


나는 너를 잊었다 나는 너를 잊었다

중얼거리다가

잊었다고도 말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포기하고 싶다면」 전문



홍지호 시인의 시집에서 유독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리듬이다. 리듬. 짧은 지면에서 리듬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 참 힘들다. 그런데 정말로 홍지호만의 리듬은 있는 것 같다. 단어의 반복일 수 있고, 시 행의 반복일 수도 있다. 이 반복을 체험하고 나면 중독된다. 반복이 주는 효과가 중독인 것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홍지호의 리듬은 짙고 검은 슬픔을 담고 있다. 그는 오랜 시간 ‘번개’와 같은 ‘마음’을 담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그의 작품 중, 「번개가 천둥을 기다리는 시간 혹은 천둥이 번개를」이라는 작품이 자신의 시적 리듬을 시론적인 맥락에서 표현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시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앞에서도 이 부분이 인용되었지만, 번쩍거리는 빛을 “우는 방식”으로 그려내는 것은 이색적이다.


시각이 청각으로 시각이 마음으로 바뀌는 방식을 실험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실패일까. 성공일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기교가 슬픈 것만을 쫓아가는 것은 아니다. 「도넛의 구멍을 표류하는」 「불면」 등의 작품은 기발하다는 생각이 든다. 재능이다. 그러나 그의 시집에서 진정한 무기는 슬픔이다. 이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슬픔을 동물로 경유해 써 내려간 작품은 주목을 필요로 한다. 최근 동물권이 부상하고 있다. 개와 고양이와 관련해 일군의 시인들은 힘을 합쳐 공동 시집을 내기도 했고, 그래픽 노블 작가 일부는 자신의 반려견을 이야기 소재로 활용한다. 그런데 여기서 진짜와 가짜가 등장한다. 그것은 목적을 품는 것과 목적을 잃은 것의 차이다. 시와 행사 시의 차이다. 목적을 품고 쓴 이야기와 목적을 가슴에 품고 무의식적으로 쓴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홍지호의 동물 관련 시4)는 목적을 지운 상태에서 쓴 것처럼 대상을 촉촉하게 그려내고 있다. 공동 시집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홍지호는 정확하게 그려낸 것 같다. 홍지호의 슬픔에 대해 논한다면 진검승부를 명확하게 논할 수 있는 이 부분을 노래하고 싶다. 이 작업은 후일로 미룬다.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메이저 잡지에서 출판된 시집은 의도적으로 읽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잡지 소속 평론가들이 관례상 비판 없이 호명해 주기 때문이다. 큰 의심 없이 여러 평자에게 주목을 받을 뿐만 아니라, 독자나 예비 문인에게도 주목받는다. 그래서 흥미가 덜 간다. 발굴하는 느낌이 없다. 하지만 홍지호는 이런 의심을 멈추게 한다. 상투적인 말로 끝을 마무리해야겠다. 홍지호 씨의 두 번째 시집을 기다리겠다. 사랑하는 애인과 당신의 시를 읽겠다. 문운을 빈다.■





*


1) 이 제목은 시인의 시집 마지막 작품 「내 손목에」에서 빌려왔다.

2)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성경』,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9, 1~2쪽.

3) 1부 「까마귀」 2부 「존」 「재」 3부 「번개가 천둥을 기다리는 시간 혹은 천둥이 번개를」 4부 「일요일」 「데킬라」 5부 「네온」 「정원에서」 「코카인」 「내 손목에」 등의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4) 「검은 개」 「고향」 「유기」 등의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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