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종필 Mar 02. 2021

판(板)이라는 따뜻함

김학중 시인의 『창세』와 「판」에 대한 단상


최근에 본 영화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을 꼽으라면 김보라 감독의 《벌새》와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를 뽑게 된다. 좋은 영화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개봉할 것이고 내가 보지 못한 훌륭한 영화도 여전히 많지만, 최근에 본 이 두 편의 영화는 지금 이곳의 풍경을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애정이 갔다. 《벌새―House of Hummingbird》(2019)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짓눌러버린 목소리를 영상으로 펼쳐내 “양성 모두가 가부장제의 피해자가 된다”는 사실을 성공적으로 보여주었고, 정부 보조금이 끊겨 의지할 수 없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이야기를 다룬, 《조커》(2019)에서는 아서 플렉 이라는 묵직한 인물 하나에 모든 무게를 실어 우리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자극적이고 강렬한 영상 매체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인지, 최근에 살펴본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시(詩)도 아니고 소설(小說)도 아닌 이 두 작품이었다. 기계장의 측면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무슨 이유로 영상 매체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환상을 살포시 걷는 마음으로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와 2017년 4월 30일에 출간된 김학중 시인의 시집 『창세』와 그의 최근작 「판」에 대해 몽상해 보고자 한다.      



『BATMAN THE KILLING JOKE』에서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 조커의 과거 행적이 적혀있다. 이 과정을 읽고 있으면 조커의 악행이 단순한 악행으로 읽히지 않는다. 조커의 억척스러움이 오히려 더 슬프게 다가온다. 조커의 악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조커를 괴물로 만들어 버린 병든 우리 사회를 비판하게 된다. 그래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이 만화를 읽으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겨냥하게 되고 한 번 정도는 자신과 조커를 동일시하게 된다. 나도 조커처럼 모멸과 수모를 당했었다며 조커가 되어 지금 이곳의 세상을 바라본다. 이러한 움직임은 한 번 정도는 ‘조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연민’의 감정이 발동된 것일 수 있다. 사람들에게 역병으로 명명되는 조커는 한 개인이 아니라 부조리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의 맨얼굴이자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BATMAN THE KILLING JOKE』 8쪽


이 만화책에 등장하는 조커의 직업은 배우다. 예술가의 삶이 그렇듯이 조커의 삶도 순탄치  않다. 그에게는 출산을 앞둔 아내가 있었지만, 가장으로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파는 희극 배우이지만 그의 연기를 보고 웃는 사람은 없다.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의무적으로 무대에 올라가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의 몸짓을 대중들은 진부하게 여긴다. “난 가야 해. 가서 무대에 올라야 해.”라고 울부짖지만 그를 불러주는 사람은 없다. 무기력한 조커의 가라앉음은 점점 더 깊어질 뿐이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는 벽 앞에 사랑하는 아내가 서 있다. “여보, 걱정 마. 아무 염려하지 마. 그래도 내가 당신을 사랑하잖아.”라고 말해주는 든든한 당신이 서 있다. 그렇기에 조커는 다시 한번 더 용기를 내 무대에 오른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자격”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대로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조커의 이러한 용기는 용기로 그칠 뿐 모질고 질긴 현실의 벽을 뛰어넘진 못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의 사망 소식을 접한 조커는 돈을 벌어야 하는 목적으로부터 배신당한다. 그에게 현실은 이제 더 이상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조커는 부조리한 현실에 적응하려 들지 않는다. 자신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 현실을 지워버리기 위해 노력한다. 조커는 자신이 받아낸 고통을 그대로 사회에 돌려주기 위해 스스로 악이 되고자 자청한다. 이러한 행동을 그는 윤리로 생각한다. 조커는 우리 사회의 결핍이자 ‘틈’이다. 


