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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Nov 06. 2021

 쭉쟁이들

정성숙 소설가의 <호미>에 대한 단상







                             쭉쟁이들


                                                                                  “우덜 같은 쭉쟁이 인생들 아니냐고.”(「놈」)




정성숙의 소설 『호미』는 억세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잡초처럼 바람에 흔들려 쓰러지기도 하고 때론 누군가에 의해 뿌리 채 뽑히기도 한다. 하지만 힘 있게 해쳐나간다. 역으로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어리석거나 비겁하다. 자책감을 느끼지 못한 채 가정폭력도 일삼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성숙의 여성 캐릭터들은 혁명가들처럼 흔들리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삶을 살아낸다. 물론, 이 삶 속에는 긍지도 체념도 슬픔도 아픔도 연민도 안타까움도 함께 응어리져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짠하기도 하고 때론 답답해하며 한숨을 내쉬기도 할 것 같다. 이 감정은 8편의 단편 모두에서 느껴지는 공통된 정서다.


이 소설집은 농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도시가 아닌 ‘농촌’이라는 점이 이색적이다. 흔히 문단에서 최신 담론을 논할 때, 낡았다는 이유로 제외되는 것이 이 개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녹색평론》과 같은 일부의 잡지를 제외하고 거론된 적이 거의 없다. 가령, 전선戰線에서 논의되고 있는 동물 담론, 페미니즘, 포스트-휴먼, 퀴어, 동학 등의 개념은 여러 잡지에서 특집으로, 좌담의 형태로, 낭독회의 형식으로, 수없이 반복되고 있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은 채 지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니 ‘농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다소 뒤처진 소설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우리 시대는 이렇게 앞서가고 있는데 지금 이 순간 농촌을 소재로 소설을 쓴다고 말이다. 누군가는 겉으로 개성 있는 소설이라고 칭찬을 하면서 뒤에서는 어이없다며 비웃을 수도 있겠다. 이런 말은 창작자를 향한 비판이기도 하니 소설가는 마음이 참 많이 아프겠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수정되어야 한다. 포스트-휴먼이 무엇인가. 궁극에는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 이후를 상상해 보자는 담론이지 않겠는가. 동물 담론은 무엇인가. 동물에게 영혼이 부재되었다고 믿었던 장님인 인간에게 영혼을 볼 수 있는 눈(目)을 선물해 주는 담론이지 않겠는가.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여성을 도구로 인식했던 ‘인간’의 역사에 반기를 든 담론이지 않겠는가. 이 담론들은 고정된 인간의 인식을 확장해 더 나은 삶을 만들어 보자는 데 합의한 목소리다. 그렇다면 ‘농촌 소설’을 다루는 것 자체도 위의 담론이 지향하는 방향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유는 자명하다. ‘농촌’이라는 공간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 극도로 소외된 땅이자 장소이기 때문이다. “서울 생활에서 밀려나 이곳”(「기다리는 사람들」)으로 내려와 사는 사람들과 더 나은 삶을 찾아 농촌으로 건너온 이국의 노동자들, 돈벌이가 되지 않아도 묵묵히 농사지으며 사는 농부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장성숙의 소설이 의미가 있다면 이런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데 있다.


작가는 누군가를 위해 대신 울어주는 샤먼shaman같은 존재이다. 정성숙은 농촌에서 겪었던 흔적을 자신의 혈액 속에 녹여 울고 웃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는 인물을 지방 특유의 언어로 옮겨 놓았다. 실제로 『호미』는 농촌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페미니즘의 연장선상에서도 충분히 논의될 수 있다. 이 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지점이다. 농촌이라는 공간 자체가 문단에서 언급된 적이 없으니 더욱더 그렇다. 그러니 사실상 동시대 담론과도 멀리 있지 않다.


