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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Sep 01. 2021

박민규 시인의 신작 시에 대한 단상

I will be back







비 내리는 바다는 자꾸 얼굴을 만든다




오랫동안 나는

철없이 가벼웠던 영혼

떠 있으면서

방에 갇히기를 거부한

한 줌의 먼지

오늘도 먼지처럼

저녁마다 남겨 놓은

맥주 거품과

거품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단조로운 식탁

한켠에

거울에

세 들었던 성에가 쫓겨나고 있다

멀건 죽으로 흘러내리며

거울의 먼지를 씻어낸다, 눈물처럼

결국, 눈물처럼

오늘도

기억해 내지 못한 여인들

하얀 구두는 누구였더라

하얀 발목은 누구였더라

스쳐 지나간

이름 없는 여인들처럼

가장자리부터 떨어지는 이 겨울 나뭇잎을

본다, 신맛의 이불을

자꾸 펼치며

잠을 재촉하는 아내를

본다, 그녀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주말마다 바다 저편에서 몰려오는

납빛 구름을,

신발 끈 조이며

잰걸음으로 탈출을 서두르는 자들의

얼굴을, 어류의 알처럼

산란하는 빛을 가두며

수용소를 짓기 시작한 바다의 얼굴을.





솥단지를 뒤집어 놓은 마을의 노래 7

-송도에서



건축가 김중업이 지어 준 송도의원

이제는 없다

한때 그것은 소라의 귀

한때 그것은 부스러기들을 모아 만든

패각의 침실

조개처럼 이불 밖으로 언 발을 내놓고

불면의 밤을 지나

아침이면,

아침마다,

하얀 서울의 기억을 지우기로 한다

하얀 가운 입고 아내가 병원으로 출근한다

멀리 병원선(船)이 떠 있는 해변에 앉아 병화는 생각한다

홀로 남은 가장

홀로 남은 오늘

또 어디로 가야 하나

떠밀려 온 파도가 고단하게 거품을 게운다

심한 단층의

절벽

야윈 뺨으로 부딪치는

파도처럼

하얀 봉투에 마른기침으로 유서를 적는다

암남동에 공룡 뼈가 묻혀 있다면

그것은 문학

그것은 시

언제나 사람들은 티라노사우르스를 떠올리지만

곰포소그나투스

미크로랍토스

가장 작은 것들의 뼈는 아무도 찾지 않는다

그것은 문학

그것은 시

오래 봉인되어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겠지

남포동으로 가자

술을 마시자

인간의 부채를 걸머진 채 또 하루 인생이 저문다*


                                         * 조병화 「남포동」







솥단지를 뒤집어 놓은 마을의 노래 8

-감천마을에서



급경사의 산비탈을 깎아 만든

수백의 계단들

물동이를 머리에 인 아낙들이 오르내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곳, 저 멀리

횡격막처럼 가로지른 수평선이 펼쳐져 있다

태양의 발목을 싹둑 잘라낸 바다

총칼이 지배한 이곳은 한때의 전장(戰場)