누구나 우리는 조커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조커의 괴기스러운 얼굴은 우리와 다르게 보일 수 있지만, 그의 얼굴은 우리 내면과 닮아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조커의 웃음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벤 스틸러 감독의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발현되는 ‘상상’이 유익하고 즐겁다면 조커 방식으로 상상하는 놀이는, 아서 플렉의 우울한 동작과 발맞추어 흔들거리는 음악처럼 평탄치 않다. 이러한 기분 탓인지 그와는 결이 조금 달랐던 한 시인의 작품이 떠올랐다. 김학중의 시인의 「판」이 그것이다. 




아내는 숙소를 집이라 불렀다     

 

아내의 말을 따르자면 

판 위에 숙소를 삼은 오늘은 

판도 집이었다 

     

집이 다만 하나의 판이라니

조금 서글프기도 하지만

      

우리가 묵어온 모든 자리가 

서로 다른 장소였다 할지라도 

단 하나의 집이라고 생각하니 따듯했다

그 온기가 지나온 숙소를 이으면 

하나의 판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과학자는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사실

액체 위에 떠 있는 판과 같아서 끝없이 움직인다는데 

그렇다면 아내와 나는 이 판의 진실을 살아내는 

집의 가족이 아닐까 

     

그녀가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잠드는 곳에 

나 또한 이미 도착해 있다는 느낌

 

밀가루 반죽이 한켠에서 숙성되는 시간으로는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으나 

나는 잠시 하나의 판에 몸을 맡긴다

그러곤 집이라는 거대한 판의 이미지를 덮고 잠든다

지금은 그 이미지의 이불을 함께 덮는 우리이겠으니

      

다음은 늘 간단하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튿날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일어나 

커다란 빵 반죽에서 알맞게 떼어낸 빵들을 오븐에 넣을 뿐이다

여러개의 판에 담아

층층이

      

빵이 오븐에서 알맞게 부푸는 동안 

열기를 견디는 빵 아래 판도 은밀하게 익어갈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판이 있는 곳이면

우리가 짐을 풀어둔 집이 있다     


                                「판」 전문





위에서 나는 김학중 시인의 신작 시를 인용했지만, 이 시에 대해 각주를 붙일 생각이 없다. 독자분들께서 직접 감상해 주시면 고맙겠다. 나는 지금 전략적으로 독자들에게 시 읽기를 권유하고 있다. 아무튼 그는 2017년 4월 『창세』라는 시집을 냈다. 나는 그의 시집을 최근까지 읽지 못하다가 2년이 지난 9월의 어느 날 세미나를 목적으로 그가 경험한 시 세계와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시집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       


김학중 시인의 시집 『창세』에서는 절박한 그 무엇이 ‘표면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가진 모든 패를 걸고 쓰러지겠다는 패기 또한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쳐다보는 대상과의 거리는 긴장 속에서 재생된 것이 확실하나 대상과 함께 머물지 못한다. 풍경 안으로 들어가 비눗방울처럼 작렬이 터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 밖에서 대상 주변을 조용하고 묵묵히 쳐다볼 뿐이다. 죽을 운명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걸어가겠다는 의지가 돌출되기보다는 산책자의 의지가 더 짙게 드러난다. 



이 시집은 독자들에게 연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연민을 느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심장을 찌르는 연민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특징을 단점이라고 논할 수 있겠으나, 김학중 시인의 문법에서는 오히려 이 방식이 ‘장점’이고 ‘절박함’이고 ‘애절함’이다.       


나는 지금 시의 우열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시의 좋고 나쁨을 이야기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부정의 모습을 통해 『창세』를 매만지려고 하는 것이다. 지우고 지우다 보면 그의 맨얼굴이 온전히 남을 것 같다는 몽상을 하는 것이다. 명명하는 행위 자체보다는 지우는 방식을 통해 『창세』의 화자와 만나고 싶은 것이다.      

