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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Mar 03. 2021

파트타임 노동자부터 마지막 환자까지

오늘부터 3월 13일까지 매일 시 한 편에 대한 몽상을  연재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최상의 경우일지라도 고독한 삶입니다. 작가들을 위한 조직체는 작가의 고독을 덜어 줍니다만, 그것이 작가의 창작을 진작시켜 줄지는 의문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고독을 벗어 버림으로써 대중의 인기가 높아지기도 하지만, 그러다가 종종 작품의 질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작가는 혼자서 작업할 수밖에 없으며, 만약 그가 훌륭한 작가라면 그는 날마다 영원성 또는 영원성의 부재를 직면해야 합니다. 1)    



전설의 UFC 파이터 코너 맥그리거(Conor McGregor)가 오늘 더스틴 포이리(Dustin Glenn Poirie)에게 패배했다. 2연패다. 앞다투어 언론은 코너 맥그리거 시대가 저물었다고 보도했다. 맥그리거는 링에서 그 누구보다 화려했고 자신감 넘쳤던 파이터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빕 누르마고메도프(Khabib Nurmagomedov)와의 경기에서도 몸이 좋지 않아 아쉽게 패배한 시합이라고 믿었다. 즉, 운이 좋지 않아 게임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번 경기에서 그가 다시 영광의 자리를 찾아주길 바랐다. 그러나 또다시 패배했다. 한 명의 무명 선수가 UFC로 진출해 유명한 격투기 선수가 된 이후 다시 연패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2021년 1월 24일은 전설의 악동 파이터 코너 맥그리거가 2연패 한 날이며 링에서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깨닫게 해 준 날이다. 


앞에서 격투기 선수들을 끌고 왔으니 그들이 싸우는 ‘링’을 ‘문학’으로 회전해 몽상해 보자. 천재 편집자와 천재 작가의 이야기를 다룬 마이클 그랜디지(Michael Grandage) 감독의 영화 <지니어스(Genius)>(2016)는 편집자 맥스웰 퍼긴스(Maxwell Perkins)와 소설가 토머스 울프(Thomas Clayton Wolfe)의 우정을 다룬다. 이 영화에서 주요 장면은 이들의 긴밀한 대화이겠지만 편집자였던 퍼긴스에게는 토머스 울프만이 자신의 작가는 아니었다. 이 편집자에게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친숙한 장편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 F.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도 있었다. 영화에서 이들의 대화 장면 중 한 장면(scene)이 기억에 남는다. 퍼긴스 앞에서 돈을 빌려달라고 몸을 움츠리는 피츠제럴드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제는 소설을 쓸 수 없는 몸 상태를 퍼긴스에게 고백한다. 그래서 할리우드로 진출해 돈을 벌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퍼긴스는 단호하게 “자넨 소설가”라고 당부한다. 『율리시스 그랜트의 개인 회고록』이 어떻게 쓰였는지 설명하면서 말이다. 사연은 이렇다. 목에 암이 생겨 죽어가는 중이었지만 가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남기고 싶다는 간절함에,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회고록을 멈추지 않았고, 그 결과 위대한 역작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퍼긴스의 말을 듣고 좋은 책을 쓰겠다고 다짐하며 그가 빌려준 돈을 받는다. 


우리는 눈치를 보며 돈을 빌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패자로 단정 짓기 힘들다. 지금 그의 문학은 사람들에게 고전(古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인생에서 승자는 누구이고 패자는 누구인가. 문학에서 승자는 누구이고 패자는 누구인가.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홀로 ‘고독’해 질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말이다. 이 방법이 이곳에서 승리자가 되는 유일한 풍경이다.


2021년 새해에 읽은 14편은 시는 「파트타임 워커」 「늦은 저녁에」 「문」 「드라이브 스루」 「라이브러리」 「현관의 수사학」 「아직」 「개의 시간」 「감염」 「143번 시내버스」 「동거」 「고라니의 밤」 「합평의 제왕과 교수가 죽은 다음의 술자리」 「예약된 마지막 환자」이다.       