소리 없이 사라진 남편을 기다리다

아낙들은 흑백의 벽화가 되었다

우물가에서 때를 벗겨 외지로 떠나보낸 아이들

어느새 커서

북회귀선의 연어처럼 상처 난 얼굴로 돌아와

모세혈관의 좁은 골목

유년의 집을 찾아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

미로처럼 엉킨 삶은 오히려 바깥이었어

창문의 이끼는 연두 벽으로

시든 화분은 빨강 지붕으로

알록달록 새 옷을 갈아입은 마을

야수파 화가처럼 물감 밟은 고양이들이

윗집에서 아랫집 지붕으로 건너다니는 오후






솥단지를 뒤집어 놓은 마을의 노래 3

-산복도로에서



승객들의 손마다

                      검은 비닐봉지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물방울

비릿한

        바다의 생명들이

죽어

    죽어

       육지 인간들의

생명으로 바뀌는

                     이 초현실의 세계를 보라


자갈치시장에서 86번 버스를

                                       타 보라

죽음과 삶의 경계를

                          지우는

비릿한 생선 냄새를

                         먼지 자욱한 차창의

잿빛 시야를 흔들며

                          버스가

                                  올라가고 있다

                  한때 이곳은

안도의 한숨을 돌린

                        그대들의 피난지

비탈진 구릉지

                 공동묘지에 들어가

공동묘지와 함께

                   판자촌에서

새로운 수레바퀴를 만들어간 사람들


좁디좁은 생존의 길

                         지금도 길은

아무렇게 나 있고

                         아무렇게 휘어지고

어딘가를 향해

                   무한히 올라가고 있다

아무렇게 산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곡마단의

긴 행렬들

            경적들

독주 마신 자의 심장으로 헐떡이며

                                             버스가 회전한다

                                    180도로

                          360도로

현기증 나는 곡예의 가장자리에

                                         집들이

거꾸로 서 있다

                   주차장을 머리에 인 채

먼 바다를 응시하며

                         숫자를 세면서

하나 둘

숨을 고르고 있다

                      한때

광주리를 머리에 인 아낙들이

                                     셋 넷

모여들어

            저무는 오후

숨죽인 구릿빛 바다의 아가미를 속삭이던 곳

                                                          여덟 아홉

구겨진 담뱃갑처럼 가로등들이 눈뜰 때

                                                   밤바다여,

북항대교여,

               저 멀리

                        아랫도리에서

은박지를 곱게 꺼내어 펴는 파도여,

                                              썰물처럼

                                  저기 멀리

바다 건너 두고 온 가족들을

                                   은박지에 긁어 새긴

외로운 다락방의 화가를

                              나는 본다

                                        이곳 전망대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다닥다닥 잠든

부리 닳은 까마귀들을

가뭇하고 고요한 이름 없는 집들을.


                                   * <딩아돌하>  기발표작






편서풍이 부는 동쪽




말보르 값이 오르면

잠시 동안 이 바다를

찾지 않으리

잠시

흰옷을 입은

신부의 품 안에서

짧은 키스를 나누거나

회백색의 아교

벽돌로 지은

아담한 집 한 채를

꿈꾸거나

그것은 옛날

사무엘은 중얼거렸다

타 들어간 담배처럼

순간 삶은

순간

사라지지 않는 절망, 한때는

누구에게나

곱던 신부의 면사포

하얀 목덜미를 안고

잠들던

채굴 노동자의 갈색 근육

불타던

첫날밤 숲의 석탄더미

막대사탕을 물린 아이의

부푼 볼과

부푸는 꿈만큼

좁아지기 시작한 광산 동굴들

구멍들,

기종들,

폐의 먼지들,

이사로 떠돌던 유년의 기억

공터와 친구들

사무엘의 기억은 흐릿해 간다

뒤엉킨 낚싯줄과

바람 빠진 축구공

며칠째 썩어가는 생선 눈알들

아마 그건

무뎌진 칼처럼

딱 아프지 않을 만큼

후벼 판 소망들

구멍 뚫린 하늘에서

퍼붓는 잿빛 폭설들

휘몰아치는

시베리아 편서풍과

매연을 안고

북경의 먼지들이 몰려오고 있다

이 겨울 어디든

움직이는 공장을 찾아

기계에 먼지들이

쌓이면

담뱃값은 오르고

먼지들이

쌓이면

월세는 오르고


                    * <유심> 기발표작















                                         I will be back1)






“고이 간직해온 염소의 뿔을 갈피에 끼워두고 나는 떠나네. 그 뿔로 이 책의 심장을 뚫고 부디 나아가게나. 행운을 비네. 베이루트의 밤하늘에 떠오를 은하의 젖에 목을 축일 수 있을 때까지.”2)





19972013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린다. 세상의 모든 것을 천천히 덮어준다. 눈을 쳐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화자는 우리와 “상관없이 내리는/ 눈, 눈, 저 눈”(「펭귄」)을 응시하며 고요 속을 횡단한다. 때론 “친구여 이번만은 정말 내가 펄떡대는 치어가 될 수 있을까”(「오디션」)라고 속삭이며 상념에 빠져들기도 한다. 2013년에 출간된 박강 시인의 시집 『박카스 만세』에서 가장 멋진 장면을 꼽으라면 나는 이 장면을 선택하고 싶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을 쳐다보며 힘없이 담배를 물고 서 있는 이 장면을 말이다.