이 시집에서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재주 있는 시들이다. 이 시들은 내용과 형식적인 측면에서 많은 공을 들인 작품으로 강의 물결을 담은 시(「강을 굽다」), 폐차되는 차의 모습을 통해 은밀한 포식자를 논한 「천적」, 노인의 이마에 들어온 햇빛을 움켜잡아 뜨개질하는 모습과 역사(驛舍)의 한 장면을 뭉쳐버린 「임시 승강장」, 동전 분수대의 풍경을 통해 낮은 존재‘들’을 살포시 끌어안아 준 시(「동전 분수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 「저니맨」, 살 집을 마련하지 못해 바둥거리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그린 「홈스틸」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시들은 건축적인 응시를 통해 대상을 정답고 따뜻하게 그렸다.      


야구를 소재로 쓴 「홈스틸」의 경우, 시집 2부에 수록된 「잠드는 동네」와도 이어진다. 이 시에서 화자는 손전등을 비추며 “입주민이십니까?”라는 경비원의 발언에 “나는 꿈을 시추”하고 있다며 어색한 몸짓을 만들어 보인다. 이 이야기는 시인의 이야기가 아닌 화자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으나, ‘나’의 흔적이 반영된 것임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정확히 말해 독자들에게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상상을 일으킨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횡단한다. 개인을 이야기하면서 보편성을 부각시키는 작품은 논리와 이성을 뭉개버린다는 측면에서 애정이 간다. 시집 『창세』에는 이런 ‘나’들이 구석 모퉁이에서 힘겹게 앉아 있다. 이들은 ‘도시’ 공간에 사는 ‘우리’의 이야기를 대변한다.      


김학중 시인이 바라본 자본주의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해 허둥대는 화자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를 겨냥한다. 『창세』  2부에 수록된 연작시 ‘미래일기 1-7’과 「반도체」, 「행운의 편지」, 「사춘기」, 「바벨 커피 전문점」 등의 작품이 이에 해당된다.      


이 시 속의 화자들은 “입금 통장에 찍힐 날짜를 위해”(「미래의 아침―미래 일기 1」) 힘겹게 하루를 지탱한다. 점수로 환산되는 이곳의 씁쓸한 현실을 “능력”(「일기예보와 시장경제―미래일기 2」)으로 받아들인다. 사사로운 일이나 쓸데없는 일이 지금 이곳에서 더 가치 있게 여겨질 수 있지만, “말할 가치가”(「그라운드 제로―미래 일기 3」)가 없다고 꾸지람을 듣는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잘해야 아버지가 되는 것”(「몽당연필 일기―미래 일기 4」)임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방점은 ‘잘해야’에 머문다. 그는 “종말 없는 종말”(「외계인의 탄생―미래 일기 5」)만이 끝없이 펼쳐지는 세상에 산다. “나는 매일 부서지는 하루를 똑같은 모양으로 / 조립”(「반도체」)한다.       


희망이 없으니 『창세』의 화자들은 다른 세상과 다른 세대를 생각한다.( 「행운의 편지」, 「방주의 워프 항해―미래 일기 6」, 「에덴―미래 일기 7」 등) 이것은 어쩌면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지금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래서 화자의 희망적인 흔적들은 오히려 희망 없음으로 다가온다.    

  

구체적이기보다는 다소 추상적인 희망의 모습들을 제시하는 시인의 모습은 때론 무기력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는 이곳의 현실을 냉정히 응시하지만 결국에는 외면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내가 서두에서 비눗방울처럼 터지지 못했다고 시인에게 말했던 것은 이러한 사실을 두고 한 말이다. 모든 시가 싸울 필요는 없지만, 그의 시적 기술이 급박한 현장과 만났으면 어땠을까. 그런데 이 방법은 옳지 않다. 실존을 배반하는 행위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싸움을 청했다. 