*

1) 어니스트 헤밍웨이, 「글을 쓴다는 건 언제나 고독한 일」, 『깨끗하고 밝은 곳』, 김욱동 옮김, 민음사, 2020, 6쪽. 




1. 유승현파트타임 워커현대시』 10월호한국문연, 2020, 80~83     

     

고블릿에 물을 따라준다. 로즈마리를 넣은 물주전자를 들고 

돌아다니며 부족한 것은 없습니까― 접시를 새로

바꿔드리겠습니다― 고블릿이 엎질러진다. 이곳의 조명이

간혹 미끄러울 수 있습니다― 생선이 퍼덕거리고 단호하게

머리를 내려치지 못해 퍼덕거리고 엎질러진 

고블릿에서 물이 흘러나온다. 고개를 숙이고

깨끗한 고블릿으로 바꿔주어도 대리석 바닥은 냉담하다.   

  

린넨으로 그릇을 닦는다. 세척기에서 방금

꺼낸 그릇이 얼마나 뜨겁건 개운한

기분이건 간에 고객에게 제공하는 그릇의

물기는 죄악이다는 마음으로 민첩하고 절도 있게

닦아야 한다. 사소한 일에 몰입하다 보면

만사가 부스러기쯤으로 여겨지거나 하찮은

푸념들이 질병으로 옮겨가고는 한다.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것이다. 자식이란 놈이 나이 서른을 먹고도 

남의 밑에서 음식이나 나르고

뜬 눈으로 사랑에 처박히는데

쪽팔리지도 않겠느냐는 꾸지람이 부끄러운 것이다.     


      팔다리 멀쩡한 것에 대해 감사하라 

      세상이 복되고 덕이 넘치나니 

      사랑의 변두리에 홀리지 말라 

교양 넘치는 대화 도중에 부족한 것은

없습니까― 빈 그릇에서 빈 그릇으로 돌아온다. 짬통에

개별적인 몸짓들이 섞여있다. 매니저가 포스를 들여다보고 

주방실장이 파마산 치즈를 뿌린다. 고블릿 속의 물이

실종되었고 그것은 고객의 근사한 저녁에 우리가

연루되어 있다거나 물주전자 속의 로즈마리가 침울할 

틈이 없다거나 뒷골목 고양이가 종량제 봉투를 헤집을 때

내장이 들춰진 꽃게의 집게가 마지막으로 움직였다거나

어쩌면 전부 다일수도 있지만 고블릿에 물이 비어있으면 다가가서

물을 따라줘야 하고 주방 한 쪽에서는 주방직원이 설거지를 한다.     


빈 그릇에서 빈 그릇으로

요청은 간결하고 주방직원이 고무장갑을 끼고 악수를

건넨다. 자주 뵙겠습니다― 손바닥 가득 물에

젖었고 집에 돌아가는 동안 상쾌한 느낌으로

비구름 걷힌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가 일하게 된 것은

장애인우선채용 덕분이라고 어느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해주었다. 땀에 젖은 나의 유니폼은 겉보기에

여전히 청결해보이고 입을 대지 않은 음식이더라도

반드시 버려야 한다. 그릇을 씻는 동안 그는 헤드폰을 끼고 

흥얼거린다. 손이 미끄러져 그릇을 떨어뜨릴 때의 감정과

내가 기르던 반려동물이 오늘 급사했다는 사실이

혼동되었고 깨진 그릇의 가루를 모두 쓸어 담을 수 있도록

물을 약간 뿌리는 것이 엄숙하게 이루어졌다.      


음식을 남겨도 죄 없어요― 남은 음식이 가끔은 지나치게

멀쩡하고 냉장고의 식재료가 재능이나 적성에 따라

분류되어 있을 리가 없다. 그릇의 얼룩이

지워지는데 어째서 비밀은 계속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걸까. 홀에는 늘 인원이 부족하고

그는 설거지에 열중하고 있다.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자

남은 음식을 몰래 집어 먹는다. 호감을 사고 싶은 직원으로부터

승현님도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네요― 라고 듣는다.     