이 씬(scene)을 쳐다보고 있으면 고독하고 적막한 마음이 전달된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창밖에도 현재 비가 떨어지고 있으니 동일한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몽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와 상관없이 내리는 비, 비, 저 비를 닮고 싶다고. 이처럼 박강 시인은 현실을 겨냥한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화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직장을 얻지 못했지만 “아르바이트라도 하다니”(「크레딧」) 다행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늘 항상 “시체실에서 숨어”(「개원」) 지내고 자유를 찾기 위해 매일매일 “적금을”(「위생의 제국」) 붓는다. 하지만 이 적금이 미래를 약속해주지는 않는다. “경쟁 경쟁 되뇌어야”(「렉터 박사의 처방전」) 했던 그의 표정 속에는 불투명한 미래만이 버티고 서 있다. 탈출구를 찾을 수 없어 화자는 매번 씁쓸하게 고개 숙이며 걸어 다닌다. 그는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채 패배자로 낙인찍힐 뿐이다. 연애도 사랑도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난다.


화자는 “결과주의에 승복”(「위생의 제국」) 하기도 했다. 이 장소에서 치열하게 피 튀기며 싸웠다. 그는 이런 풍경 속에서 젊은 시절을 버텼다. 동료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력서 한 줄 늘이기 위해 영혼 없이 “각자의 땅만 내려다보고 묵묵”(「너와 나의 국토대장정」)히 걸었다. 무릎을 희생하더라도 이력서를 늘렸다. “넥타이가 축 늘어져”(「이상한 염색」) 있는 채로 유령처럼 사무실을 돌아다녔다. 그들은 “우리의 연애는 가능합니까/ 우리의 보금자리는 정말 찾아옵니까”(「스콜성」)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들에겐 음악만이 자유를 선사했는지 모른다. 작은 이어폰 속으로 흘려 들어오는 시끄러운 화음만이 환상 속에서 이들을 위로해 주었다. 찌그러지고 뒤틀린 표정이 『박카스 만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누구의 모습도 아닌 우리 주변의 얼굴이다.


시기적으로 『바카스 만세』가 2013년에 발행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시간보다 훨씬 이전의 흔적이 묶여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000년대와 1990년대 후반의 시간이 그것이다. 하지만 지금과도 현실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예전이나 지금이나 먹고사는 문제로 다투는 것은 여전하다. 더 나은 세상으로 변화한다는 낙관적인 입장은 폐기(廢棄)되어야 할 것 같다. 힘겨운 세상만이 버티고 서 있다. 오히려 점점 더 썩어들어 갈 뿐이다. 서로를 좀 먹게 만드는 무의식적인 사회 구조가 역겹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이유로 이 사회는 교환 가능한 존재로만 우리를 가름하는지 모르겠다. 수치화된 시선으로 서로를 질투하며 밀어낸다. 우리는 이곳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기계처럼 살아간다. 사람들은 존버만이 답이 될 수 있다고 서로를 위로하지만, 정말로 존버가 답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존버해서 버틴 소수의 몇몇만이 영웅으로 치부되는 이 세상에서 존버할 수 없는 찌그러진 영혼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짓눌린 영혼의 발자취를 시인은 첫 시집에서 찾았던 것이다.


