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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Sep 26. 2021

박은주 시인의 시집

<나는 누구의 바깥에 서 있는 걸까>에 대한 단상




                              



텅 빈 곳과 낮은 곳으로



성찰省察


시선이 참 따뜻한 시집이다. 멋 부리지 않은 정직한 언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시를 지었다. 당대의 유행을 쫓아가지 않았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갈고닦았다. 그래서 박은주 시인의 시집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런 언어를 만나면 괜스레 힘이 난다. 화려하진 않지만 수줍은 고백이랄까. 때론 화려한 것이 부담될 때가 있는데, 박은주 시인의 언어는 수줍은 목소리로 진솔하게 세상과 만나고 있었다. 투명하고 또 투명하다. 이런 차분함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이 마음에 들었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함께 읽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이런 용감한 말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자명하다. 상징 언어 체계 속에 삶을 온전히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투명한 것은 투명한 데로 매력이 있는데 그의 정직한 삶과 투명한 언어가 맞물린 것 같다. 나는 이러한 성질이 현대성의 중요한 성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투명함에 반기를 들 수 있다. 누군가는 특정한 세계관을 끌어와 실험을 하는 것이 좋은 시라고 판단할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용감하게 도전하는 방법이 의미 있는 시라고 주장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이미지를 이용해 고흐의 그림처럼 알록달록한 살갗을 피부에 새겨주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기도 한다. 혹자는 실존을 확대해 동성애 리플리컨트 동물 등으로 연결되는 소수자 화자를 창조하는 것이 의미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이는 환상 속 화자를 만들어 윤리보다 더 윤리적인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의미 있다고 말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이 시인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녀는 거울처럼 투명하게 그린다. 그것이 그녀의 창법이며 목소리이다. 시인은 이 방법을 잘 구사할 줄 안다. 무엇보다도 눈치 보지 않고, 이 방식으로 노력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자신의 창법이 아닌 것을 억지로 끌고 와 흉내를 내는 것보다 정직한 것이 오히려 몇 백배 낫다.


물론, 습관의 영역으로 확장해 불가능한 것을 내 것으로 변형하는 방법도 있다. 이 방법은 지독한 훈련을 담보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의 몇몇만이 이뤄낼 수 있는 사건이다. 박은주 시인은 그곳까지 자신의 몸을 실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닦고 쓸고 매만졌다. 그녀는 거짓 없는 언어가 좋은 언어라고 생각했고, 삶 역시 동일하다고 믿었다. 반향이라는 측면에서 미학적인 잣대를 들이 될 수도 있지만 잣대를 운운하기에는 박은주 시인의 언어는 참. 참. 참. 솔직하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마음에 든다. 내가 쓴 ‘역설’이라는 단어가 위험하다. 시가 투명한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무슨 이유로 투명한 언어를 옹호하는데 힘들어 하는가. ‘좋다’는 의미를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람이 좋으면 시도 좋다. 삶이 곧으면 시도 곧다. 이 시집은 삶(生)을 품고 간다.


성찰省察이라는 단어가 있다. 자신의 마음을 반성하고 다시 살피게 해 준다는 뜻이다. 이 시집에서 나는 이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시인은 자신의 삶 속에서 깨달은 것을 독자들과 함께 나눈다. 나누더라도 그것이 설득력이 없다면 흥미를 잃기 십상인데, 박은주 시인이 쓴 성찰 관련 작품은 투박하지만 꽤 타당성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어렵지 않게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타당성은 특이한 특징을 품고 있다. 행 끝에서 동일한 단어를 걸어 유사한 리듬과 의미를 만들어 내는 방법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앞말의 대상을 부정하는 조사 ‘―말고’를 통해, 동사 ‘―말걸 그랬다’와 ‘―있고/ 알았더라면’를 활용해, ‘사람’이라는 명사를 끝에 놓는 방식으로, ‘―거지’를 ‘―몰라’를 ‘―것 같지만/ ―것이네’를 통해, 동사 ‘―고프다’를 행 끝에 걸어 놓는 방식을 통해 시를 만드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물론, 누군가는 이 방식을 밋밋한 시적 장치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조용히 더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수긍하게 되고 시인이 고민하고 사유했던 방식과 동일하게 생을 쫓게 된다. 앞에서 거론된 작품 중, ‘먹는다’는 것에 대해 다룬 시를 읽어보도록 하자. 시인의 얼굴이 이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다.