나는 다소 과격하게 그의 모습을 지우려고 했고, 지우는 과정에서 위와 같은 단어들을 얻었던 것 같다. 절박한 그 무엇이 표면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과 풍경 속으로 들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산책자의 의지가 더 부각된다고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그의 시적 특성이 산책자와 가깝다고 느꼈던 ‘나’의 모습이다. 김학중의 시들이 대상과 거리를 둔 것이 문제라기보다는 그가 했던 작업 스타일이 이런 방식이라고 느꼈던 ‘나’가 ‘나’를 더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에서도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 발표된 「판」에서는 앞서 내가 말한 성향이 잠시 주춤하는 것 같다. 풍경 밖에서 걷는 것을 잠시 멈추고 풍경 안으로 들어가 온기를 뿜어낸다. 예를 들어 그가 ‘집’을 소재로 쓴 대표적인 작품인 「홈스틸」과 「잠드는 동네」를 「판」과 비교해 읽어보면 미묘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시에는 잔잔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지각 변동에 주시하는 이유는 그가 『창세』에서 이곳의 부조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싸웠던 싸움의 방식이 나에게 흥미를 가져다주었는지 모른다. 그가 싸움을 하건 하지 않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싸움을 해도 그만이고 싸움을 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그가 걸어간 길은 그의 몫이다. 하지만 부조리한 세상과 싸우려고 했던 그의 의지는 값지다. 그래서 변모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멀리서 응시하는 것이다.      


아무튼 「판」은 따뜻한 시편이다. 이렇게 따뜻한 시편은 정말로 오랜만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집이 없어 임시로 묵어야 하는 “숙소”일 지라도 사랑하는 당신과 함께라면 두렵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몽상을 했다. 이제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겠다. 「판」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김학중 시인의 또 다른 시 한 편을 읽으면서 부질없는 나의 ‘몽상’을 끝맺으려 한다. 아래의 시는 시인의 시론으로 읽을 수 있고, 무엇인가를 이뤄내기 위해 노력한 한 인간의 ‘행위’로 읽을 수 있다. 여기서 ‘한 인간’은 ‘우리’로 어렵지 않게 확장된다. 독자분들께서는 “그녀가 처음 온몸으로 느낀 그늘”이 무엇인지 상상해 보시길 바란다. 「그늘의 무게를 입다」 전문을 옮긴다. 




수많은 무늬들이 다 떠나고 나서야

떠오른 민무늬

그것이 도예가들이 마지막으로 찾은 무늬였다 

     

그릇을 만드는 사람은 

그릇 안에 먼저 그늘을 담아야 한다고 했다

그릇에 깃든 그늘의 무게를

손으로 잴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그릇을 빚으며 그늘을 천천히 만져 올렸다

안으로 가라앉는 그늘의 어둠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잘 마른 그릇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가마 안에 넣으며 

늘 그늘의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가마 안의 열기로 그릇들이 

안으로 안으로 

그늘을 단단히 끌어안는 것을 기다렸다

기다림 속에서 그녀의 동공이

타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가마에서 꺼낸 그릇에서 

그늘의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오랜 시간 그늘의 무게를 재보려 했던 탓일까 

어느 날부터 그녀는 두 팔을 어깨 위로 올릴 수 없게 되었다 

어깨를 부여잡고 주저앉은 그녀는 

무심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민무늬 그릇을 노려보았다

하얗게 드러난 민무늬 그릇에 어른거리는 그늘을 

그녀가 알 수 없었던 그늘의 무게는 

그 무늬 앞에 스며 있었다    

 

도자기 만들기를 그만둔

그녀는 어느 날부터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밑그림을 그리고 

옷감의 여백과 여백 사이를 잘라 

재단하고 옷을 만들었다

아무 문양 없는 단정한 옷이었다   

  

처음 옷을 완성했을 때 

그녀는 옷을, 살짝 들어올려

보곤 미소를 지었다

―옷은 가벼워 영혼의 무게쯤 될까?―

그녀는 잠시 흥얼거려보기도 했다 

무엇가 만든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며

그녀는 자신이 만든 옷을 입었다

따뜻했다 

자신의 옷을 입고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두 팔은 옷의 그늘에 둘러싸인 채

부드럽게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햇빛 속에서 그늘의 민무늬가

몸의 주름들을 풀고 드리워졌다     


아직 몰랐지만 

그녀가 처음 온몸으로 느낀 그늘이었다.      