2020 이후


박강 시인의 최근 신작 시 5편을 읽는다. 부산 풍경을 담고 있다. 시집에서는 연애도 보금자리도 불가능한 얼굴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간 탓인지 화자는 결혼도 하고 자리도 잡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시인은 이 세상에서 삐걱거린다. 다행히 시에 대한 탐구는 그대로다. 이 다섯 편 중 기억에 남았던 순간을 순차적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오랫동안 나는

철없이 가벼웠던 영혼

떠 있으면서

방에 갇히기를 거부한

한 줌의 먼지

오늘도 먼지처럼

저녁마다 남겨 놓은

맥주 거품과

거품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단조로운 식탁

한켠에

거울에

세 들었던 성에가 쫓겨나고 있다

멀건 죽으로 흘러내리며

거울의 먼지를 씻어낸다, 눈물처럼

결국, 눈물처럼

오늘도

기억해 내지 못한 여인들


                 「비 내리는 바다는 자꾸 얼굴을 만든다」 부분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을 먼지로 비유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행위를 표현했다. 그러나 이 먼지는 방이라는 커다란 우주에 갇혀 있다. 먼지 자체는 자유로울 수 있겠으나 그의 자유는 시작부터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오랫동안 나는/ 철없이 가벼웠던 영혼/ 떠 있으면서/ 방에 갇히기를 거부한/ 한 줌의 먼지”라고 되뇌었는지 모른다. 화자는 오랜 시간 자유를 갈구했지만 늘 이렇게 갇혀 사는 신세다.

먼지와 같은 대상은 『박카스 만세』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화자와 무관하지 않다. 인간이 자유를 갈망하고 이 바람에 따라 ‘자유’을 변주하는 것은 이곳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 때문이다. 자유가 없으므로 우리는 자유를 갈망한다. 불쌍한 존재다. 만약, 자유가 있다면 음악의 형식으로 전달되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雨)나 눈(雪)의 형태로 ‘순간’을 둘러 싼 채, 잠시 우리를 위로해 줄 뿐이다.


자신을 이렇게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이 시에서 ‘눈물’이 번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화자는 맥주를 마시며 흘러내리는 거품과 눈물을 같은 것으로 상상한다. 이 몽상은 다시 화자 자신과 시인의 곁을 지켜주는 아내 그리고 주변 사람들로 확장된다. 모두 애쓰며 살아가는 존재다. 그중에서도 “가장자리부터 떨어지는 이 겨울 나뭇잎”의 존재와 “신맛의 이불을/ 자꾸 펼치며/ 잠을 재촉하는 아내”는 화자가 직면한 현실을 더욱더 짙게 응시해 준다. 무엇보다도 그의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신발 끈 조이며/ 잰걸음으로” 숙소를 탈출한다. “세 들었던 성에가 쫓겨나가고 있다”는 구절은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집이 아니라 숙소(宿所)인 그곳에서 화자와 그곳의 사람들은 눈물의 형태로 삶을 반복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바다’ 이미지가 파도처럼 밀려온다는 사실이다. 『박카스 만세』에서 만들어진 화자의 모습이 이 신작시 에서도 바통이 이어지긴 하지만 바다의 흔적은 시집에 없던 표정이다. 박강 시인에게 이 변별점이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것 같다. 구체적으로 말해 ‘부산’이라는 지역은 박강에게 새로운 형태로 시를 짓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회백색의 아교