아무리 좋은 곳에 있어도 배는 고프다

아무리 좋은 사람과 있어도 배는 고프다

사치스러운 것들에 마음을 팔고

게으른 몸에 시간을 팔아도 배는 고프다

슬픈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배는 고프고

친구가 죽은 날도 배가 고팠다……

털썩, 주저앉은 밥상머리에서

자존의 슬픈 구애가 저를 허물며 숟가락질을 했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아무리 우겨봐도

한 마리 짐승처럼

한 마리 벌레처럼

결국에 돌아오는 자리는 밥상머리였다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다


                                 「빙정1」 전문


품위를 지켜 가치와 존엄을 지키는 것이 자존自尊이다. 시인은 이 감정을 배가 고픈 행위와 함께 생각한다. 좋은 사람과 있을 때도 좋은 곳에 있을 때도 사치스러운 것에 마음을 옮겨 놓을 때도 게으른 날을 보낼 때도 슬픈 영화를 보는 날에도 시인은 항상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밥상머리로 몸을 옮겨 놓았다. 사랑하는 친구와 이별하는 날은 곡진했었기에 밥 먹는 행위를 밀어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시인은 짐승처럼 주저앉아 허겁지겁 굶주린 배를 채웠다.


시인은 하늘에 높이 던진 부메랑처럼 먼 길을 돌아 ‘밥상머리’로 돌아온다. 이것이 시인의 운명이며 우리들의 운명이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들은 “밥상머리”로 매번 돌아오게 되는지 모르겠다. 시인은 이런 자신을 응시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다”라는 마지막 문구에서는 정말로 걷던 걸음을 멈추게 될 것 같다.



세상 같은 건 알지 말걸 그랬다

사람 같은 건 알지 말걸 그랬다


세상의 얼굴에는 두께가 있고

세상의 길에는 갈림길이 있는 걸 알았더라면


집을 나서지 말걸 그랬다

길을 떠나지 말걸 그랬다


누군가 웃는 일에 누군가 울어야 하고

어떤 희망이 또 다른 절망이 되는 걸 알았더라면


마당에 꽃이나 가꾸고

창가에 바람이나 닦을 걸 그랬다


세상 모든 앎의 시간 위에는 거울이 있어

가여운 너와 나의 삶을 비추는 걸 알았더라면


한마디라도 덜 들을 걸 그랬다

한 사람이라도 덜 만날 걸 그랬다


                               「사유의 편력」 전문



이 시는 후회와 깨달음이 짙게 배어 있는 작품으로 앞선 작품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 삶의 통찰을 그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시인은 이 작품에서 세 번의 후회와 세 번의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갈림길이 존재했었기에 함부로 길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 첫 번째 후회ㅡ깨달음ㅡ이고, 누군가의 소중한 희망은 다른 이에게는 절망이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 두 번째 후회ㅡ깨달음ㅡ이다. “세상 모든 앎의 시간 위에는 거울이 있어/ 가여운 너와 나의 삶을 비추는 걸 알았더라면” 주변 사람들의 말을 덜 듣고 덜 만났어야 했다는 것이 마지막 후회ㅡ깨달음ㅡ이다. 시인의 이러한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지나온 과거를 다시 쳐다보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후회는 가보지 않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말이다. 삶 자체는 사후적으로 후회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고백은 역설적이게도 힘겨운 삶을 열심히 살아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행복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독자들에게 질문하게 한다는 점에서 박은주 시인의 작품은 의미가 있다.

이 지면에서는 성찰과 관련된 두 작품만을 예로 들었으나,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시집을 천천히 읽으며 이런 흔적들과 마주하기 바란다. 독해하는 과정에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얼굴에서 입이 눈 아래 있는”(「몸의 구도」) 이유를 알게 될 것이고, “못 보다가 떠날 때야 가슴”(「행운에 대한 추론」)을 내리 쳤던 그때의 그 시절을 다시 회상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끝까지 사람이 그리워하는 것은 사람”(「사람 그 쓸쓸한 이름」)인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산다는 것


시인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한다. 이 질문은 누군가의 생을 쫓아가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발붙이고 있는 땅에서 직접 겪고 느낀 감정을 적는다는데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시인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고추 모종 아홉 포기가 누렇게 얼굴이 뜨고 있는 건

팔려가지 못해 젊음을 놓치고 그만 늙어버렸기 때문


그랬다 우리는 늘 누군가 사주기를 기다리면서

젊음을 시간을 고백을 생각을 사주기를 기다리면서


우리의 젊음이나 시간이나 희망이나 이름을

그 값으로 주면서 또 받으면서


사고팔면서 팔고 사면서 시들어가는구나, 시들어가

풀벌레처럼 파르르, 거리는구나 파르르 거려


한물간 삶도 꼭 끌어안고 놓지 않는 속살 같은 그 무엇

꼬옥 끌어안고서 늙어가는 모종을, 시간에 심는다


살아가는 동안 버릴 수 없는 슬픔 하나 거름으로 얹히면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떡잎 하나로 매달릴지도 몰라