   파트타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다. 화자는 음식을 나르고 접시를 수거한다. 고블릿에 물이 떨어지면 재빨리 달려가 물을 채운다. 고블릿(goblet)이라는 유리 금속으로 된 포도주잔의 명칭과 물 주전자에 로즈메리(rosemary) 한 잎 여유 있게 띄워주고 있으니 이 식당에서 일하는 화자는 나름 ‘품격’ 있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동시에 그의 삶도 넉넉하게 보인다. 홀에서 일하는 동료는 주방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시샘 섞인 목소리로 장애인 우선채용으로 들어왔다고 속삭이니 이곳은 좋은 일터로 느껴진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호텔 레스토랑에서 사용하는 은어(隱語)로 백사이드(back-side)라는 말이 있다. 화려함 뒤에 숨겨진 뒷공간을 비유한 용어이다. 화자는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항상 미소 짓고 있지만, 백사이드에서는 억지 노력으로 인해 쳐진 근육을 숨길 수 없다. 시인은 이 늘어난 주름과 근육을 시에 옮겨 놓았다. 

   화자는 이곳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한다. 일하는 것이 특별할 것은 없다. 누군가에게 돈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든지 고개를 숙여야 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나이 서른을 강조하고 있지만 나이 마흔에 공사장에서 책값을 벌며 문학하는 동료들도 더러 있으니 ‘서른’이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자식이란 놈이 나이 서른을 먹고도/ 남의 밑에서 음식”이나 나른다고 내 안의 있는 우직한 ‘나’는 화자를 꾸짖지만 문학을 위해 팔목 하나 즈음 거뜬히 잘라버렸던 많은 선배들을 생각하면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어리광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파트타임 워커」를 읽는 독자들은 이따위가 시가 될 수 있느냐고 비웃을 수 있다. 나는 당신보다 더 힘들게 일하며 돈 벌며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파트타임 워커」라니, 이게 시라니, 이 정도가 고통이라니,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충분히 문제 제기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내 고통이 중요하니까. 내 고통만 돌보니까. 그것이 우리의 본능이니까. 당신의 고통 따위 전혀 관심 없으니까.

   그러나 이 시에서는 몇 가지 장치들이 평범한 것을 평범하지 않게 바꿔준다. 우선, 고블릿에 물을 채워주는 행위가 강박적으로 울려 퍼진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고블릿에 물을 채워주는 행위로 멈추거나 틀어지면 안 된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바람으로만 남을 뿐 이행되지 못한다. 물은 바닥을 흐르고 흐르는 것이다. 엎질러진 고블릿의 물 이미지는 단호하게 머리를 내리치지 못해 숨이 붙어있는 활어(活魚)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고,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고블릿으로 인해 화자는 통제당한다. 그래서 ‘나’는 고객들의 대화에 침입 되고 침입당한다. 고객들이 품격이라면 화자는 짓눌린 표정이니 상대적 박탈감은 거세게 밀려온다. 손이 미끄러워 바닥에 접시를 떨어트릴 때면 화자가 기르던 반려동물의 급사 소식이 거짓처럼 딸려온다. 화자는 이런 통증과 혼란함 속에서 고블릿에 물을 채운다. 이런 흔적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한 청년이 얼마나 강박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촉각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그다음 인상적인 장면은 접시에 남은 음식을 주방 직원에게 가져갈 때다. 화자는 생각한다. 남겨진 음식들에 대해서, 남겨진 음식들의 쓸모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던 찰나 땀에 젖은 손으로 손님들이 남긴 음식을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 집어 먹는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먹는 행위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식당 규정이 어떠하든 상관없다고 판단했기에, 무엇보다도 음식의 쓸모를 지켜주기 위해. 음식의 쓸모는 나의 쓸모이니까. 그러나 그때 호감 있는 이성 동료가 ‘나’의 모습을 목격한다. 그 순간 화자의 몸은 정지된다. 시인은 생각한다. 내가 하는 문학과 내가 하는 일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식욕은 죄악의 화신일까. 이 시를 읽었으니 당분간 사랑하는 애인과 식당에 가서 음식을 남기지는 못할 것 같다. 유승현 시인의 「파트타임 워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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