벽돌로 지은

아담한 집 한 채를

꿈꾸거나

그것은 옛날

사무엘은 중얼거렸다

타 들어간 담배처럼

순간 삶은

순간

사라지지 않는 절망, 한때는

누구에게나

곱던 신부의 면사포

하얀 목덜미를 안고

잠들던

채굴 노동자의 갈색 근육

불타던

첫날밤 숲의 석탄더미

막대사탕을 물린 아이의

부푼 볼과

부푸는 꿈만큼

좁아지기 시작한 광산 동굴들

구멍들,

기종들,

폐의 먼지들,

이사로 떠돌던 유년의 기억

공터와 친구들

사무엘의 기억은 흐릿해 간다


                   「편서풍이 부는 동쪽」 부분


이 시의 화자는 지금 이곳의 현실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는 “회백색의 아교/ 벽돌로 지은/ 아담한 집 한 채를 꿈꾸”었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진작에 깨닫는다. 시인은 사무엘3)이라는 예언자를 거론하는데 여기서 예언자는 소실된 꿈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화자에게 꿈은 순간이자 절망이다. 꿈이 절망이 되는 것은 이뤄질 수 없는 막연한 희망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의 끝에 희망이 당도하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것은 없다. 화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막대사탕을 물린 아이의/ 부푼 볼과/ 부푸는 꿈만큼” 커져 버린 꿈은 꿈 자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꿈을 꾸었던 흔적은 이제 의미 없다. 그래서 사무엘의 기억은 “흐릿해 간다” 예언자의 기능은 상실된 것이다.


시인은 여전히 “담뱃값은 오르고/ 먼지들이/ 쌓이면/ 월세는” 오르는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다소 냉혹하게 말해 젊은 청춘이었던 30대의 박강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질문하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발상 자체가 ‘바다’라는 공간을 거쳐 흘러내린다는 점이다. 가령, 화자는 썩어가는 “생선 눈알”을 들여다보며 “딱 아프지 않을 만큼/ 후벼 판 소망들”이라고 말하는데 화자가 그려낸 소망의 상처가 이처럼 ‘바다’의 흔적을 무의식적으로 끌고 온다. 우리는 흔히 무의식을 인간의 내면으로 한정해 논한다. 하지만 공간과 장소 또한 인간에게 의식되지 못한 채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무의식의 한 종류다.4) 시인에게 ‘바다’라는 공간은 이렇게 다가온다.


신작 시에서는 형식도 이색적이다. 『박카스 만세』의 화자와는 큰 차이가 있다. 꽉 짜인 틀을 지양하고 ‘먼지’ 형식으로 차분하게 시가 늘어나 있다. 손을 펼쳐 휙 불면 날아갈 정도로 가늘게 짜여있다.


나는 이 글에서 박강 이전과 이후를 ‘바다’라는 공간에 의해 구분된다고 강조했다. 물론, 생물학적인 시간이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겠지만 ‘공간’의 차이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된다. 어쩌면 박강은 늙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최근 젊은 시인들이 A․I 5)화자와 기계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끌고 와 시의 소재로 활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포스트―휴먼 시대를 쫓아가 인간이 무엇인지 질문하려는 의도이다. 일부의 시인들은 동물 담론을 끌고 와 동물 이야기로 시집6)을 묶는다. 온몸이 아닌 영리한 방식이다. 무의식의 형태로만 이러한 흔적들은 인정받을 수 있는데 이들의 문학이 무의식의 영역에서 재생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일부는 머리로만 작성한 듯 보인다. 진정한 참여시7)는 의식이 사라진 상태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박강은 이러한 당대의 흐름을 쫓아가기보다는 내가 버티고 서 있는 삶 속에서 ‘나’ 자신을 온전히 투사하고 있어 믿음이 간다.



암남동에 공룡 뼈가 묻혀 있다면

그것은 문학

그것은 시

언제나 사람들은 티라노사우르스를 떠올리지만

곰포소그나투스

미크로랍토스

가장 작은 것들의 뼈는 아무도 찾지 않는다

그것은 문학

그것은 시

오래 봉인되어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겠지

남포동으로 가자

술을 마시자


                         「솥단지를 뒤집어 놓은 마을의 노래 7 ㅡ송도에서」 부분



부산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이 연작시는 낯설게 느껴졌다. 왜 하필 부산일까. 특정한 주제가 정해지거나 의도가 짙게 배어 있다기보다는 ‘부산’이라는 지역을 밀어낼 수 없어 작성된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의식에서 재생된 시라는 것이다. 우선 시(詩)에 대해 질문한 연작시 7이 눈에 들어온다. 화자는 건축가 김중업(1922.3.9.-1988. 5.11.)이 부산에 지은 송도의원이 이제는 사라졌다는 말로 시작한다. 여기서 ‘없다’의 의미는 “가장 작은 것들”의 흔적과 무관하지 않은데 이 부분이 화자가 지향하는 시의 형태와 어렵지 않게 맞물린다. 이 부분을 화자는 시인 조병화(1921.5.2.-2003.3.8)의 흔적을 쫓아가 다시 재생산한다. 그렇다면 시인이 추구하는 시는 무엇일까.