                             「그늘의 무게를 입다」 전문

        




※ 이 지면에서 참고한 참고문헌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보라, 『벌새』, arte, 2019, 134쪽, 287쪽.  

-김학중, 「판」, 《창작과 비평》 가을호 185, 2019, 110~111쪽. 

-김학중, 「그늘의 무게를 입다」, 『창세』, 문학동네, 2017, 52~53쪽.

-앨런 무어, 『BATMAN THE KILLING JOKE』, 이규원 옮김, 시공사, 2019, 7~8쪽.      

 

-저니맨: 야구 선수들에게 쓰는 용어다. “말 그대로 ‘떠돌이’다. 한 팀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이 팀 저 팀을 전전하는 선수를 말한다. 하지만 원래 그 말이 생겨난 미국과 한국에서 그 말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두 나라에서 선수와 구단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선수가 팀을 옮기는 이유는 두 가지다. 팀에서 버림을 받았거나, 팀이 자신의 상황이나 적성에 맞지 않는 경우. 메이저리그가 FA(자유계약선수) 제도를 도입한 1976년 이후 선수에게 계약에 관한 선택권이 폭넓게 주어지게 되었다. 메이저리그에서 6시즌을 보낸 선수라면 누구나 자유계약을 할 권리를 얻게 되며, 그 선수와 새로이 계약을 맺는 구단은 원소속구단에 그 선수의 등급에 따라 이듬해의 신인지명권을 내주는 것으로 보상을 마치게 된다. 6년차 이상의 선수라면 누구나 구단과 서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며, 따라서 그 기회를 활용해 자주 팀을 옮기는 선수라면 ‘구단의 입장에서 볼 때 가지기도 버리기도 애매한 계륵 같은 존재’거나 ‘선수 자신의 변덕이 심하거나 동료 선수들과 자주 충돌하는 선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1999년부터 자유계약제도를 도입하고는 있지만, 1군에서만 9시즌을 머물러야 자격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계약선수를 영입하려는 구단에서 원소속구단에 ‘전년도 연봉의 450%, 혹은 전년도 연봉의 300%와 18인의 보호선수 외에서 선택한 보상선수 1인’이라는 엄청난 보상을 해야만 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예컨대 2004년에 라이벌 팀 현대 유니콘스에서 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취득한 홈런타자 심정수를 영입했던 삼성 라이온즈는 2003년에 심정수가 현대에서 받았던 연봉 6억 원의 300%인 18억 원에다가 계약금 5억 원을 들여 선발했던 유망주 투수 이정호를 현대 측에 보상해야 했다. 물론 심정수 개인에게 주어야 하는 계약금 20억 원과 연봉 7억 5천, 옵션 2억 5천 등 30억 원은 별도로 계산해야 했다. 말하자면 삼성은 심정수를 얻기 위해 현금 48억 원과 5억 짜리 신인투수 한 명을 ‘출혈’해야 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수십억 원의 돈을 아낄 수 없는 어마어마한 거물급이 아니고는 자유계약을 통해 팀을 옮길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선수들이 드래프트를 받고 입단하는 시점부터 유니폼을 벗고 은퇴하는 시점까지, 팀을 옮기는 데 있어서 자신의 의지를 반영할 방법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5565&cid=58905&categoryId=58913)


-홈스틸: “3루 주자가 홈플레이트(home plate)로 들어오는 도루를 말한다. 발이 빨라야 하고, 투수의 투구 동작 등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정확한 판단력이 요구된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30508&cid=40942&categoryId=31968)                    

작가의 이전글 변신- 빛이 놓인 그곳을 향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