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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Nov 30. 2021

김대성 평론가의 『대피소의 문학』에 대한 단상



1.


2018년 12월 31일에 출판된 김대성 선생님의 『대피소의 문학』을 잘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글 쓰는 삶’은 어떤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세월호의 아픈 흔적을 다룬 1부의 글을 읽을 때는 2014년 이후, 시청에 나가 촛불을 들었던 그때 그 당시의 풍경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김대성 선생님의 언어에 묻어 있는 온도와 절박함이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듯합니다. 그 당시에는 이 공간에 계시는 분들도 같은 마음이었다고 생각해 봅니다. 문학은 어떤 방식이든지 동시대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호흡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쓰는 존재들은 화석처럼 흔적을 남기고 고독하게 사라집니다. 김대성 선생님은 이러한 상태를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걷기란, 쓰기란 곧 상처를 역사화 하는 작업”(105) 인지도 모른다고 적었습니다. 이와 같은 작업을 이행하는 존재들이 시인일 수 있고, 소설가일 수 있고 평론가일 수도 있겠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 작업을 이행합니다. 그러니 ‘더’와 ‘덜’의 문제는 잠시 물러나도 좋습니다.


상처를 응시하는 방식은 각자 다릅니다. 저는 최근에 어느 한 팟캐스트에서 이선욱 시인에게 세월호 이후에 시집이 출간(『탁,탁,탁』(2015)되었는데, 그 흔적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그 시인은 “우리는 처음부터 그런 세상에 살고 있었잖아요. 놀라지 않았어요.”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늘 항상 부조리한 사건 사고와 습관처럼 마주했기 때문에, 특별하지 않다고 말해주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 시인은 우리에게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라고 비판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처럼 상처를 바라보는 방식은 상이합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부조리한 역사나 상처를 보고 외면할 수 없습니다. 어떤 방식이든지 역사화합니다. 김대성 선생님은 이 작업을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 놓습니다. 물론, 2021년인 지금은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역사‘화’하고 있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직접 이야기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해’에 대해 발언한 소설가 김애란의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부분을 직접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33)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해’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이해는 이처럼 좁힐 수 없는 ‘나’와 ‘당신’과의 거리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당신과 함께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자세로 상처를 쓰다듬을 수 있다면 무뚝뚝한 당신은 나를 한 번 정도는 믿어 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김대성 선생님은 옳다고 믿은 ‘이해’를 위해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설사 주목한다고 해도 제대로 말하기 어려운”(80) 존재들을 향해 손을 뻗고 있습니다.


2.


「한국문학의 ‘주니어 시스템’을 넘어」라는 글 중 각주 4번이 인상적입니다. 『신생』이라는 잡지에서 편집위원을 하며 겪었던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은 지금, 현재 우리 문단이 품고 있는 문예지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미나 방에도 다른 매체에서 편집위원을 하고 계시는 선생님들이 많으니 함께 논의하면 좋을 듯합니다. 『시현실』 편집위원이셨던 정난도, 김난도 선생님도 『시현실』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대성 선생님의 글로 돌아가, 그 글에 대해 인상 깊었던 부분을 옮겨 놓겠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숱한 비평가 중에 ‘주니어’로 ‘지목(차출)’된 이들은 더 넓은 필드에서 활약할 기회를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미 조직화 구조에 소속되는 터라 한층 폐쇄된 영역에 놓이게 된다고 봐야 하며 그런 이유로 비평적 자율성 또한 경색될 수밖에 없다”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기회’와 ‘인정’이 오히려 평론가의 자율성을 막는다는 논리는 한 번 정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선택’된 누군가는 그 시스템 안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 시스템 ‘안’에서만 숨을 쉬어야 한다는 점에서 밖을 쳐다보지 못합니다. 결과론적으로 ‘자율성’은 거칠게 훼손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쪽글’의 생태학」에도 바통이 이어집니다. 자율적인 비평 주체에 대한 고민은 비평적 글쓰기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만듭니다. 김대성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글을 적습니다.  


당대의 비평 속에서 쉽게 확인되는 ‘이론의 인플레이션’ 속에서 내가 감지하는 것은 ‘지적 허영’이 아닌 ‘생존’에 대한 공포’의 감각이다.(130)


저는 위의 인용문에서 ‘생존’이라는 단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대학원 시절 ‘이론’을 무기武器로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무슨 이유로 비평가들은 과잉된 이론을 적용하게 되는 것일까요. 이론을 공부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지만 이론과 ‘삶’이 동시에 뻗어나갈 수는 없을까요. 라는 고민을 선생님의 글을 읽는 과정에서 하게 됩니다.


제 기억으로는 김윤아 선생님께서 문학과 지성사에 짧은 에세이 한 편을 쓰셨던 기억이 나는데, 그 글에서도 비평가(시인)의 고민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 글도 함께 공유해 읽어보면 글 쓰는 존재들의 고충과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론가에게 자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을 김대성 선생님은 끊임없이 하고 있고, 이러한 고민의 실질적 이행이 3부 ‘대피소의 별자리-이 모든 곳간’으로 번지는 것 같습니다.


3.


저는 3부가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긴장은 다소 줄었지만 삶과 함께 ‘곁’에서도 동시에 나아가고 있어서 이런 글을 만나게 되면 ‘문학적’ 삶이 현재도 유효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읽는 동안 마음이 훈훈했습니다.


선생님은 3부에서 끊임없이 ‘연결’과 ‘접속’과 ‘만남’을 통해 새로운 사건이 만들어지길 지길 바라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접촉과 만남이 불가능하더라도 살아가는 것이 입증된 상태에서 즉, 메타버스 시대가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선생님의 이러한 ‘접속’과 ‘곁’의 철학이 다소 느슨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접속’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곳과 저곳을 만나게 함으로써 만남의 토대를 새롭게 발명”(2019)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만남은 기계적인 혹은 포스트-휴먼적인 기술과는 층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소중한 ‘만남’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현재 대구와 인천과 서울을 오고 갑니다. 인천에서는 계간지 『작가들』을 중심으로 동료들을 만나고 있고, 대구에서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그 지역 시인들과 소설가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서울은 지금 이곳에서 만나는 것이겠습니다. 저 또한 이런 만남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라디오의 경우는 대구지역 시민들과 문인들이 만나는 인터뷰 형식의 책을 기획하고 있는데 김대성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이론(?)적으로 도움을 받는 것 같아 힘이 납니다.


『대피소의 문학』에서 다뤄진 모든 작품과 상황들을 꼼꼼히 정독하지는 못했지만, 후일로 남겨둔 채 아껴서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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