                                    「시간을 붙들며」 전문



시인은 누렇게 빛이 바랜 고추 모종 아홉 포기를 보고 있다. 이 고추 모종을 보면서 늙음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늙음은 젊음과 비견된다. 즉, 늙은 것과 늙지 않는 것을 동시에 떠올리게 해 준다. 고추 모종이 팔리지 않아 쓸모가 없다는 생각은 인간의 늙음과 만난다. 푸른 잎은 젊음이고 누런 잎은 늙음이기에 상식적으로 쓸모가 소실된 누런 고추 모종은 선호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의 눈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쓸모없음은 쓸모 있음으로 변주한다.


고추 모종이 누렇게 변해 시들시들 해 졌지만, “한물간 삶도 꼭 끌어안고 놓지 않는 속살 같은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순간을 붙잡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시인은 생각한다. 그래서 쓸모없음을 쓸모 있는 것으로 치환하기 위해 늙은 고추 모종을 품는다. 물론, 이러한 발언 속에는 시인 자신의 삶도 녹아져 있다. 연민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나와 유사한 대상과 어울리는 것이니까. 시인은 누렇게 얼굴이 뜬 고추 모종을 자신과 동일시했을 것이다. 그녀는 끝을 쳐다보고 있다.


끝을 쳐다보는 것은 과거를 응시한다는 말로 바꿔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과거의 자신을 쳐다본다. 자신을 쳐다보는 과정에서 꿈꾸었던 지난 시절을 응시한다. 이 과정 속에서 재생된 시로 느껴지는 「출세에 대한 편견」은 독자들로 하여금 많은 깨달음을 선사한다. 같이 읽고 싶어 인용한다.


출세를 할 수 있을까

아니야 출세는 못하는 거야 그냥 꿈만 꾸는 거야

학교 다닐 땐 죽어라 공부하며 일등을 바라보지만

일등은 하는 애들이 딱 정해져 있지

졸업을 하면 대기업에 취직을 꿈꾸지

하지만 대기업은 꿈만 꾸다가

월급이라도 꼬박꼬박 받길 바라지

그러고는 멋진 상대를 만나 결혼을 꿈꾸지만

딱, 나 같은 사람 만나 연애하다 결혼하는 거야

아이가 생기면 아이에게 꿈을 떠넘기지

너는 위대한 사랑의 결실이라고

가족은 똘똘 뭉치는 거라고

같은 숟가락을 빨며 엉겨 살아가는 거야

그게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이지

짱, 한번 먹어보겠다고 한철을 미친 듯이 살다가

어느 길목에 버려두고 온 나를 찾으며 깨닫는 건

보통 사람이 보통으로 살아가려면

정말 열심히 살아야만 한다는 거지

가끔 성공이라는 목표의 지점을 한 단계식 내리면서

꿈의 크기도 줄어드는 거지

그렇게 허리가 굽고 몸의 키도 줄어들면

인생의 무게도 가벼워지는 거지

그러니까 출세는 하는 게 아니야

살다가 가끔 쳐다보며 웃는 별 같은 거지


                              「출세에 대한 편견」 전문


출세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유명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구성원들이 높은 지위에 오를 순 없다. 시인은 출세가 만만치 않음을 강조한다. 모순적인 사회구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무의식적으로 체득한 것일 수 있다. 시인은 고백한다. “짱, 한번 먹어보겠다고 한철을 미친 듯이 살다가/ 어느 길목에 버려두고 온 나를 찾으며” 깨달았던 것은 보통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보통 사람처럼 살기 위해서는 정말로 열심히 일해야 했다. 시인은 이러한 깨달음으로 인해 출세를 위해 쫓았던 지난 시절에 헛웃음을 보낸다. 그래서 “성공이라는 목표의 지점”을 한 단계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 인생의 무게도 가벼워진다는 논리다. 시인의 입장으로 돌아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살다가 가끔 쳐다보며 웃는 별 같은” 것이 정말로 출세인지도 모르겠다.


한 박자 쉬고 다음과 같이 몽상 한다. “허기도 비틀거림도 그 흔적 그대로 남는”(「인생」) 것이 인생일 진데, 출세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산다는 것은 우는 일이고 운다는 것은 살아 있는 힘”(「다시, 설정하다」)일 텐데, 인생의 우열을 가릴 수 있을까. 시인의 이런 애틋한 시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타인’을 그린 작품들도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들을 이 지면에 온전히 다루지는 못하지만 독자들께서 꼭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시인이 어떤 사람일까.