이런 행위는 소수의 일군에 의해 작업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가치 있다. 실제로 정성숙의 직업은 소설가이자 농부이다. 이 사실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하이쿠에서는 ‘되다’와 ‘짓다’가 있는데, ‘짓는’ 것은 의식적인 반면 ‘되는’ 것은 성찰적인 무의식이 반영된 몸의 이행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하이쿠에서는 ‘되다’를 더 좋은 작품으로 간주한다. 즉, ‘되다’는 ‘자기 응시’를 바탕으로 한 나의 이야기인 것이다. 정성숙이 농부라는 점은 ‘되다’의 형식으로 이 소설이 쓰였음을 의미한다. 물론, 소설 속 모든 내용이 수학처럼 동등하게 펼쳐지진 않았겠지만, 그곳의 감정과 분위기를 대리자의 방식으로 그려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이 소설의 중요성과 값어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정성숙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농사일이 쉽지 않다고 목소리 높인다. 그래서 누군가는 농사짓는 땅을 팔아 이윤을 챙기자고 말하고, 농산물 값을 낮추고자 하는 상인의 태도에 화가 나 애써 키운 농작물을 모두 불에 태우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캐릭터는 농사를 포기하고 농부와 상인 사이에서 거래를 성사시켜주는 직업을 갖기도 한다. 다른 이들은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반려동물 문화에 편승해 농사가 아닌 동물(개)을 키워 이윤을 얻고자 한다. 농부들은 농사를 직접 짓기보다는 품삯 일을 해서 살아가는 삶이 더 낫다고도 입을 모은다. 농촌의 풍경이 이러하니 그곳에서 일하는 젊은 청년들도 결혼하기가 쉽지 않다. 한마디로 말해 “대파를 팔아야 장개를 가든 신방을 차리든 할 것인데 갑갑”(「복숭아 나무 심을자리」)한 것이다. 이러한 표정들이 지금 농촌의 현실이다. 아무리 농사를 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두 가지다. 농사짓는 것을 포기하거나 돈이 되는 농사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쉽지 않다. 매스컴에서 돈 되는 농사로 많은 수익을 얻었다는 기사를 심심치 않게 보게 되지만, 주식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처럼 소수의 농부들에게만 한정된 이야기이다. 무엇보다도 농사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농사가 농부들에게는 실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꼬부라질 때까지 엎져서 흙을 파도 사는 각단이 안 뵈는 시상살이를 인자는 안 살고 잪다.”(「기다리는 사람들」)라고 농부들이 습관처럼 말한다 할지라도,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그렇게 돈이 모아지는 것”(「백조의 호수」)이 아님을 잘 알고 있어도, 농부들은 손에 ‘호미’를 세게 부여잡고 온몸으로 농사일을 할 수밖에 없다. ‘몸’이 농사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멈출 수 없는 이러한 몸짓은 불가능하더라도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관성의 법칙에서 운용되는 정서의 힘이다. 이미 정해진 운명에 맞서는 영웅들처럼 농부들도 마찬가지로 멈출 수 없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농사밖에 없으니 이 행위를 멈추지 못한다. 짠하다. 그러니 농촌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농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딱히 해결책이 없다. 소설 속의 농부들은 정부 정책에 희망을 걸고 있지만 신통치 않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난간에 봉착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서 있다. 궁극적으로는 이런 인물들이 정성숙의 몸을 통과한다. 소설가 역시 이런 인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두에서 나는 정성숙의 소설이 억세다고 말했다. 그녀의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이 감정이 오래도록 가슴 한쪽에 머물러 있다. 무슨 이유로 소설가는 이런 감정을 품었던 것일까. 소설가가 직접 행위를 했던 농사일은 어땠을까. 최근에 어느 시인이 고추 농사 아르바이트를 내게 같이 하자고 연락이 왔다. 땡볕에서 고추를 따는 일이었다. 그 시인은 굉장히 힘들었다고 이야기했었는데, 도시에 사는 나는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많지 않으니 온전히 느끼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정성숙의 센 인물들과 만나게 되면서 그곳의 사람들 또한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특히, 여성 인물이 그렇다.


상식적으로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니다. 느꼈다는 것은 앞으로 내가 농사일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미』에는 그런 에너지가 담겨 있다. 정성숙은 대리자의 형식으로 농촌의 상처와 어려움을 우리들에게 전달한다.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농촌의 문제를 전남 해남의 언어로 우리들에게 이야기한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눈을 감으면 그곳의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는 기분이 든다.


농촌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와 마주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 이 소설은 값지다. 동시대의 다양한 담론에 비껴가고 있는 이 소설의 문제의식은 그래서 더 진보적이고 진취적이며 첨단이라고 볼 수 있다. 나와는 관계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곳은 나와는 상관없다는 이유로 우리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읽어보자. 읽고 난 후, 이곳이 아닌 저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져보자. 그럴 때, 소설가는 힘이 날 것이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몫을 가져본 적이 없는 농부들이 뿌듯해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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