“언제나 사람들은 티라노사우르스를 떠올리지만/ 곰포소그나투스/ 미크로랍토스/ 가장 작은 것들의 뼈는 아무도 찾지 않는다/ 그것은 문학/ 그것은 시”라는 구절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시인의 입장은 『박카스 만세』 이후 시집의 행보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사라진 것에 시적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 방법론은 ‘부산’이라는 지역을 붙잡고 나타난다.



총칼이 지배한 이곳은 한때의 전장(戰場)

소리 없이 사라진 남편을 기다리다

아낙들은 흑백의 벽화가 되었다

우물가에서 때를 벗겨 외지로 떠나보낸 아이들

어느새 커서

북회귀선의 연어처럼 상처 난 얼굴로 돌아와

모세혈관의 좁은 골목

유년의 집을 찾아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

미로처럼 엉킨 삶은 오히려 바깥이었어

창문의 이끼는 연두 벽으로

시든 화분은 빨강 지붕으로

알록달록 새 옷을 갈아입은 마을

야수파 화가처럼 물감 밟은 고양이들이

윗집에서 아랫집 지붕으로 건너다니는 오후


                         「솥단지를 뒤집어 놓은 마을의 노래 8-감천마을에서」 부분



이 말에 시인이 동의라도 하듯 연작시 8은 부산의 감천마을 이야기를 다룬다. 이 마을에 대한 정보가 없어, 구글에 ‘감천마을’을 검색해 보니 시인의 말대로 “야수파 화가처럼 물감 밟은 고양이들이/ 윗집에서 아랫집 지붕으로 건너 다니는 오후”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이러한 요소가 아니다. 시인은 이 장소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연장 속에서 사유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한때 전장(戰場)이었던 이곳에서 누군가는 남편을 오래도록 기다렸다. 이 간절함이 혼으로 벽화에 담겨 있다. 한국 현대사의 흔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이곳을 떠난 아이들이 상처 입은 얼굴로 돌아와 좁은 골목 사이와 사이를 움직이며 사진을 찍는다. 시인은 이 광경을 보고 “미로처럼 엉킨 삶은 오히려 바깥”이었다고 말한다. 안과 밖이 모두 상처라는 말로 들린다. 어디를 가든 살아내는 것 자체가 곤욕스러움을 반영하는 듯도 하다. 이 작품도 연작시 7에서 언급된 “가장 작은 것들”에 손을 뻗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한때

광주리를 머리에 인 아낙들이

                                     셋 넷

모여들어

            저무는 오후

숨죽인 구릿빛 바다의 아가미를 속삭이던 곳

                                                         여덟 아홉

구겨진 담뱃갑처럼 가로등들이 눈뜰 때

                                                  밤바다여,

북항대교여,

              저 멀리

                      아랫도리에서

은박지를 곱게 꺼내어 펴는 파도여,

                                             썰물처럼

                                   저기 멀리

바다 건너 두고 온 가족들을

                                  은박지에 긁어 새긴

외로운 다락방의 화가를

                             나는 본다

                                         이곳 전망대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다닥다닥 잠든

부리 닳은 까마귀들을

가뭇하고 고요한 이름 없는 집들을.