시인詩人


그녀는 “나무의 울음”(「바람의 구도」)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무얼 잃어버린 거 같은 마음에/ 괜히 가슴을 쓰다듬으며/ 창문을 닫지”(「바람 부는 날」) 못하는 섬세한 사람이다. “어느 한 순간도 나의 선택이 아닌 적은 없었고 그 무엇도 그 결과가 아닌 적은 없었다”(「사람의 문제」)고 자신을 냉철히 응시할 수 있는 멋있는 사람이다. 그렇다. 그는 시인이다.


눈에 꿀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꿀이 눈병을 낫게 한다기에

서리 맞은 어린 뽕잎을 끓인 물로 눈을 씻었다

어느 옛사람이 그렇게 눈병을 고쳤다기에

눈으로 연결된 혈자리마다 뜸을 놓았다

뜸을 놓을 때마다 기도를 했다

보게 해주세요… 제발 보게 해주세요

눈이 먼 음악가도 있고 눈이 먼 화가도 있지만

눈이 먼 시인(詩人)은 없다고 누가 말했다

눈이 멀면 시(詩)를 쓸 수 없는 거라고

그때야 알았다

시인(詩人)은 세상을 보고 세상을 말하는 눈이라는 걸


                              「시인(詩人)」 전문



그녀는 “시인(詩人)은 세상을 보고 세상을 말하는 눈이라는 걸”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보게 해주세요…제발 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 이러한 태도에서 그녀가 정말로 잘 보려고 애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원해도 잘 오지 않는 것

웃고 떠드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

나를 텅 비우고서야 겨우 나를 불러주는 것

마침내 나도 낮고 어둡고 깊어지는 것


                               「시인 백서」 부분



시인은 위의 구절을 가슴 깊이 새긴다. “간곡함의 가장 아득한 곳에 사는 슬픔”과 “슬픔의 가장 아득한 곳에 사는 희망”을 부여잡고자 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박은주 시인은 이 시집을 꾸리기 위해 안으로 밖으로 몸을 힘차게 굴렸다. 코로나-19 시대로 인해 시인의 ‘눈(目)’이 흐릿해지고 “감성이 사라져”(「어처구니없게도 2) 버렸을지라도 그녀는 시인으로서 이 자세를 오래도록 유지할 것 같다.



사회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시선을 가진 시인이 어떻게 사회를 응시할까.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어떤 몸을 품고 있는지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시장 상인들이 시위를 할 때

노점상들은 그곳에 끼어들 수 없다


일용직 노동자나

학자금 대출을 받은 편의점 알바생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달라는 시위 같은 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니까 정말로 가난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정말로 아무것도 못하는 그런 가난이 있다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두 개에 천 원 하는 애호박이나

세 묶음에 천 원 하는 깻잎을 담고 있는

빨간 소쿠리처럼


딱, 그 자리에 발목 잡힌 가난이 있다

아무것도 쌓을 수 없는 티끌 같은 가난이 있다


일본이 백색 국가 목록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한 후

일본 제품 불매 운동 일인 시위가 뜨거울 때도

그 목소리에 끼어들지 못하는


기가 죽은 허기가 있다

하루살이 같은 하루의 가난이 있다


                                「하루살이의 초상」 전문



시인은 이 작품에서 ‘몫 없는 이들’에 대해 다룬다. 말할 수 없는 존재들에 대해 시선을 옮긴다. 시인의 말대로 “정말로 아무것도 못하는 그런 가난”에 대해서 논한다. 사회와 관련된 작품이라면 이러한 사유가 우리 곁에 살아 숨 쉬어야 하지 않을까. 이 빈틈을 진지하게 쳐다봐야 하지 않을까.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그녀의 몸은 젊지 않다. 그래도 시인은 늙지 않는다. 늙지 않는 것이 시인이라면 그의 정신과 영혼은 여전히 젊다고 볼 수 있다. 시집이 쏟아지고 있는 이 시기에 누가 어떤 시집을 냈는지조차 알기 벅찬 이 시기에 난 당신의 팬이 되었다. 그러니 더 힘차게 더 간곡하게 자신의 색과 삶과 믿음을 밀고 나가길 바란다. 주목을 받지 못하더라도 시에 거짓이 없다면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다. 이 작은 힘이 당신 또는 독자의 인생을 바꿔 준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의미 있다. 문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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