                             「솥단지를 뒤집어 놓은 마을의 노래 3-산복도로에서」 부분



마지막으로 연작시 3은 흩날리는 눈발처럼 시의 형식이 재미있게 흩어져 있다. 부산의 “자갈치시장에서 86번 버스”를 타고 여행하듯 시행들이 움직이고 있다. 검은 봉지에 담긴 죽은 생선들의 흔적을 시작으로 과거의 피난지이자 묘지였던 이곳을 풍경을 담는다. 화자는 이 마을을 시의 형식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다양한 흔적들을 덧붙인다. 무엇보다도 “나는 본다”라는 구절에 눈길이 간다. 그는 부산이라는 공간에서 무엇인가를 보려고 한다. 찾으려고 하고 그것에 대해 손길을 내민다. 그것이 시의 길을 쫓고자 하는 시인의 여정처럼 읽히는 것은 나만의 몽상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짧은 이 글을 통해 박강 시인의 『박카스 만세』 이후의 작업을 명명해 보자. 그의 시는 과거보다 무게가 덜 나간다. 가볍다. 그렇다고 영혼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시인은 탄력있는 몸으로 무엇인가를 찾고 그린다. ‘부산’이라는 공간은 박강 시인에게 새로운 문학을 무의식적으로 재생시켜 준다.


8년 전 그를 흑석동 중국집에서 본 적이 있다. 그는 막 시집을 출간한 젊은 시인이었다. 그는 특강 초청 시인으로 수업에 초대되었고 운 좋게 나는 학생 신분으로 그와 함께 호흡할 수 있었다. 그는 중국집에서 자신의 시집을 학생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8년 전 우연히 만나 시집 한 권 받은 인연이 또 이렇게 글을 쓰게 되는 인연으로 번진다.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박강 시인의 시집과 신작시를 시 읽는 동료들과 다가오는 금요일에 함께 읽을 계획이다. 시는 무엇이고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한 인간의 모습은 무엇인가. “고이 간직해온 염소의 뿔을 갈피에 끼워두고 나는 떠나네.”라고 말했던 시인 박강이 다시 무장을 하고 이곳에 돌아왔다.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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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제목은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터미네이터 2>(Terminator 2: Judgment Day, 1991)의 주인공 터미네이터가 용광로에 몸을 던지며 대중들에게 건넨 대사이다.

2) 박강, 「베이루트 독서」, 『박카스 만세』, 민음사, 2013, 126쪽. 이 작품 이후로 『박카스 만세』에 수록된 시를 인용할 경우 작품 이름을 적도록 한다.

3) 예언자는 미래를 건설하는 사람이다.

4) 여기서 무의식은 들뢰즈와 과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사용한 ‘존재론적인 무의식’을 의미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분열-분석의 무의식은 인물들, 집합들, 법들을 모르며, 이미지들, 구조들, 상징들을 모른다. 무의식은 고아이다. 무의식이 무정부주의자요, 무신론자이듯 말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부재를 가리킨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역사의 이름들(<고유명사들의 바다>)이 현전하는 내공들을 가리키는 어디서건 무의식은 자기 자신을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무의식은 고아이다. 무의식은 구상적(figuratif)이지 않다. 왜냐하면 무의식의 형상성(figural)은 추상적이며, 분열-형상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구조적이지도 상징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무의식의 현실은 그 생산에서, 그 비조직성 자체에서 현실계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재현적이지 않고 단지 기계적이며 생산적이다.”(질 들뢰즈・펠릭스 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김재인 옮김, 민음사, 2014, 517쪽.)

5) 정우신, 『도넛시티』, 은행나무, 2020, 44~79쪽.

6) 출판사 아침달에서 나온 『그대 고양이는 다정할게요ㅡ고양이와 함께한 시간에 대하여』(2020)와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2019) 두 시집을 참고할 수 있다. 이 두 시집은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동물담론의 영향으로 기획된 것으로 추측된다.

7) 시인 김수영이 1967년에 발표한 「참여시의 정리」에서 언급된 ‘증인부재의 도식’ 개념을 두고 한 말이다. 이 개념은 ‘자동기술의 윤리’로도 생각할 수 있다. 문종필, 「김수영의 참여시론 연구」, 중앙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9, 1~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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